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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53회..
기획

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53회

한애자 기자 입력 2017/07/04 07:49

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5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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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과 함께 하던 생활,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시절, 영화관이나, 미술관, 음악회에 열렬하게 쫓아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 땐가 르느와르 전이 열렸을 때 그는〈모성〉이라는 그림 앞에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르느와르는 모성의 위대성을 아는 화가였어. 그는 여자와 가족을 중심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어! 아마 현대인들에게 다시 재평가를 받을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

자신이 졸라서 찾아다녔던 그 옛날의 예술의 열정! 애춘은 잃어버린 예술을 다시 상기시켰다. 피아노 위에는 악보가 얹어져 있었다. ‘즐거운 집’의 간단한 악보였다. 애춘은 조용히 피아노 곁에 다가갔다. 지선이 자리를 비켜주며 연주해 보라는 눈짓을 했다. 애춘은 천천히 피아노 반주를 하기 시작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집
 내 집 뿐이리…

“야, 선생님 피아노 잘 치신다!”

아이들이 합창을 하고 화음까지 어울리게 넣어 불렀다. 두 번인가 부르고 아이들은 각자의 악기를 들고 애춘이 반주하는 곡에 합주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모차르트 소나티네를 연주했다. 모두 음악에 심취해 무언의 대화를 했다. 애춘은 자신의 몸에 생기가 흐르는 듯했다. 자신이 맘껏 연주할 수 있는 삶의 악기는 무엇일까! 이 집안사람들은 어린이조차 삶을 연주하며 살고 있다. 자신의 집에 값비싼 피아노가 있어도 언제 한 번 그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노래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피아노 뚜껑을 닫아둔 채 방치해 두었듯이 그 동안 모든 게 방치되고 망각하여 어둠의 동굴에 갇혀 지내온 것이다. 우울 속의 나날들, 자신의 정체성으로 모호하게 헤매던 그 안개 같은 낯설고 서글펐던 곳, 애춘은 굳었던 예술적 감성이 이제 재생하는 듯 열리고 있었다. 음악, 햇빛, 리듬, 생명, 감각들, 몸과 영혼의 굳었던 모든 것이 열리고 있었다. 애춘은 난생 처음으로 참된 희열을 느꼈다. 부끄럽지 않은 기쁨이었다.



“이제 곧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멋진 크리스마스 행사 연주곡을 해야 합니다.”

의젓하게 아들 철우가 말했다.

“저희들은요, 다음 주 휴일에 시골에 있는 친정에 좀 갖다올 예정입니다!”

“시골? 아주 좋지요 공기도 좋고…, 정말 이렇게 귀여운 자녀들과 함께 하니 좋겠네요!”

“자연의 전원적인 체험을 좀 해주고 싶어서요. 도심 속에서 자연 친화가 소홀해지는 듯해서요!”

지선은 그런 체험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녀는 조기교육이니 영어교육이니 특목고니… 학업으로 압박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애석해 하고 있었다. 사회 병리적 경쟁 채널의 수레바퀴 식으로 적응해 가는 오늘날의 교육행태들을 걱정했다. 시골은 아이들이 낮은 야산과 개울가와 풀밭을 뛰어다니며 굶주렸던 자연적 접촉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자연은 언제나 친화력이 있고 치유가 있으며 깊은 평온과 안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선에겐〈베토벤은 숲이 울창한 숲속을 산책하다가 위대한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불후의 명곡을 작곡했다. 자연은 인간에게 본향으로 가는 길을 제시해 준다.〉는 전원교육에 대한 개념이 확고하게 세워져 있어서인지 모른다.

“참, 올 때 함께 걸어왔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으, 응? 조금….”

지선은 가까운 거리라 도보로 출퇴근하기 때문에 자가용으로 애춘을 집에 데려올 수 없었다. 애춘도 승용차 요일제라 자가용을 가지고 출근하지 않은 날이었다. 애춘이 택시를 부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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