[뉴스프리존, 국회= 권병창 기자] 5∙18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1일에 발생한 계엄군의 발포 직전에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해 ‘시민군 사살 명령’을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당시 주한미군 정보요원으로 근무한 김용장 씨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K57(제1전투비행단) 비행장에 와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대장 등 74명이 회의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 말했다.
김씨는 당시 제1전투비행단에 주둔한 주한미군 501여단에서 근무한 유일의 한국인 정보요원이다.
김씨는 “’발포 명령’은 ‘사살 명령’과 완전히 다르다. 발포는 상대가 총격을 가했을 때 방어 차원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 차이를 설명했다.
김씨는 또 자유한국당의 일부 의원과 일부 보수 세력 등이 제기하는 ‘북한군 침투설’에 대해서는 “전두환이 허위, 날조한 것”이라며 자신 있게 일축했다. “북한 특수군 600명이 광주에 왔다는 것은 미 정보망이 완전히 뚫렸다는 것인데, 당시 한반도 상공에서는 두 대의 위성이 북한과 광주를 집중적으로 정찰하고 있었다”면서 이 첨단 감시망을 피해 잠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시민 행세를 하던 사복 군인들은 실제 존재했다. 제가 직접 첩보를 입수하고 찾아가 육안으로 확인한 후 30~40명 가량이라고 보고했다”며 “나이는 2~30대의 젊은이들이었고 짧은 머리에 일부는 가발을 썼으며,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거지처럼 넝마를 걸친 이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이들을 광주로 보낸 것은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였다”면서, “북한 특수군이 자행했다는 방화, 총격, 장갑차 등의 탈취는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극렬 행위인데, 저는 남한 특수군이라 부르는 이들이 선봉에서 시민을 유도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이라 감히 추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언비어 유포도 이들이 시민으로 위장해 벌인 공작일 것”으로 본다며 “시민을 폭도로 둔갑시켜 강경 진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보안사령부가 공작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5∙18 민주화운동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으로 근무했고 지난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양심선언을 했던 허장환씨 역시 이날 증언자로서 함께 했다.
허씨는 “보안사가 광주를 평정한 뒤 가장 급박하게 한 일이 바로 자행한 범죄를 숨기기 위한 기구를 만드는 것이었다”며 “그 기구가 511대책분석반이고 나중에 511연구회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허씨는 또 전일빌딩 상공에서의 헬기 기총소사와 관련해 “도청을 은밀하게 진압하려는 과정에서 건물에 저격병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해 헬기로 그 저격병을 제압하는 작전을 구상했다”면서 “호버링 스탠스(헬기가 한 위치를 유지하는 비행)에서 발포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발포는 초병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전두환은 절대 발포 명령권자가 아니라 사격 명령권자였다”며 “그 사격을 직접 목도했다. ‘앉아쏴 자세’에서의 사격은 결코 자위적인 것이 아니다. 전두환이 사살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미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 특별기자회견
“5.18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
북한 특수군이 가발을 쓰고 광주에 침투 당시, 가발을 쓴 그들은 전두환이 보낸 남한 특수군(편의대)이었다.
당시 오후 1시 전남도청에는 공수부대가 집단사살을 저지른데다 광주를 방문한 전두환이 사살명령을 하달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란 첫 주장이 제기됐다.
다음은 김용장 전미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이 13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특별기자회견'의 전문이다.
저는 미 육군 501정보여단 광주파견대에서 MIS, 밀리터리 인텔리전스 스페셜리스트, 한국말로는 '군사정보관'으로 25년간 재직한 김용장이라고 합니다.
501정보여단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 육군 방첩부대입니다.
일본에는 500정보여단이 있습니다.
지난 39년 동안 제 마음에는 아주 무거운 십자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이 광주의 진상을 밝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만의 십자가를 이 자리에서 내려놓으려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은 제 아내에게조차 39년 동안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사항들입니다.
1980년 미국은 두 개의 채널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하나는 미 국무성이고, 다른 하나는 미 국방성이었습니다.
국무성은 주한미대사관이, 국방성은 제가 근무했던 501여단이 중심이었습니다.
501여단은 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 소속으로 주한미군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1980년 5월 당시, 국무성 직원이나 CIA 요원은 광주에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 사무실은 광주 제1전투비행장에 있었으며, 모두 4명이 근무했습니다.
