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조감독을 맡은 영화인 강충구 감독은 나와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다.
시인다방 할 때 박기영 시인의 주선으로 알게 되어 금방 친해졌는데 지금도 종종 연락하고 지낸다.
강충구 감독은 봉산동에서 시작한 시인다방을 문화동으로 옮겨 새로 꾸밀 때 실내 인테리어 등 공사 총감독을 맡았고 손님들도 많이 끌어다주었다. 그 손님들이라고 해봐야 커피 값도 제대로 못내는 룸펜이 대다수였지만 나는 강 감독을 시인다방에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준 고마운 친구로 지금껏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강충구 감독이 나중에 내가 시인다방을 그만 두고 서울의 영화 잡지사에 기자생활을 하고 있을 때 도움을 청해온 적이 있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드디어 완성했는데 영화관 개봉을 잡기 위해서는 언론홍보를 좀 해야 한다면서 영화잡지에 기사로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안 그래도 시인다방 시절에 받은 도움도 갚을 겸 기념비적인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세상에 알릴 겸 편집국장한테 그의 말을 전하고 기사를 쓰겠다고 했다가 된통 욕만 얻어먹었다.
다른 영화잡지사 기자들에게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영화제작 과정만 해도 충분히 기사거리가 된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우리나라 기자들 요즘도 그렇지만, 해외에서 인정받으면 난리도 아니지만 스스로 참된 기사거리를 발굴하는 노력은 일도 하지 않는다.
궁여지책으로 강충구 감독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해외영화제 정보를 알려주면서 해외영화제에 나가보라고 권하고 “상만 받으면 영화개봉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 차원에서 말해줬다. 그런데 그가 진짜로 해외 영화제에 나간다고 연락해왔다.
나는 편집국장에게 독립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해외영화제 나간다는데 그것만으로도 화제거리가 충분히 된다며 기사로 다루자고 한 번 더 제안했다가 “초짜 기자가 벌써 친구사정이나 봐 주려고 한다”면서 옥상에 불려가 왕복으로 귀싸대기를 엄청 얻어맞았다.
안그래도 어릴 적에 물에 빠진 후유증으로 중이염을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그날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결국 장애인 4급 수준의 반 귀머거리가 되어버린 것도 그날 고막이 크게 손상되어 그리된 것이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르카르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고 돌아오자 충무로는 물론 언론사와 온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심지어 어떤 기자는 나한테 연락와서 취재를 하는가 하면 배용균 감독을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한 여성잡자사 기자는 내가 한말을 그대로 기사화하기도 했다. 소품 담당을 했던 신원섭이라는 미술학도가 어느날 머리를 빡빡 밀로 나온 것을 보고 배용균 감독이 즉석에서 주연으로 캐스팅하였다는 에피소드. 주연배우가 지금은 자전거 빵꾸 때우는 일로 입에 겨우 풀칠하고 산다는 이야기.
그리고 노승은 포장마차에 들렀다가 그곳 주인을 즉석에서 캐스팅했다는 등등 내가 전한 말을 기사로 그대로 썼는데 나도 직접 현장을 확인한 것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들은 것이어서 나중에 강충구 감독에게 확인해보니 사실이 아닌 부분도 꽤 있었다.
자칫 영화창고에 사장될 뻔했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그렇게 떴다. 상업적으로는 다른 대중적인 영화에 비해 성공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는 우리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지금껏 기억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그 누구도 영화계에서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했다.
강충구 감독만 서울로 올라와 지금껏 충무로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강 감독을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영화잡지사의 모기업인 세경프로덕션에 소개해주고는 잊고 지냈는데, 나중에 다시 만나보니 그때 이장호 감독이랑 배창호 감독 등과 인연이 되어 영화제작 일을 하고 있었다.
