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만 졸업후 공장 취업한 소년공 출신 대법 무죄 판결로 회생..꺾이지 않는 지지율로 과반 달성 [정현숙 기자]=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 이재명 후보가 누적 득표율 50.29%로 과반 득표에 성공해 결선 투표 없이 본선으로 직행하면서 대통령 선거를 150일 앞둔 경선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 후보는 10일 서울 방이동 SK올림픽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서울지역 순회경선을 포함한 11차례 지역경선과 세 차례 일반당원·국민 선거인단 투표에서 누적득표율 50.29%를 기록했다. 이날 이재명 후보는 경선 결과 발표 이후 예정된 ‘후보 수락 연설’을 ‘후보 선출 감사 연설’로 대신해, 대통령은 지배자가 아니라 ‘공복’이라며 자신의 정치철학을 담아 약 9분에 이르는 '폭풍연설'을 했다. 이 후보는 “국민의 삶을 지키는 든든한 대통령이 되겠다”라며 “정쟁에 빠져 민생을 소홀히 하는 일 없이 ‘오직 국민, 오직 민생’의 신념을 지키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선 즉시 강력한 ‘부동산 대개혁’으로 부동산 불로소득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없애겠다”라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또 "국민의 삶을 옥죄고, 공정을 해치는 모든 것이 적폐"라면서 "정치, 행정, 사법, 언론, 재벌, 권력기관뿐 아니라 부동산, 채용, 교육, 조세, 경제, 사회, 문화 등 국민의 삶 모든 영역에서 불공정과 불합리를 깨끗이 청산하겠다"는 포부를 천명했다. 아울러 국민 보편 복지국가와 문화강국을 거론한 이 후보는 연설 마지막에 김구,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을 언급하며 민주적 정통성을 계승하는 후보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내년 3월 9일, 반드시 승리하겠다. 그리고 두 달 후 대통령 취임식장에 존경하는 문재인 대통령님과 함께 굳게 손잡고 서겠다"라고 약속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여당의 대선주자로 이 후보가 선출되는 즉시 “민주당 당원으로서 이 지사의 후보 지명을 축하한다”라고 밝혔다. 이 후보는 소년공에서 시작해 여당 대선 후보에 오르기까지 삶과 정치 역정이 매우 험난했다. 자신이 직접 밝힌대로 중·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나이가 너무 어려 공장에 취직도 할 수 없어서 남의 이름으로 공장을 다녔다. 프레스에 눌려서 팔이 휘어지고, 독한 약품에 후각을 절반 이상 잃어버린 장애인 소년 노동자 출신이다. 정치적 후광도 조직도 학연도 지연도 딱히 없는 변방의 아웃사이더다. 지난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국회의원, 청와대, 중앙정부 관련 경험 없이 당내 비주류로 대선주자 반열에 오른 첫 사례로 꼽힌다. 이 후보가 SNS를 통해 직접 밝힌 가족사를 짚어보자. 그는 1964년 경북 안동 영양 봉화 접경인 심심산골, 안동군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에서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7남매를 데리고 산전을 일궈 살던 부친은 이 후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을 나가면서 모친 혼자 7남매를 키웠다. 모친은 남의 밭일을 대신해주고 겉보리 한 되 좁쌀 한 됫박씩 얻어먹으며, 사람이 굴러내릴 정도의 급경사 산비탈을 일군 산밭에서 키운 감자로 어린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웠다고 한다.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 모친은 감시원 눈을 피해 막걸리를 빚어 농사일이 끝난 밤에 술장사를 했고, 가끔 장에 나가 진통제 가스명수 같은 간단한 의약품을 떼어다 파는 약장사까지 했다. 이 후보는 1976년 삼계국민학교 졸업 후 온 가족이 경기 성남으로 올라가 터를 잡았다. 그는 부친이 일하던 성남시 상대원동에 있던 '동마고무' 공장에서 소년공 생활을 시작했다.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 일하다 동력 벨트에 세 손가락이 휘감겨 엉겨 붙고, 프레스에 왼쪽 팔뚝을 찍혀 장애등급 6급 판정을 받아 군대도 갈 수 없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공장 생활을 하던 그의 꿈은 "남에게 쥐어터지지 않는 것, 배불리 먹는 것,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었다. 소년공으로 공장을 다니며 산재사고로 팔이 비틀어지고 후각을 잃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군복을 입고 군기 잡는다며 출퇴근때마다 ‘빳다’를 치는 관리자가 부럽고 맞기싫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부친이 이 후보가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는 데다 장애인이 된 본인 처지를 비관하며 열일곱 살 때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1년여 만에 중·고교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본고사를 폐지하고 학력고사만으로 대입제도를 바꾼 것이 기회가 됐다. 그는 1982년 전액 장학금과 매달 생활비 30만원을 지급하는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이 후보는 대학에서 받는 공장노동자 월급의 몇배에 이르는 생활보조비로 집에 생활비를 보태면서 정비공으로 일하던 셋째형 이재선 씨에게도 공부를 권유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장학금으로 공부한 이 후보의 형 재선 씨도 좋은 성적으로 생활비를 받으며 대학을 갔고 공인회계사도 합격했다. 이 후보는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연수원 성적도 좋아 판검사 임용을 고민했다. 