저는 유일한 한국인이었습니다.
캐바나 대장과 글렌그리핀 요원은 저의 동료였습니다.
저희는 당시 상부에 약 40건의 첩보를 보고했습니다.
저희가 보고하면, 501여단에서 미 육군 인스컴, 인텔리전스 앤 시큐리티 커맨드, 한국말로는 정보보안사령부로 갑니다.
거기서 다시 국방성 DIA, 디펜스 인텔리전스 에이전시, 한국말로는 국방정보국으로 갑니다. DIA는 육해공군이 모은 정보를 분석해서 다시 백악관으로 보고합니다.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광주에서 제가 직접 보고한 사항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생각, 즉 합리적 추정이나 의견을 말할 때는 명확히 구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먼저 북한군 침투설입니다.
북한군 침투설은 전두환이 만든 허위 날조입니다.
북한군 600명이 광주로 왔다는 주장은 미국의 정보망이 완전히 뚫렸다는 얘기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 상공에는 2대의 군사첩보위성이 떠있었습니다.
고고도와 저고도에 떠있는 2대의 위성이 특히, 북한과 광주를 집중적으로 관찰했습니다.
또 조기경보기, AWACS도 한반도를 정밀 감시했습니다.
사진 촬영과 통신 감청이 실시간으로 이뤄졌던 것입니다.
한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81년도였습니다.
상부에서 10장의 위성사진이 왔습니다.
담양 쪽에 한국군의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니 가서 확인 후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현장에 가봤더니 공수여단이 야산을 깎아 부대를 짓고 있었습니다.
위성사진과 현장을 비교해봤더니 정확히 일치했고, 오차는 없었습니다.
그때 현장에서 만난 분이 장종원 준장이란 분입니다.
북한군 600명이 미군의 첨단 감시망을 피해서 들어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저는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했단 보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2>다음으로 남한 특수군에 관한 것입니다.
이건 제가 보고서를 작성하여 보고한 사항입니다.
일명 ‘편의대’라 불리며 시민 행세를 했던 사복군인들이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5월 20일쯤 K57 광주비행장으로 왔습니다.
성남에서 C-130 수송기를 타고 약 30~40명이 왔으며, K57 격납고 안에 주둔하면서 민간인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로 침투했습니다.
저는 이 첩보를 입수한 후, 격납고로 찾아가 제 눈으로 재차 확인했습니다.
나이는 20~30대에 짧은 머리였고 일부는 가발을 썼으며,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려져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거지처럼 넝마를 걸치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광주로 보낸 것은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였고,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서의남 505 대공과장이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K57에 출입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당시 보고 내용입니다.
이들이 온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합리적 추정입니다.
북한특수군이 했다는 방화, 총격, 장갑차 탈취 등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에 어려운 극렬 행위들은 바로 이 편의대, 저는 남한 특수군이라 부르겠습니다.
이 남한 특수군이 선봉에서 시민들을 유도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언비어 확산도 마찬가지로 이들이 시민으로 위장해 벌인 공작이었을 것입니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만든 후 강경 진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전두환의 보안사령부가 고도의 공작을 펼친 겁니다.
이들의 실체가 밝혀진다면, 광주의 모든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3>끝으로 전두환의 광주 방문입니다.
이는 제가 보고한 내용입니다.
전두환은 21일 점심 12시를 전후로 K57(광주 제1전투비행단, 광주비행장)에 왔습니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시 헬기를 타고 왔으며, 오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부대장과 불상자 1명 등 4명 가량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보고한 내용입니다.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사살이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저는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바로 '사살명령'이라고 봅니다.
그 회의에서 사살명령이 전달됐다고 믿습니다. 이건 저의 합리적 추정입니다.
참고로 발포명령과 사살명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발포는 상대방이 총격을 가했을 때, 방어하기 위해 대응하는 개념입니다.
헬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플라이트 플랜, 즉 비행계획서가 분명 공군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공군 보안부대원 중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밖에 광주 국군통합병원에서 이뤄진 시신 소각, 헬기 사격, 광주교도소 습격, 공수여단 성폭행 등에 대한 첩보 보고도 이뤄졌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기자 여러분들께서 질문해주시면 답변해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보고한 사항에 대해서만 대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