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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 100] 친일 첩자 오해로 총 맞은 한용운…민족..
기획

[기미독립 100] 친일 첩자 오해로 총 맞은 한용운…민족대표 이모저모

온라인뉴스 기자 onlinenews@nate.com 입력 2019/02/28 10:11 수정 2019.02.28 10:15

통 큰 배려로 거사 성공시킨 손병희
 새벽기도 만든 기독교 신화 길선주
 선언서 쓰려 했으나 거절된 이종일
 서명 거부한 최남선 안 믿은 한용운

민족대표 이종일·한용운(오른쪽) 선생의 수형기록 사진. 일제 당국을 노려보는 듯한 한용운의 눈빛이 이채롭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조선총독부의 박해와 탄압을 감수하면서 독립선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33인의 민족대표는, 모두 종교인들로 각자 믿고 따르는 신은 달랐으나 조선 독립을 염원하는 단심은 같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종교인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으니 이들 가운데 기왕의 보도에서 다루지 않은 이들의 삶을 기록하여 후대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33인 가운데 맨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손병희 천도교 교주는 신유년(1861) 4월8일 충북 청원군 대주리에서 청주목(충북 청주시)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다는 그는 조카의 소개로 21살 때 동학에 입교하였다. 서자 출신으로 신분차별에 좌절하던 그에게 동학은 커다란 희망이었다. 동학 입도 2년 뒤인 갑신년(1884) 10월 그는 해월 최시형을 만났고 계사년(1893)에는 충의대접주가 되어 충청도 일대 동학교인들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갑오년(1894) 농민봉기 이후 탄압이 거세지자 해월은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입도 15년 만에 동학의 3대 교주가 된 것이다. 그의 나이 37살 때였다. 이후 그는 관군의 탄압을 피해 서구문물을 배우고자 미국행을 결심하였으나 경비 문제로 경유지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이때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의 동지를 만나게 되었다. 손 선생은 거사가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통큰 양보와 배려로 연대를 이끌어냈다.

두번째 연명자인 길선주 목사는 ‘조선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애초에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기독교에 입문한 후 조선 최초의 목사 가운데 한명이 되었다. 정미년(1907) 평양 대부흥회를 통해 조선 교회의 초석을 놓았으며 새벽기도를 도입하는 등 조선식 기독교를 만든 선구자다. 기사년(1869) 3월15일 평남 안주군 후장동에서 태어난 그는 야은 길재의 19대 손이다.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조직, 사업부장을 맡아 구국운동에도 앞장섰다.

19번째 민족대표인 이종일 보성사 사장은 독립선언서 인쇄를 책임진 교육자이자 언론인이다. 무오년(1858) 11월6일 충남 태안에서 태어난 그는 15살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병신년(1896) 월남 이상재의 권유로 독립협회에 가입하였고 무술년(1898)년 8월에는 <제국신문>의 창간 사장을 맡았다. <제국신문>은 민권운동, 여성해방, 정부의 비정(秘政) 비판 및 대안 제시를 편집 방침으로 내걸었다. 앞서 창간된 <황성신문>이 소수 한자 해독자들을 위한 특수층 신문이라면 <제국신문>은 창간호부터 제호와 기사를 한글로 제작한 대중신문이었다. 당초 선언서는 그가 쓸 작정이었으나 과격한 언사 때문에 최남선으로 교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선언서의 끄트머리에 이름을 올린 만해 한용운 스님은 이번 독립선언의 숨은 공로자다. 자칫 천도교와 기독교만의 연합으로 그칠 뻔한 거사는 그와 백용성 스님이 참여하면서 불교계까지 아우른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기묘년(1879)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주위에서 신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병신년 홀연히 집을 나와 설악산 오세암에서 칩거하며 불가의 영향을 받았다. 서양문물을 견문하기 위해 러시아를 거쳐 만주를 여행하는 길에 행색이 수상한 나머지 독립군으로부터 친일단체 일진회 첩자로 오해받아 총상을 입기도 하였다. 다행히 총알은 얼굴을 스쳤지만 볼에 파인 상흔과 함께 고개가 비뚤어지고 머리를 흔드는 요두증을 앓게 되었다. 계축년(1913)에는 <조선불교유신론>이라는 책을 펴내 조선 불교의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등 불교계 혁신운동의 중심에 섰다.

독립선언서 작성 등 거사 초기 단계부터 깊이 관여한 그는 서명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최남선에게 선언서 기초를 맡기는 것 자체를 반대하였다. 책임질 수 없는 사람에게 선언서를 맡길 수 없다는 이유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교계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영호남 사찰에 긴급히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는데 지방 깊은 산간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과의 교통 및 연락 지연 등으로 애로를 겪었다고 한다. 거사 준비의 막바지에 종로 대각사의 백용성 스님에게 동참 의사를 타진해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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