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엄마는 어제도 4월16일 오늘도 4월16일..
사회

엄마는 어제도 4월16일 오늘도 4월16일

심종완, 임병용 기자 입력 2015/04/16 16:35
단원고 고 이창현군의 어머니 최순화씨 1년간 '통곡의 기록'… 끔찍했던 '그날' 이후 생업을 접고 전국으로 서명운동 다니고 도보행진 하고 다시 아이 영정을 들고 거리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어떻게 1년을 견뎠을까요. 단원고등학교 고 이창현(2학년5반)군의 어머니 최순화씨의 열두 달을 돌아봤습니다. 창현군 어머니의 일기와 매일의 기록,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에 수록된 인터뷰, 언론 보도 등을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어머니에겐 늘 4월16일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뜻에서 매월 16일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습니다. 4월15일 시작하고 끝나는 이야기의 시종(始終)엔 끔찍했던 '그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 담겼습니다. _편집자






[연합통신넷= 심종완, 임병용기자] 4월15일 어젯밤 12시, 일을 하고 있는데 창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 나 친구한테 옷 빌리러 갔다 와도 돼?" 나는 화부터 치밀었다. 얘는 이때까지 뭐하다가 이 늦은 시간에 이러는 건지. 1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더니 그때까지도 가방을 싸느라 침대에 짐을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미리 싸놨어야지!" 나는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창현이는 기분이 좋지 않은 채로 잠이 들었다. 5시간 뒤면 수학여행 떠날 아들의 기분을 망쳐놓은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 숱한 기도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5월16일

창현이는 4월17일 저녁 7시45분 세월호에서 20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온기 하나 없이 싸늘히 식은 채로 그렇게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18일부터 21일까지 아이의 장례를 치렀다. 창현이가 흘러가는 것을 어부가 발견했다고 했다. 구명조끼를 단단히 매고 주머니에 휴대전화와 빗을 넣고 지퍼도 잠근 채였다. 탈출을 시도했던 걸까. 왜 살아서 나오지 못했을까. 장례를 치르는 내내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너무 힘들었다.

창현이 휴대전화를 복구했다. 9시3분 엄마♡에게 전화(실패). 9시3분 엄마♡에게 문자(성공) "엄마 지금 제주도 배 타고 거의 도착했어요." 9시4분 엄마♡에게 전화(실패). 9시14분 11초, 16초, 38초 친구 준범에게 전화(실패). 9시25분 55초 준범에게 문자 "다 걸고 맹세하는데 배가 엄청 기울었음. 기도해주라."(성공) 9시31분 19초 누나에게 문자 "누나, 기도해줘. 나 죽을 것 같아."(실패)

그 절박한 순간에 아들에게 어떤 위험이 찾아왔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나는 잠을 자고 있었다. 이 미안함을 어찌한단 말인가. 창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이를 위해 했던 그 숱한 기도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즐긴 단잠과 함께 모조리 바닷물에 쓸려가버린 것 같다.

6월16일

창현이의 노트에 '2014년에는 여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친구들과 노는 거 좋아하고 엄마 잔소리를 제일 싫어했던 18살 평범한 소년. 그 아이가 이성에 눈을 떠가고 있었구나.

창현이와 배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던 아이가 얼마 전 집으로 찾아왔다. 사진 속 네 명의 아이 중에 그 아이만 살아서 나왔다. 창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자기는 창현이가 아니었다면 학교를 그만둘 뻔했다고, 창현이가 설득해서 학교를 계속 다니게 됐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 창현이는 친구들을 다독여주는 따뜻한 아이였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창현이가 5학년 때 쓴 시를 발견했다. 제목 '방석'. "아주 방석이 비싸더라도 우리 엄마 무릎 밑에 얹으고 싶어요." 얘가 국어 실력이 나쁘구나, 하면서 내가 따로 간직해두었는데, 얼마 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불현듯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40일 동안 매일 새벽기도를 다녔다. 내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으면 창현이는 "엄마, 가자. 사람들 다 갔어" 했다. 기도하는 엄마 무릎이 아파 보였던 거구나. 그래서 방석을 깔아주고 싶었구나. 우리 창현이가 그런 애였는데, 내가 잊어버렸던 거구나. 그날 참 많이 울었다. 그 다정했던 아이와 사이가 안 좋을 때 영원히 헤어져버린 게 너무너무 미안하고 기가 막혀서.

"나는 살고 싶다"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7월16일

특별법 제정을 위해 유가족들이 국회와 서울 광화문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창현 아빠도 단식 중이다. 돌아가는 상황이 점점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다르게 가고 있다.

8월16일

우리 부부는 매일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로 출근하다시피 한다. 생업도 접고 전국으로 서명운동을 다니고 촛불집회에도 참석한다. 안산에서 서울까지 도보행진을 했다. 중간중간에 시민들이 나와서 박수를 쳐주시고 물과 먹을 것을 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날 밤 청와대로 행진하려 했으나 경찰에 막혀서 장대 같은 비를 맞으며 밤새 대치하다 새벽 4시에 다시 안산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광화문에 갔다가 2학년6반 김동혁군이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을 때 촬영한 동영상을 봤다. "나는 살고 싶다"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나는 절규했다. 쓰러질 것 같았다.

9월16일

특별법에 대한 여야 합의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운동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유민 아빠는 46일 만에 단식을 중단했고, 광화문 국민단식 농성장 앞에는 일베 회원이 와서 폭식투쟁을 했다. 불쌍한 사람들.

