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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아무나 되는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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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아무나 되는 것 아니다

박종형 칼럼니스트 기자 입력 2019/03/02 10:15 수정 2019.03.05 09:47

부자가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달콤하다. 세상에 명예를 마다할 사람은 있으나 재물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그런 데도 예나 지금이나 부富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이중적이다. 속으로는 부를 좋아하고 부자 되기를 꿈꾸면서도 겉으로는 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 하고 부자 경멸하기를 예사로 한다.

부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예로부터 그렇게 엇갈려 왔는데 특히 부자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두드러졌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에선 부자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당신들에게 닥쳐 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통곡하십시오.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 많은 옷가지들은 좀먹어 버렸습니다. 당신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당신들의 살을 삼켜버릴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와 같은 말세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잘 들으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챘습니다. 그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또 추수한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영국의 성공회 신학자 퓨지는 “부의 소유는 오만과 잔인, 자만으로 인한 난폭, 부패와 타락의 뿌리이다.”라고 말했다.
또 어떤 학자는 “부자를 존경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가엾게 여겨야 한다. 부자는 자신의 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부가 없는 가난과 부를 소유하지 못한 빈자貧者에 대한 인식은  어떠할까. 애덤 스미스의《국부론》이래 최고의 저서라는 평을 받은《진보와 빈곤》을 쓴 미국의 헨리 조지는 너무나 오랜 배고픔 때문에 부에 대해 유난히 배 아픈 사람이었다. 그가 배고픈 시절에 미국의 국부國父라는 조지 워싱턴은 미시시피회사를 차려 개척 붐이 거세게 불어 닥친 서부지역의 땅을 대규모로 사들였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일리노이 주에 수백만 평 땅을 사들이는 부동산 투기를 했다.  그는 격분해서 ‘땅 부자가 없는 하느님의 도시’를 이룩하려는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런 언급이 있다.
“신약 성경 마태복음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다’는 말처럼 사악한 의도로 왜곡해 해석되고 있는 것은 없다. 만일 현대사회의 모든 진보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건전하고 정상적인 생활 조건 속에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며 ‘우리’의 치욕이다.”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밭갈이에 끌려가는 소에 씌우는 멍에처럼 아무리 땀 흘려 노동해도 타의에 의해 씌워지고 자의로 벗을 수 없는 가난의 굴레가 빈자의 이웃이며 부자인 ‘우리’ 탓이라는 것이다. 해방신학을 창도唱導해 천주교에 커다란 풍파를 일으킨 페루의 사회운동가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신부 같은 이는 “가난은 삶과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거스르는 사회적 문제로 가난은 죽음이다.”라고 극언했다.

어떻든 가난은 불교에서 이르는 삼악도三惡道의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서 겪는 고통과 같은 것으로, 그것에 잡히고 코가 꿰이면 삶은 말할 수 없이 고달파지고 고통스러워진다. 그리고 그것에 쫓기게 되면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팔게 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짐승처럼 변하기도 하며, 푼푼한 삯을 받기 위해 부자의 종처럼 비굴하게 살거나 돈벼락을 맞을 금광맥을 찾자 뜬구름을 잡으려 방황하기도 한다. 또는 인면수심으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버는 데 일생과 목숨까지 걸기도 하며, 또는 창녀처럼 몸을 팔아 부행신浮行神을 섬기기도 한다.

가난은 병마와 같아서 일단 그것에 사로잡히면 그 마수를 벗어나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지겹도록 당해야 하고 무진 고생을 치러야 한다. 그것은 보통으로 청춘을 피폐시키고, 의와 정절을 훼절시키며, 분노의 불길을 일으키고, 굴종의 멍에를 씌우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한없이 초라하고 비굴하게 격하시키고, 창조주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그리스도의 적으로 타락시킨다. 진정 가난이란 두려운 것이다. 우리 삶에 닥치는 불행 중에 가난만큼 끈질기게 고통을 안기는 게 없기 때문이다.

항간에 떠도는 숱한 요언 중에 ‘부자는 하늘이 낸다.’라는 말이나, ‘가난이 죄’라는 터무니없는 말이 있다. 그 두 가지 통념이 다 무책임하고 자조적인 사고의 소산이다. 부자가 되는 게 하느님의 선택적 축복인양 생각하는 건 예수가 사신 그리스도의 삶에 무지한 데 기인한다. 하느님이 특정 인물을 골라 부자가 되게 축복한다는 생각은 가난이 천형天刑이라 한탄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터무니  없는 것이다.

또한, 가난이 곧 불행이요 죄라는 자조적인 낙담 역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던가, ‘마음이 가난한 이’를 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마음에 담지 못하고 사는 소치다. 세상엔 부자이면서 삶이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가난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 또한 많은 것이다. 지혜로운 금언을 가르치는 탈무드에서는, 부유한 사람을 ‘자신이 운명에 만족하는 사람’이라 정의하고 있다.  

