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영은 망명 공작의 도구
당시 우리 사회는 그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때의 안기부 공작질을 사실로 믿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사건 발생 당시에는 혹시 이 일을 안기부가 한 거 아니냐는 의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혜림의 서울행 얘기까지 나온 상황에서 안기부가 굳이 이한영을 없앨 이유를 찾기 힘들지 않을까요?』(CBS 뉴스쇼)
『이한영이 죽으면 성혜림이 한국에 오겠어요? 안기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한영을 보호하려 했겠죠.』(CBS 뉴스쇼 댓꿀쇼)
이한영은 안기부가 성혜림 자매를 서울로 데려오기 위한 공작의 도구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한영 살해는 성혜림 자매의 망명 공작이 진행 중일 때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 공작이 실패한 뒤에 벌어진 일이다. 따라서 성 씨 자매를 데려오려는 안기부가 이한영을 살해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은 전후 맥락의 곡해다. 이한영은 ‘쓸모’가 없어진 상태에서, 이한영의 입에서 자칫 ‘납치돼 왔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제거된 것이다.
CBS 뉴스쇼 제작진은 이한영이 돈이 궁해 언론사를 기웃거리다 자신의 모친(성혜랑)와 이모(성혜림)의 거주지 정보를 판 것처럼, 그렇게 ‘로열패밀리’의 정보를 발설한 죄(?)로 북측 지도부에 의해 살해됐다는 ‘안기부 각본’을 모범답안인양 되뇐다.
『(이한영이) 여러 사업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요. 안기부 지원마저 끊기자, 96년부터는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 그러다 중요한 정보를 말하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성혜림이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는 내용이 알려져서 큰 화제가 됐거든요. 이한영이 그곳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안다고 말한 거예요. (앵커 : 김정일 위원장의 동거녀였던 성혜림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안다?) 네. 그러면서 이 씨가 기자에게 내가 지금 어려운데 500만 원만 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기자가 ... “돈 안 갚아도 되니까 일단 성혜림 전화번호를 알려주시오. 아니 그냥 얘기 나온 김에 여기서 한번 직접 전화를 걸어봅시다.”』(CBS 뉴스쇼)
라디오 뉴스쇼가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무슨 딴따라 프로도 아니고, 이한영 사건을 다루면서. 어떤 사건의 진상 또는 감추어진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진지한 추리(미루어 생각함)와 추론(미루어 생각해 얻은 소결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결론에 도달함)을 거듭해야 한다. 제대로 보자. 성혜림 망명 공작은 이한영의 <월간조선> 인터뷰로 시작됐다(이때 인터뷰어가 지금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우종창 기자다). 성혜림 자매가 곧 한국에 올 것처럼, 안기부와 <조선일보>가 애드벌룬을 띄운 날(1996.2.13) 이한영이 다른 신문 기자에게 한 말에 진실이 담겨 있다.
[지난 82년 귀순해 88년 결혼, 딸 하나를 두고 있는 이 씨는 [강조]“지난해[1995년] 10월 17일 정부 당국이 생활비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공식 통보해 왔으며, 그 뒤 우여곡절 끝에 모스크바의 이모.어머니와 연락이 닿아 생활비를 전해 받게 됐다”[강조]며 “당시 이모가 10만 달러, 어머니가 2만 달러를 보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에 살고 있는 외삼촌 성일기(64) 씨가 모스크바로 가 두 여동생과 해후, 서로 안부를 전하는 자리에서 전달받은 것이라고 이 씨는 설명했다. 이 때 우리 관계 당국이 알게 돼 계속 관찰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는 그 뒤 모스크바의 이모,어머니와 10여 차례에 걸쳐 통화를 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털어놓았다.](「“이모가 10만 불 보내왔다.” - 이한영 단독 인터뷰」<경향신문> 1996.2.14)
인터뷰 내용을 보면 안기부가 이 씨에 대한 재정 지원을 끊은 뒤 모스크바에 있는 모친과 접촉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나. 그러면, 이 씨가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와 함께 모스크바에 있는 모친과 통화한 날짜가 언제인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언제일까?