사람들이 이제 그만하라고 말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도 정말이지 그만하고 싶다. 정부에서 발표한 조사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해경은 왜 선장을 자신의 집에 데려가 재웠고, 왜 하필 그날의 폐회로텔레비전(CCTV)은 지워져 있는가.

10월16일

나처럼 평범했던 엄마들이 촛불집회에 나가 마이크를 잡는다.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남석씨의 아내로, 시온이의 엄마로 살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우리 창현이가 왜 죽었는지 밝히기 전까지는 창현이의 엄마로 살아야 한다. 처음부터 투사가 되어 이걸 밝히고 말겠다고 뛰어든 부모는 단 한 명도 없다. 정부가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자식 잃은 부모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몰아붙일 줄은 정말 몰랐다.

11월16일

대통령이 국회에 온다기에 새벽같이 올라갔다. 대통령 눈길 한번 잡아보려고 엄마들이 '살려달라'고 그렇게 외치는데도 끝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웃으면서 사라졌다. 그 웃음에 정말 경악했다. 그게 사람인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까. 창현 아빠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 꿇을 가치도 없는 인간한테 그렇게까지 하는 게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전에는 몰랐다. 잘 울지 않는 사람인데 우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선장·선원들의 1심 재판 선고가 있었다. 절망스러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다른 유가족들도 엄청난 충격과 아픔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수색이 중단되었다. 배 안에 9명이나 갇혀 있는데. 수색을 중단하면 인양은 금방 해줄 줄 알았는데, 정부는 태도가 돌변해서 인양에 드는 돈 얘기를 하고 있다. 실종자 가족들은 7개월이나 고통스럽게 기다려왔는데 그 희망을 저렇게 잘라버리다니.

언제 가장 힘드냐고요? 언제나 오늘입니다

12월16일

일본의 대형 참사 유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5박6일 동안 일본에 다녀왔다. 참사(2005년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여전히 재발 방지를 위해 싸우고 있는 유가족들이 존경스러웠다. 그들은 그걸 사명이라고 했다. 나의 앞날을 보는 듯했다. 나도 과연 저분들처럼 끝까지 잘할 수 있을까.

연말이 가까워져서인지 간담회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서울에 가려고 고잔역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칼바람이 몰아쳤다. 옷과 목도리로 온몸을 감싸고 또 감쌌다. 순간 그날이 떠올랐다. 4월16일. 8개월 전 오늘, 그 바다도 이렇게 추웠지. 창현이를 찾아 나간 그 바다는 참으로 절망적이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너무나 잠잠했던 그 바다를 향해 목이 터져라 창현이를 불렀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다른 부모들의 울부짖음뿐. 모포를 동원해 이중삼중으로 몸을 감쌌지만 4월의 바다 추위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창현이는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무서울까. 그래도 희망을 갖고 견뎌주기만을 바라며 기도했던 그날. 그 기억이 떠올라서 간담회 때 또 울고 말았다.

1월16일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나에게는 4월16일만 똑같이 반복되며 진행 중이다. 누군가 물었다. 언제가 가장 힘드신가요? 나는 대답했다. 오늘입니다. 언제나 오늘입니다.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좋아했던 창현이. 김치만 봐도 창현이가 생각나서 김치를 먹지 않으니 집에 있는 김치가 줄어들지를 않는다.

2월16일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나왔다. 다른 유가족들은 이 책이 너무 아파서 읽지 못한다고 했지만 나는 더 열심히 찾아서 읽었다. 아직 9명의 실종자가 있으니까.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돌아오긴 했으니까. 다들 어떻게 아팠는지, 그들이 우리 가정에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알고 기억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책과 함께 발송했다. 누군가 물었다. 가장 슬픈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대답했다. 다시는 4·16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3월16일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세상을 다 바꿀 듯이 떠들어대던 정치인들은 다 어디로 가고 모든 것이 4·16 이전과 똑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진실을 밝히려는 유가족들이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성화인 볼썽사나운 부모들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방 어디에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쪽을 택하든 기다렸다는 듯 우리 가족들을 가로막는다. 그들은 돈도 많고 힘도 세고 언론까지 쥐고 흔든다.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다. 정말이지 딱 죽어버렸으면 좋겠지만 창현이가 왜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는지 밝혀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

진실의 힘을 믿어보자. 아무리 밟아도 살아 있는 진실은 계속 꿈틀댈 것이다. 계속 움직여 언젠가는 만천하에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그러니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건강을 챙기고, 잊지 않도록 기록하고, 마음 비뚤어지지 않도록 기도하며,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자.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면 진실의 힘이 더 강해지겠지.

4월15일

정부가 특별법 시행령을 내놓았다. 또다시 노숙이다. 차라리 마음은 편하다. 우리를 길거리로 불러낸 파렴치한 정부가 고맙기까지 하다. 촛불집회 도중 창현 아빠가 경찰에 잡혀갔다가 이틀 만에 풀려났고 나는 삭발을 했다. 1년 만에 우리는 다시 상복을 입고 아이의 영정을 들고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행진을 했다.

이 지옥에서 건져주세요

지난해 우리가 열심히 싸울 수 있었던 건 그렇게 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부모이기 때문이고, 또한 이 부모들을 모욕하는 정부의 무례함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는 깊어지는데 진실은 묻혀가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들어주는 사람은 소수다. 점점 비난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영혼마저 피폐해지는 것 같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정말 어찌하면 좋을까. 하나님 다 보고 계시죠?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지옥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 지옥에서 건져주세요. 빨리 건져주세요.

홍은전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