당시 인권운동가였던 노무현 변호사가 한 특강에서 "변호사는 굶지는 않더라"라고 한 말을 듣고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마침내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됐고 시장 당선 10년만에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올라 선 것이다. 성남시장에 당선된 그는 취임 직후 '성남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무상교복, 청년배당정책 등 파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성과를 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 경기도, 정치권 등과 직접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고, '리틀 노무현'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런데 형 재선 씨가 결혼후 서서히 가족들과 발길을 줄이고, 명절은 물론 모친 생신과 부친 제사까지 불참하며 남이 되어갔다. 재선 씨 부부는 이 후보에 대한 열등감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가족간의 불화가 절정에 달했다는 것이다. 대선 가도에서 이낙연 후보의 우세를 점쳤으나 이재명 후보가 올해 초부터 승기를 다잡았다. 이낙연 후보가 별안간 두 전직 대통령 사면을 건의하겠다고 밝히면서 개혁 성향 지지층이 대거 이탈했기 때문이다. 당내 지지 기반이 없어 '변방의 아웃사이더'로 불렸던 이재명 후보의 지지율은 이후에도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으면서 전국적 조직을 확보했고 현역 의원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이 대선 캠프에 무더기로 합류했다. 이 후보는 성남시장 재선 후인 2016년 10월 박근혜 국정농단이 불거지자 야당 정치인 중 '탄핵과 하야'를 초반부터 강하게 주장하며 개혁성향 시민들 사이에 인기가 치솟았다. 2017년 민주당 대선경선에 나서 문재인 대통령,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이어 3위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차기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이 후보는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16년간 보수정당이 차지했던 지사직도 쟁취했다.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무죄로 결정 나면서 대선주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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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10일 선출된 이재명(57) 경기지사는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 났다'는 표현이 맞아떨어질 정도로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을 걸어왔다.
소년공 시절을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종종 회고할 정도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흙수저 출신의 어려움을 딛고 주경야독 독학으로 변호사를 거쳐 경기도 성남에서 지역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등 입지전적 인생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이번이 대권 재수이다.
지난 2017년 대선 당시 "변방의 벼룩이 소를 잡겠다"며 대권에 도전, 당내 경선에서 '의미 있는 3등'으로 훗날을 기약했던 그는 그 사이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체급을 키웠다.
정치권에서 '전투형 노무현'이라는 평가를 만들어낸 특유의 '사이다' 직설 화법과 승부사적 기질이 '변방의 장수' 이재명을 키워낸 자양분이었다.
국회의원 경험이 없는 '0선' 비주류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컸지만, 무상 교복과 기본소득 등 논쟁적인 정책 과제를 성과로 바꿔내는 뚝심을 지켜온 마침내 정권 재창출의 선봉장으로 발돋움했다.
◇ 화전민 빈민층 출신…盧 만나 인권변호사의 길로
경북 안동 화전민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만 12살 때 경기 성남으로 이주, 영세공장에서 소년공 생활을 했다.
시계공장에서는 스프레이 작업을 하다가 후각이 상했고,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는 프레스에 왼팔이 끼이는 골절상을 당해 팔이 구부러진 평생 장애를 안게 됐다. 그는 2017년 대선 출마 선언을 당시 일했던 성남의 시계공장에서 하기도 했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주경야독'으로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장학금을 받고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고, 1986년 사법고시(연수원 18기)에 합격했다.
여유가 없는 생활 속에서도 꾸준히 써온 일기가 최근 경선 TV토론회에서 공개됐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1980년 7월에는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공부하기가 싫어진다. 그러면서도 평생 공돌이로 썩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 적는가 하면,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1984년 2월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재명아 정신 차려라"라고 써놓기도 했다.