부라는 것에는 만족이라는 단어가 없다. 부가 늘어남에 따라 욕망도 함께 커지기 때문에 부가 크면 클수록 욕망의 만족도는 낮아지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것이나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 모두가 사람이 노력해 얻고 이루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어, 어떤 유의 부자가 되고, 어떤 유의 부자로 살 것인지나, 평생 가난의 굴레를 숙명처럼 쓰고 그것에 매여 살 것인지나, 가난을 어떤 만족의 기준에다 견주어 가난하나 만족하게 살 것인지 여부나, 가난을 벗기 위해 자기 자신이 소유한 무엇을 어떻게 바쳐 노력할 것인가 하는 그 모든 문제의 열쇠란 각 개인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좀 더 재산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운 욕망이 끓어오를 때면 즉시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도 하느님의 축복으로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 가 고쳐 생각하는 석복의 삶이라면 그는 부자일 것이다.
아무리 거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아쉬운 것 없이 풍족하게 살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께서 목숨을 거둬 가신다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저 죽음의 강 레테를 건널 때 금화 단 한 개를 물고 갈 수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 근검절약해 겸손하게 살며 자선으로선덕을 쌓아 존경을 받는다면, 재물은 좀 먹지 않을 것이며, 천국에 가서도 아름다운 부자였다 틀림없이 큰 상을 받을 것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조금밖에 가지지 않은 사람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이 가난한 것이다.”라고 했다. 부유함과 가난함이 보편적으로 물질적 소유와 삶의 질을 가지고 그 수준을 판단하지만, 만족감이나 빈곤감에 따라 부자처럼 느끼고 살 수도, 가난뱅이처럼 뭔가 늘 부족하게 느끼며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가난으로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즉, 땀 흘려 일해 자신의 재물을 늘리거나, 아니면 자신의 부에 대한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전자의 일은 우리의 힘으로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지만, 후자의 절제는 마음만 먹으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다.

부를 모은다는 것은, 피땀 흘려 일하고,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그 어떤 굴욕이나 고통도 인내하며 근검절약해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나 쾌락, 안일과 휴식, 호의호식, 취미생활, 단란한 가정생활 같은 열락悅樂을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부자가 되었을 때 그는 성공했다 긴장을 풀고 진탕 먹고 마시고 사치하며, 돈을 물 쓰듯이 마구 쓰고, 교만을 떨며 행세하며, 가난한 이웃의 고단한 삶을 외면하며 천년만년 살고지고 해서는 참된 부자가 되었다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부를 지키며 부자로 사는 게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 짙은 그늘을 들여다보지 않아서 모를 뿐이지 기실 저 현대의 황금도시 엘도라도라는 실리콘밸리에는 부자의 꿈이 산산조각 나서 패배자묘지에 묻힌 수많은 벤처 도전자들이 성공한 부자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런 경쟁에서 살아남고 경쟁에 성공해 큰 부자가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행운을 잡아 되는 것도 아니며 순탄하게 평범한 노력을 들여 차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부자가 된 후 부를 계속해 늘리고 부자 자리를 지키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부란 손에 쥘 때는 한 푼 두 푼씩 힘들게 쌓아 모으지만 손에서 떠나보낼 때는 밑 빠진 독에서 물 새 나가듯 허무하게 사라진다. 부자가 되는 건 하루아침에 불가능하나 부자가 망하는 건 가능하다. 그러므로 부자로 장수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성취라 할 수 있다. 지금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장수하고 있는 부자기업이란 정말 대단한 부자인 것이다. 저런 부자기업이 많을수록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으며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부자를 꿈꾸는 야망을 부에 대한 탐욕과 유유상종하는 관계로 이해한다. 때문에 ‘부자’ 하면 먼저 ‘재물에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 탐욕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번뇌인 삼독三毒 중 하나로 해롭고 나쁜 것이다. 저런 맥락에서라면,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은 기를 쓰고 독을 마시는 게 된다. 왜냐하면 돈을 번다는 것, 부자 되기를 꿈꾼다는 건 돈을 욕심내고 부자 되길 간절히 소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왕성하지 않고서는 부를 거머쥘 수도 부자가 될 수도 없다.
부란 금광에 묻힌 금과 같아서 광맥을 잘 짚어 땀을 쏟아 손바닥이 부르터라 곡괭이질을 해야 겨우 금광석을 캘 수 있는 것이다. 그 금광석을 제련하여 금괴를 얻기까지 자금과 지혜와 시간과 인내와 노력勞力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금괴를 값나가는 금붙이로 가공해 팔아야 비로소 부가 된다. 

부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손으로는 절대로 거머쥘 수 없는 것이다. 진귀하고 비싼 석밀石蜜을 따려면 절벽바위를 타고 올라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무명 창업자 신분에서 백만장자로 성공하는 변신은 돈에 남다르게 허발 들리고, 돈 버는 데 사생결단의 각오로 덤빌 수 있어야 한다.

부가 독버섯처럼 변질돼 만연시키는 황금만능주의와 부와 부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왜곡하고 그릇된 반응을 조장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처럼 가난에 대한 체념을 무기력하니 마냥 방치한 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결사적으로 벌이지 않는 가난의 노예들에게는 가난과 싸워 이겨 부자가 되라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떨쳐 일어나 목숨을 걸고 가난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 그들 몫에서 ‘가진 자에게 더 주어서 더 풍성하게 하고 갖지 못한 자에게는 그가 가진 것조차 빼앗아 더 가난하게 만든다.’는 ‘마태효과’의 굴레는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부자 되는 것이나 가난을 면하는 것이나 다 가슴이나 입으로 되는 게 아니며 결코 쉽거나 공짜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정치가 마치니는 “인생은 일하지 않고 즐기기 위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투쟁이며 전진이다.”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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