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언니의 사건이 오를 때마다, 자극적인 보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용기 낼 수밖에 없었다.”
고(故)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 배우 윤지오 씨가 대검찰청 산하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이하 검찰)'에 출석해 참고인 조사를 받은 다음 날, 자신의 SNS에 적은 문구다. 윤 씨가 검찰에 출석한 그날(3월 12일)은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하는 정준영을 향해 온 언론의 시선이 쏠린 날이었다. 온라인과 신문, TV 뉴스는 ‘장자연’이 아닌 ‘정준영'으로 도배됐다. 장자연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버닝썬 게이트'가 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윤지오 씨 이야기처럼 비슷한 시기 터진 다른 사건으로 인해, 장자연 죽음이 남긴 숱한 의문을 이대로 내버려둔 채 넘어가선 안 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면 누군가는 '장자연 사건'이 영원히 묻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장자연 사건 조사는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이다. '장자연 리스트' 등장인물들의 접대 의혹이 상당 부분 규명된다 하더라도, 이미 공소시효는 끝났다. 따라서 처벌 가능성도 낮다. 그러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부실 수사 이면에 수사기관과 거대한 권력이 어떤 식으로 개입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저널리즘 토크쇼 J'는 진상조사단의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10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장자연 사건’의 검경 부실 수사와 그에 얽힌 언론의 이야기를 상세히 짚어본다.
지난해 12월 5일, 방용훈 코리아나 호텔 사장이 검찰에 전격 소환됐다. 방용훈 사장은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동생이다. 과거 장 씨 사건 수사 당시 경찰은, 2007년 방용훈 사장이 장 씨와 식사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따로 방 사장을 불러 조사한 적은 없었다. 방 사장이 ‘2007년 만남’ 외에도 지난 2008년 가을, 장 씨를 동석시켜 권재진 당시 대검찰청 차장과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 등과 만났다는 진술이 확보되자, 검찰은 이번에 방 씨를 불러 유력인사들과 장 씨를 동석시켜 어떤 강요가 있었는지 집중 추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도 지난해 말 소환됐다. 방 전 대표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차남이다. 2008년 장 씨와 술자리를 가진 것으로 확인됐지만, 당시 참고인 신분으로만 조사받고 내사종결 처리됐었다. 당시 검·경 수사에서는 조선일보 사주 일가의 이름이 거론됐을 뿐 수사나 처벌을 받지 않았지만, 10년 만에 다시 수사 선상에 오른 것이다. 눈에 띄는 점은 방용훈 사장의 소환 소식의 경우 여러 매체에 비교적 상세히 보도됐지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TV조선과 채널A에서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무명 여배우 인권” 강조했던 조선일보
2009년, 신인 배우 장자연 씨 사망 소식을 다룬 조선일보 기사를 살펴봤다. 장 씨 자살 사건 사흘 뒤인 2009년 3월 10일 조선일보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
"수억 원의 개런티를 받는 연예인, 수십억 원의 재력가 스타가 존재하는 우리 연예계 한쪽에서는 꿈을 담보로 잡힌 채 고통을 겪고 있는 무명 여배우라는 존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유린하는 건 그들보다 힘이 센 사람들이다"(2009년 3월 10일)
조선일보는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는 문구와 장 씨의 주민등록번호, 지장, 사인이 적힌 '장자연 문건' 내용 일부를 찍은 사진도 함께였다.
그러나 불과 한 달여 뒤인 4월 13일 조선일보의 태도는 확연히 바뀐다. 장자연이 남긴 자필 문건에 ‘조선일보 방 사장’이 포함돼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뒤였다.
"그 문건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정황이나 구체성 없이 구성원이 온당치 않은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그것은 단지 그 특성 인사의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와 더불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해야 하는 조선일보 전체 기사의 도덕성과 명예에 관한 문제고 더 나아가 조선일보라는 신문 그 자체의 존재 가치에 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문제 인사뿐 아니라 조선일보 기자 전체에 그 모함의 상대가 누구든 가차 없이 대결하겠다는 의지가 생겨나고 있다. 조선일보와 조선일보 사람들의 인격을 모독하고 명예를 짓밟는 저열한 모략에는 물러설 수 없다는 그런 인식 말이다." (2009년 4월 13일 김대중 고문 칼럼)
이어 4월 25일 자 '조선일보의 명예를 훼손한 49일간의 비방 공격'이라는 제목의 사설에는 날 선 문구들이 담겼다.