[- 첫 번 째 전화는 언제였나.
= 5.6공 시절에는 엄두를 못 내고 문민정부 들어 작년 10월에 처음 전화를 했다.](<동아일보> 1996.2.14)
[이 씨는 작년 10월 중순 경부터 12월 말 경까지 자신의 집(경기 성남시 분당구)과 친구 집에서 모스크바의 어머니 성혜랑 씨와 국제전화를 통해 모자 간의 정을 확인하고, 서울 망명을 위한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었다.](「성혜랑-이한영 모자 통화 내용 작년 10월-12월」<동아일보> 1996.2.17)
‘10월 중순’? 정확히 언제였을까? 놀랍게도 10월 20일이었다. 안기부가 재정지원 중단을 통보한 지 사흘 만이다. 안기부가 ‘더 이상 너한테 돈 못 대줘’라고 말하자 사흘 만에 이한영이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를 찾아가 ‘우리 이모(성혜림. 김정일 국방위원장 전처)의 모스크바 전화번호 알아요’라고 말했다? 이게 말이 안 되잖아!
필시 안기부는 모스크바로 나와 사는 이 씨의 모친 자매를 탈북시키기 위해(성혜림은 1973년부터 모스크바를 오가고 있어 오래 전 거주지 정보가 노출됐을 것이다), 이 씨를 <월간조선> 기자와 만나게 한 것이다. <월간조선> 측이 성혜림의 모스크바 정보를 대가로 이한영에게 500만원을 줬다 한다. 안기부의 사전 작업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다.
안기부는 그렇게 이한영과 <월간조선>을 붙인 뒤 “이한영이 돈이 궁해 정보를 팔려고 언론사를 찾아갔다”는 설을 퍼뜨렸을 것이다. 또 <월간조선>이 이한영과 만났다는 이야기를 흘리면서 다른 언론사들이 이한영에게 접근하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신동아>는 <월간조선>보다 한 달 늦게 이한영과 접촉했던 모양이다.
[그가[이한영] 동아일보 취재망에 잡힌 것은 작년 11월 말. 그는 <신동아> 취재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았고, 취재진은 이 씨의 신분을 확인한 뒤 본격 취재에 나서 이 씨의 이모 성혜림과 이 씨의 어머니 성혜랑 자매가 망명 의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도 감지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 당국이 <동아일보>에 보도 자제를 요청해 왔다. ... <동아일보>는 성 씨 자매의 신변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 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씨에 대한 취재는 계속 ... 그러던 중 지난 13일 일부 언론[조선일보]이 이 씨와 성 씨 자매의 망명 관련 움직임을 공개하고 ...](<동아일보> 1996.2.17)
안기부는 1995년 10월 이한영과 <월간조선>을 연결시켜 성혜림 자매 망명 공작에 나선 직후 몇 차례 이한영에게 모스크바 측과 통화하게 한 뒤 이한영의 외삼촌 성일기(成日耆) 씨(성혜림 자매의 오빠) 등을 모스크바에 보내 성 씨 자매의 망명 공작을 추진했다.
성 씨 일가는 남한 출신이다. 성혜림은 이화여대를 나왔다. 일가는 한국전쟁 전 월북했고, 성일기 씨는 전쟁 중 빨치산 활동 목적으로 남한에 내려왔다 체포된 뒤 즉시 전향했고 이후 그는 남한에 거주해 왔다. 성일기 씨 역시 안기부의 ‘공작 도구’로 쓰였다.
