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뉴스프리존] 서삼봉기자 = 일본 총리 스가 요시히데는 관방장관 시절인 2014년 1월 19일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 안중근 기념관이 개관하자, 안중근의사를 “일본의 초대 총리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는 망언을 했다.
국제법상으로나 일반 상식적으로나 이것은 정당방위였다. 안중근의사는 1907년 당시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연해주에서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있었다. 이범윤이 대장으로 추대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임명된다. 안중근의사는 법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밝혔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직무로, 하얼빈에서 전쟁을 수행하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만국 형법과 국제공법으로서 재판하는 것이 옳다”
의병으로서 일본의 우두머리를 처단한 것은 군사적인 활동이지 개인의 테러로 볼 수 없기에 테러리스트라는 말은 맞지 않다. 일본이야말로 전쟁범죄 국가이기에 오히려 그들이 테러 국가이다. 전쟁을 저지르고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 고문과 대량학살하고도 사죄와 반성은커녕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반해 같은 전범국가인 독일은 전쟁이 끝나고 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유럽 국가들에게 반성하고 사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떠한가?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전범기)를 자랑스럽다는 듯, 군대를 중심으로 극우 세력들과 스포츠 경기 응원에서 아직도 대놓고 사용하고 있다.
일본의 과거 잘못을 저지른 역사는 심판받아야 한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았다고 안중근을 가해자로 보고 이토 히로부미를 피해자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과거의 역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가해자이고 안중근이 피해자임이 증명되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침략하지 않았더라면 안중근은 존경받는 훌륭한 교육자로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빼앗지 않았다면 우리는 돌려달랄 것도 없고 줄 것도 없으니 당연히 싸움이 없는 두 나라가 평화적인 상태가 유지 되었을 것이다. 안중근은 민족과 나라를 위해 한국을 집어삼킨 일본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이는 동양평화사상과 국제평화 유지를 위한 일환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은 이유 중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가 있었다. 안중근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의 독립을 짓밟고 동양평화론자로 행세를 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이승에서 일생을 접기에는 너무 이른 32세의 나이에 순국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 이웃 나라들의 평화를 걱정했던 속뜻이 있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에 순국 되는 바람에 ‘동양평화론’은 서론밖에 쓸 수 없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구상은 그가 평소에 지니고 있었던 ‘삼애정신(三愛情神)인 애천(愛天), 애국(愛國), 애인(愛人)을 사상적으로 기반으로 제국주의에 대처한 논리였다.
동양평화론은 1.서문(序文) 2.전감(前鑑) 3.현상(現狀 4.복선(伏線) 5.문답(問答)으로 기술하려고 하였으나, 사형이 빨리 집행됨에 따라 서문과 전감 일부만 집필하고 미완성으로 끝났다.
동양평화론에 담고자 했던 내용은 러시아가 여순과 같은 좋은 항구를 빼앗아 가졌고 이것을 일본이 다시 빼앗고 언젠가는 중국이 도로 찾으려고 할 것이니 동양 각국의 분쟁거리가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이곳을 중립지대로 만들고 아시아 각국에서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설치하여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장래의 발전을 도모하게 하자, 안중근은 이해가 엇갈리기 쉬운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서로 각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사이좋게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이 동양평화의 대원칙이라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역할을 맡을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로마교황청을 참가 시키고자 한 것은 안중근은 유럽 각국에 대해 교황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각 지역별로 경제공동체가 설립되어 있는데, 안중근의사는 111년 전에 위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에 안중근은 군인으로서 모든 것이 아니라 독립 운동가이며 교육자이며 세계 평화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민족의 지도자로서 위대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안중근의사가 죽음을 앞두고 주장한 ’동양평화론‘은 풍상에도 녹슬지 않는 평화사상과 높은 인격을 알 수 있다.
안중근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1910년 3월 26일 순국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유묵을 약 200 여점을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들에게 써 주었다. 현재 60점이 있으며 이중 26점이 대한민국에 반환 또는 기증되어 보물 569호 안중근의사 유묵으로 지정되었다.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 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순국 전날 여순감옥에서 마지막으로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을 만났을 때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 부를 것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의 사형장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두 동생은 형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미 공동묘지에 묻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일본 정부는 안중근의 시신이 고국에 묻히면 그 곳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절대로 안중근의 시신을 유족에게 넘겨주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1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는 안중근의사와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류동하, 조도선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은 외교관례에 따라 과거의 침략 행위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하고 안중근 의사의 유해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하여 우리 정부의 요구에 당연히 응해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노수문 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