이 후보에게 있어 대학 시절 비로소 알게 된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이 정치 입문 결심의 계기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5·18은 개인적 영달을 위해 살아갔던 저를 공평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살도록 바꿨다", "저를 사회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 건 5월 광주로, 광주는 제 사회적 어머니"라고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사법연수원 시절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의를 들은 것이 노동 인권변호사의 길을 선택하는 계기가 됐다고 이 후보는 회고했다.
연수원 동기로 만난 4선의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은 내내 정치역정을 함께 하는 동지 관계가 됐다.
이 후보는 '성남시민모임'을 창립해 이끌며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의혹을 제기해 주목을 받았다. 2002년 파크뷰 특혜분양사건 당시에는 당시 성남시장과의 전화 통화 녹취록을 공개했다가 공무원자격사칭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04년 성남 구시가지의 대형 병원들이 문을 닫으면서 의료 공백이 심각해지자 직접 시장이 돼 시립의료원을 만들겠노라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는 2005년 8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투신했으나 첫 도전인 2006년 성남시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다. 2007년 대선 때는 이른바 '미키루크'로 알려진 이상호 전 민주당 부산 사하을 지역위원장과 함께 정동영 후보의 외곽 조직인 '정통들'(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을 이끌었다.
2008년 총선에서 우여곡절 끝에 성남에 민주당 공천을 받았지만 낙선했다. 이후 '체급'을 낮춰 2010년 성남시장에 도전해 당선된 뒤 2014년 재선에 성공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이재명 성남시장이 2017년 2월 8일 오전 서울 중구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열린 '이재명의 굽은 팔' 출판 간담회에서 출간 소감을 밝히던 중
◇ 성남시장 때 '모라토리움' 파격 주목…"朴탄핵" 돌직구로 존재감
첫 시장 임기 시작 11일 만에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하는 등 파격적인 시정 운영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재선까지 거치며 SNS상의 열성적 지지층을 중심으로 '전국구 정치인'으로 급부상했고 야권의 잠룡으로 몸값을 높이기 시작했다.
정부와 각을 세워가며 추진한 무상 교복, 공공산후조리 지원, 청년 배당 등 보편적 복지 사업은 타 지자체로 퍼져나가며 자타공인 그의 정책 브랜드가 됐다.
2016년 6월 박근혜 정부의 지방재정 개편안에 반발, 광화문광장 앞에서 11일간 단식농성을 벌인 적도 있다.
이 후보는 같은 해 11월 시작된 촛불 정국에서 민주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거취 문제를 두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탄핵을 외치는 돌직구 행보와 대중의 정치적 갈증을 일거에 해소하는 사이다 발언으로 견고한 팬덤을 형성하기 시작하며 일약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다.
SNS를 통해 자신이 직접 올리는 막힘없고 강렬한 어법의 메시지는 여의도의 거물급 정치인들을 제치고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최대 무기였다.
2017년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패한 그는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대선 및 경기지사 경선에서 친문 진영과 경쟁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은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 과정에서 '혜경궁 김씨', '형수 욕설', '여배우 스캔들' 등 각종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 경기도지사로 추진력 과시…선거법 재판 끝 기사회생
경기도정을 이끌면서는 '기본소득'을 비롯해 기본금융, 기본주택 등 자신의 기본 시리즈 정책 어젠다를 하나씩 구체화하며 대권 재도전의 칼날을 갈았다.
때로는 정부 재정 당국과 각을 세우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 보편 지급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는 등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협조하지 않는 신천지 교단에 강제 역학조사를 지시하며 강경 대응으로 나서는가 하면, 도내 계곡 곳곳에 들어차 있던 불법 시설물들을 모두 철거·정비하는 등 저돌적인 행정가의 면모도 보였다.
이 후보는 '친형 강제입원' 관련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돼 2심 재판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으며 정치인생 최대의 위기에 내몰렸다. 하지만 작년 7월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고 10월 무죄가 확정되면서 족쇄가 풀렸다.
다만 당시 판결에 참여, 무죄 의견을 냈던 권순일 전 대법관과의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진 것은 본선에 나서는 이 후보로서는 난처한 지점이다. 그를 정치인으로서 이름을 알리게 한 성남시장 시절의 대장동 사업을 둘러싼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하면서다.
이 후보는 피아노 전공의 부인 김혜경 여사와는 변호사 시절이던 1990년 같은 교회에 다니던 셋째 형수의 소개로 만났다고 한다. 약 1년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