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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변(訥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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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변(訥辯)

김덕권 기자 duksan4037@daum.net 입력 2017/02/10 19:23
눌변(訥辯)
 
 
저도 한 때는 달변(達辯)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25년 전부터 전 세계 원불교교당을 순회하며 셀 수 없이 많은 강연을 한 바가 있지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몸이 쇠약해지고 양쪽 어금니를 뽑으면서 말도 새나가고 그만 달변이 눌변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청산유수로 말 잘하는 사람보다는 어눌한 말투의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눌한 말투의 사람과 대화 하다 보면 사실 좀 답답한 면도 있습니다. 너무 어눌하면 조금 짜증나는 경우 도 있지요. 그런데 가만히 말을 들어 보면 어눌한 말투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못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아마 자신의 솔직한 진실을 말하기도 바쁜데 거기에 거짓을 보태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끔 강연이나 정치인의 연설을 들어 보면 귀에 쏙쏙 들어오게 말 잘하는 사람 있습니다. 굉장히 즐겁습니다. 그런데 뒤돌아서면, ‘저사람 뭔 말했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반면에 어눌한 사람의 말투는 한 가지 사실만 강조 합니다. 여러 내용을 미사여구를 동원해 휘어잡기에는 시간이 없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변약눌(大辯若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45장에 나오는 이 말은 서툴게 더듬거리는 말솜씨를 말하는 것으로 ‘크게 달변인 것은 마치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말(言)은 항상 부족한 그릇입니다. 언어로는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럼 말이 부족한 표현 수단인 것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어째서 ‘눌변’이 웅변(雄辯)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소통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따라서 언어는 그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 세계의 소통 없이는 결코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과의 연상 세계와 듣는 사람의 그것이 서로 어긋나는 경우 정확한 의미의 소통은 차질을 빚게 되기 십상입니다. 
 
말을 더듬고 느리게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이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면 듣는 사람이 따라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느리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언어란 불충분한 표현 수단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언어는 무엇을 지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을 찾아내고 그 대상에 대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합의가 도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말을 적게, 그리고 느리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카나다의 제 20대 총리를 지낸 장크레티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무려 19형제 가운데 열여덟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의 치명적 약점은 또 있었습니다. 선천적으로 한 쪽 귀가 먹고, 안면 근육 마비로 입이 비뚤어져 발음이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다보니 말 하는 자체가 아주 어눌했지요. 
 
소년은 생각은 있었으나 말을 전달하기도 어려웠고, 자기가 말을 시작하면 이상하게 보는 주변의 시선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그에 개의치 않고 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그가 청년이 돼서 정치에 뜻을 품자 가족들은 물론 주위에서 모두 말렸습니다. “네가 단 한번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웃겨본 적이 있느냐?” 
 
유머감각이 없다는 것은 말을 잘 못한다는 우회적 지적이었고, 그것은 정치가에게 절대 맞지 않다는 우정 가득한 충고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건 정치가들은 못 말리는 모양입니다. 그는 변변한 참모도 없이 출마를 했고, 선거 유세를 하러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어눌한 말솜씨를 알기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오히려 궁금해져서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언어장애가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괴로워했습니다. 지금도 제 생각과 의지를 전부 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습니다. 하지만 말하겠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저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저의 엉성한 발음과 말솜씨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제 생각과 의지에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청중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당신을 업신여기진 않겠습니다. 그래도 집단 대표자에게 언어장애가 있다면 큰 결점입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은 잘 못하지만 거짓말은 안 합니다.” 이 사람이 캐나다의 대 정치인 장 크레티앙 입니다. 
 
그는 스물아홉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신체장애에도 불구하고 1993년에는 총리가 됐으며, 이후 세 번이나 총리직을 연임했습니다. 그의 언어장애가 정치인으로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시선도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장애와 그로 인한 고통을 정직하게 시인함으로써 오히려 국민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정직하고 솔직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겸손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정직을 이길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올해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조기 대선이 치러질 모양입니다. 대선이 있는 올해는 잠룡(潛龍)들의 ‘말 대결장’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의 대결장에서 정치인의 여유 있는 유머감각은 필수요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대선에서 우선은 정책이나 인격 겨루기가 아닌 입씨름으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속임수로 포장하고 현란한 혀 놀림은 빈약한 말솜씨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그런데 정작 유권자들이 문제 삼는 건 어휘부족, 불분명한 발음, 어법 난조, 유머결핍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이 원하는 것은 조금 말이 어눌하더라도 정직과 진실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직하게도 거짓말을 일삼고 있는 점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단 같은 말만 일삼는 정치인은 뽑으면 안 됩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돈이나 지식이나 비단 같은 말로 대중을 속이면 또다시 탄핵이라는 지옥에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대중의 마음을 모으면 하늘마음이 됩니다. 대중의 눈을 모으면 하늘눈이 되며, 대중의 귀를 모으면 하늘귀가 됩니다. 그리고 대중의 입을 모으면 하늘입이 되지요. 그러므로 여야를 떠나서 조금은 저처럼 말이 어눌하더라도 진실하고 정직하며 대중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분을 이번 대선에서 이 나라의 지도자로 선출하면 얼마나 좋을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2월 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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