[[성 씨는 2월 13일 서울 은평구 갈현동 자택에서 기자와 만나] .. “동생의 안전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북한 탈출 경위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며 “이번 일이 진정되면 모든 경위를 밝히겠다”고 말해, 동생 혜림 씨의 북한 탈출에 관여해왔음을 내비쳤다. 성 씨의 부인 장영호(63) 씨는 “지난 82년 월남해 분당에 살고 있는 조카 한영이가 생모(혜림)와 직접 통화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며 “남편이 지난해 말에 모스크바로 가서 동생 혜랑 씨를 만나고 돌아 온 뒤 뭔가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짐작했다”고 말했다.](「오빠 성일기 씨, 탈출 관여 시사」<한겨레신문> 1996.2.14)
물론 안기부는 이한영을 시켜 모친과 연락하게 하고 또 그의 외삼촌인 성일기 씨를 모스크바에 보내 성혜랑 씨를 만나게 한 사실을 부인했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성일기(64) 씨는 14일 “지난해 11월 모스크바에서 여동생 혜랑(61) 씨를 만나러 갈 때 국가기관에서 다리를 놓아 주었다”며 “그 때 여동생이 망명할 뜻을 비쳤다”고 밝혔다. 성 씨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 집에서 이날 기자들과 만나 “당시 모스크바 코스모스호텔 프런트에서 여동생 혜량을 만났을 때 제네바를 거쳐 제3국으로 간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해달라는 요청에 “국가기밀이라 말할 수 없다”고 했으나, 국가기관의 주선과 관련해서는 “안기부에서 레저베이션(예약)을 해 놓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 씨는 ... “남한에 있는 아들(이한영)과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한 게 계기가 돼 탈출을 결심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 ... 안기부는 성일기 씨가 지난해 11월 모스크바에서 여동생 혜랑 씨를 만날 때 이를 주선해줬다는 말에 대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동생 만남, 안기부가 예약” ... 성례림 씨 오빠 회견」<한겨레신문> 1996.2.15)
성혜림 자매 탈북 공작이 1995년 11월 가속화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김영삼 대통령이 ‘북한은 고장난 비행기’라고 발설한(1995.12.1일) 시점은 이한영을 앞세운 안기부의 성혜림 자매의 탈북공작이 개시된 직후다). 이한영이 모스크바로 처음 전화를 건 때가 10월 20일이었음을 상기하면 속전속결로 일이 추진됐다는 말이다. 사전 준비 공작이 충분했다는 말이 된다. 안기부는 1995년 11월 성일기 씨를 모스크바에 보낸데 이어 12월에는 이한영의 아내 김종은 씨를 홍콩에 보내 성 씨 자매 측이 보낸 이와 만나게 했다.
[-어머니와 이모가 탈출을 결심[한]... 시기는.
= 작년 11월이다. 그때부터 어머니와 이모는 구체적인 탈출 준비를 했다.
- 준비 내용은.
=이모가 남옥이의 외국인 친구들을 12월초 홍콩으로 보내 아내 김종은(31)와 만났다. 그때 결혼 예물이라며 시계와 반지, 생활비로 12만 달러를 보내왔다. 또 외삼촌(성일기.63)이 모스크바로 갔을 땐 할아버지(성유경.成有慶. 82년 작고) 사진과 유품들을 한국으로 보냈다. 당시 두 분은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 이후의 준비 과정은.
= 지난[1995년] 연말 남옥이를 시켜 프랑스 측과 망명 준비에 관한 협의를 시작, 곧 그쪽으로부터 보장을 받았다.
- 보장 내용은.
= 우선 신변의 확실한 안전을 보장받은 것이 주요한 것이다. 또한 프랑스에 도착한 뒤에라도 타국으로의 망명 가능성에 대해 ‘의사를 존중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 성 씨 일행의 움직임에 대해 알고 있었나.
= 해외에서의 이동 상황은 처음부터 정부 당국을 통해 수시로 확인하고 있었다.
](<경향신문> 1996.2.16)
“외삼촌(성일기.63)이 모스크바로 갔을 땐 할아버지 사진과 유품들을 한국으로 보냈”고 이때 성 씨 자매는 이미 한국으로 오기로 마음을 정했다는 말은 이한영의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성 씨 자매는 장손인 성일기 씨에게 선친의 유품을 전달했을 뿐이다(이후 이한영의 모친 성혜랑은 미국에 갔고, 성혜림은 사망할 때까지 계속 모스크바에 살았다).<계속> 강진욱 / (<1983 버마>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