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만 내는 대출이 75% 원리금 상환 시점 오면 새로 대출받아 '돌려 막기'… 금리인상·집값하락땐 타격
지난 3월 시행된 안심전환대출은 32만 가구가 신청할 정도로 히트를 친 정책이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가계 빚의 취약한 구조와 위험성을 여실히 드러낸 계기가 됐다.
[연합통신넷=온라인뉴스팀] 정부가 가계 부채 연착륙 대책의 일환으로 마련한 안심전환대출은 주택대출을 받고 이자만 내는 가계로 하여금 원금을 나눠 갚게 하고 대신 이자 부담을 대폭 줄여주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새벽부터 은행 신청 창구가 장사진을 이뤘고, 20조원 한도는 금방 동이 났다. 정책 당국은 부랴부랴 20조원을 추가 확보해 신청을 받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확정된 추가 신청액은 12조원에서 끝났다. 2차 신청에선 왜 한도가 차지 않았을까. 그 비밀을 파고들면 우리나라 가계 부채의 위험성과 취약성이 드러난다.
◇가계 부채의 뇌관, '이자만 내는 주택대출'
1000조원의 가계 부채 중 집을 담보로 잡히고 금융회사로부터 돈을 빌린 주택담보대출은 554조원(2014년 말 기준)에 달한다. 이 중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은 294조원이다. 정책 당국은 안심전환대출 정책을 설계할 때 ▲변동금리 또는 이자만 내는 대출로서 ▲집값 9억원 이하, 대출액은 5억원 이하이고 ▲대출을 받은 지 1년이 지났고, 연체가 없는 은행권 대출에 한해 신청 자격을 주기로 했다. 정책 당국이 이런 조건을 넣고 추산한 결과 대상자는 112만 가구 정도로 추산됐다.
그런데 실제로 신청을 한 대출자는 32만 가구에 그쳤고, 나머지 80만 가구가량은 신청을 하지 않았다. 금융 당국이 전수조사한 안심대출 신청자의 면면을 보면 연소득이 6000만원 이하가 80%, 대출금 1억원 이하가 64%에 달한다. 1억원 이상 고소득자도 5% 남짓 되지만 대다수는 중산층이라고 볼 수 있다. 중산층 수준의 소득에 과도하지 않은 수준의 빚을 가진 사람들이 '원금도 조금씩 갚아 나가겠다'고 마음먹고 안심대출을 신청한 셈이다. 이와 관련, A은행장은 "이번에 신청 자격이 되는데도 안심대출을 외면한 사람들은 '원금을 나눠 갚을 여력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0년 만기로 1억원을 빌린 경우 이자만 내던 대출자들은 월 29만원씩 냈는데, 안심대출로 갈아타면 원리금 상환액이 월 54만원으로 늘어난다. 결국 80만명은 이자 부담을 덜 수 있는데도 원리금 상환액 자체가 2배로 늘어나는 상황을 감당할 수가 없어 '혜택'을 포기한 셈이다.
안심전환대출 대상에 끼지도 못한 2금융권의 주택대출자 110만명도 이들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정부가 2금융권 주택대출자를 대상으로 안심전환대출과 비슷한 보금자리론 등 저금리 갈아타기 상품을 내놓고 있지만, 낮은 소득으로 인해 총부채상환비율(DTI)을 맞추지 못해 이용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집값과의 위험한 게임에 내몰린 주택대출자들
문제는 원리금을 상환할 능력이 안 되는 가구가 금리가 오르거나 집값이 떨어지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는다는 것이다. 소득에 비해 과다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위기가 오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둑이 될 수 있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사태 당시에도 이자만 갚는 대출를 포함한 악성 대출이 파생상품과 결합해 금융위기를 불렀다. 우리나라는 작년 말 기준으로 전체 주택대출 중 75%가 이자만 갚는 대출(interest-only mortgage)이다. 이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올해 3월 노무라증권 분석 보고서). 우리나라가 이런 기형적 대출 구조를 갖게 된 것은 부동산 시장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경제가 고속 성장하던 시절 집값은 줄기차게 올랐다. 은행 대출을 끼고 집을 산 사람들은 레버리지 효과(leverage effect·빌린 돈을 지렛대 삼아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로 고수익을 누릴 수 있었다. 이자만 갚다 집값이 오르면 집을 팔아 대출금을 갚으면 됐다. 은행 입장에서도 주택의 담보 가치 이내에서 돈을 빌려주는 것이라 별 리스크가 없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집값이 떨어지면서 기형적 주택대출 구조는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腱)으로 돌변했다. 주택대출자들은 이자만 내는 거치 기간(대개 3년)이 끝나면 다른 은행에 가서 신규 대출을 일으켜 기존 대출금을 갚는 '돌려막기'로 버티고 있지만, 저성장과 부동산 시장의 침체, 소득 정체 등으로 점점 한계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다행히 경기가 좋아지고 이것이 가계의 소득 증대로 이어지면 연착륙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불황이 장기화되고 그로 인해 부동산 시장이 다시 침체하면 가계발(發) 금융 위기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