15년 전에도 배창호 감독과 함께 독립영화 ‘길’을 만들었는데, 이 역시 개봉이 힘들다면서 나더러 홍보를 도와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는 정식으로 프로덕션을 차리고 영화제작사 대표가 되어 있었다. 친구 덕에 강남 간다고 나는 졸지에 그의 영화사 이산프로덕션의 홍보실장 감투를 썼다
나는 그 당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제법 열심히 활동 중이었다 별로 덕본 것은 없지만 정운현 당시 편집국장(전. 국무총리비서실장)과는 문청시절 같은 고등학교 문예반에서 동문수학한 막역한 사이였다.
일단 독립영화 ‘길’에 대한 기사를 써 오마이뉴스 사이트에 올리고 내가 아는 언론사 네트워크를 통해 보도자료를 뿌리며 홍보를 시작했다. 곧바로 오마이뉴스는 메인 기사로 취급되었고 여러 언론사와 씨네21 등에서도 꽤 주목을 받았다.
그 덕분에 광주영화제 폐막작으로 초청되었고, 필라델피아영화제에서는 최우수작품상도 받았다. 나는 광주영화제에 초대되어 TV로만 보던 레드카펫을 밟아보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드디어 영화가 개봉됐다. 나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고 노대통령이 오마이뉴스를 볼 것이라고 판단하고 구미에서 CEO를 위한 배창호 감독 초청 시사회 행사를 가지면서 또 한 번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렸다 내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드디어 노대통령이 2007년 새해 첫날에 배창호 감독의 영화 ‘길’을 본 것이다. 이른바 ‘대통령 마케팅’이라고 내가 이름 붙인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적용한 컨설팅 성공 첫 사례가 될 뻔하는 케이스로 나는 지금껏 손꼽고 있다
그런데 아뿔사 안타깝게도 천신만고 끝에 서울 충무로에 개봉관을 잡아 상영 중이던 이 영화는 노 대통령이 영화를 영화를 보자말자 간판을 내리고야 말았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결과였다. 나의 포지셔닝 전략과 마케팅 기법은 멋지게 적중했고, 분명 영화가 대박이 났어야 하는데...
결국 이 영화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전례처럼 언론과 영화 비평가들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흥행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내가 중소기업 홍보 마케팅을 직업으로 삼고 일할 때도 마케팅은 정말 어려운 영역이었다 말콤 그래드웰이 이야기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가 어디에 있는지.
그 누구도 예측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의 오랜 친구는 아직도 충무로를 떠나지 않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생애의 절반을 영화에 바쳐온 그의 삶은 얻은 것 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을 터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그 친구가 서울로 간 까닭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자신의 삶은 비루하지만.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는 오랜 친구의 웃음기 넘치는 순수한 얼굴이 떠오른다 주인공 태석이 고향으로 돌어가는 길에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다.
'거시기'하게 해달라는 주인공의 말에 그를 알아본 이발소 주인은 그것이 예전에 그들 사이에 무언의 약속이었던 '로바뜨 떼일러'스타일임을 재깍 알아채고 의기양양 솜씨를 발휘하는데
그 순수한 모습이 바로 아무리 세월 흘러도 변함없는 내 친구 강충구 감독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친구 바보 노짱의 모습이다. 그리운 옛날을 생각하며 문태준 시인의 시집 『맨발』에 실린 ‘역전이발’을 가만 읊조려 본다
▲역전 이발 - 문태준
때때로 나의 오후는 역전 이발에서 저물어 행복 했다 / 간판이 지워져 간단히 역전 이발이라고만 남아있는 곳 / 역이 없는데 역전 이발이라고 이발사 혼자 우겨서 부르는 곳 / 그 집엘 가면 어머니가 뒤란에서 박속을 긁어내는 풍경이 생각난다 / 마른 모래 같은 손으로 곱사등이 이발사가 내 머리통을 벅벅 긁어주는 곳 / 벽에 걸린 춘화를 넘보다 서로 들켜선 헤헤헤 웃는 곳 // 역전 이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저녁 빛이 살고 있고 / 말라가면서도 공중에 향기를 밀어 넣는 한 송이 꽃이 있다 // 그의 인생은 수초처럼 흐르는 물 위에 있었으나 / 구정물에 담근 듯 흐린 나의 물빛을 맑게 해주는 곱사등이 이발사 // [뉴스프존,대구=문홍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