"일부 언론과 세력들은 수사를 통해 인사의 결백이 밝혀지기 전까지의 기간을 최대한으로 악용해 어떻게든 조선일보와 이 인사의 명예에 상처를 주기 위해 온갖 탈선적 보도와 음해 시위를 벌였다. 이번에 조선일보에 악의적인 명예훼손 공격을 퍼부었던 세력들은 독자를 이어주는 윤리적 신뢰의 고리를 어떻게든 끊어보겠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조선일보는 이 악의적 세력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엄격히 물을 것이다"
'저널리즘 토크쇼 J' 고정 패널 정준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는 “어떤 칼끝이 향하고 있었던 곳이 조선일보 사주뿐만이 아니라, 조선일보의 명예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정황상 느낌이 오기 때문에 이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장자연 리스트'와 조선일보의 관계를 다룬 언론 보도가 당시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조선일보 기자들)이 보인 반응은, 보도량이나 질에 비해 훨씬 더 강했다는 점이 의아하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 기자들이 수사 내용 도청 시도"
2009년 당시 장자연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한 경찰 간부는 최근 KBS 취재진에게 "조선일보 기자 4~5명이 수사내용을 도청하려고 붙었다. 사주가 있으니까. 조선일보 논설위원인가는 형사과장한테 전화하고 청장한테 전화해서 난리 쳤다”고 말했다. 당시 장 씨 사건과 관련한 취재를 맡은 기자들 역시 '조선일보 방 사장님'이라는 문구가 장자연 문건에 포함된 사실이 보도된 후, 조선일보에서는 타 부서 기자들까지 취재 지원을 보내, 장자연 사건 취재 인원이 갑자기 10명 정도로 늘어났다고 털어놨다.
경기경찰청장으로 장자연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당시 조선일보로부터 수사 외압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조 전 청장은 지난해 방송된 MBC 'PD수첩’을 통해 “'우리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시킬 수도 있고 정권을 퇴출시킬 수도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고 (방상훈 사장에게 경찰서에) 들어와서 조사를 받으시라고 하니 (조선일보 간부가) 나한테 와서 정권을 운운하면서 협박하니까 (힘들었다)”며 “방상훈 사장 이름이 거명되지 않게 해달라고 조선일보 측에서 경찰에 굉장히 거칠게 항의해 모욕으로 느꼈고, 정말 협박으로 느꼈다”고 증언했다. 조선일보는 이 같은 인터뷰가 나가자 조 전 청장의 인터뷰 내용이 허위라고 주장하면서 조 전 청장에게 3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MBC PD수첩'에도 정정 보도와 함께 역시 3억 원의 손해배상액을 청구한 상태다.
조현오 "장자연 사건, 조선일보가 거칠게 항의"
정준희 교수는 "고위직 공무원이 언론으로부터 느끼는 부담감이나 압박감은 오히려 일반인들보다도 더 강한데, 승진이나 이후 진로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 조 전 청장이 느꼈을 위협감 등에 대한 진술 자체는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MBC 'PD수첩'에 따르면 방상훈 사장 이름이 거명되지 않도록 조 전 청장을 협박했다는 조선일보 간부는 이동한 당시 사회부장이다. 이 전 부장은 조선일보 논설위원·총무국장을 거쳐 현재 조선뉴스 프레스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이 외에도 조선일보 내부에 별도로 꾸려진 ‘장자연 대책반'이 있었다는 언론보도에는 3명이 실명으로 더 등장한다. 당시 변용식 편집인, 강효상 경영기획실장, 그리고 홍준호 편집국장이다. 이들 ‘고위 간부’의 이후 행적을 따라가 보니, 변용식 편집인은 조선일보 발행인 겸 대표이사 전무를 거쳐 현재 LG 언론재단 이사장으로 있고, 강효상 실장은 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홍준호 편집국장은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현재 조선일보 발행인 겸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들에게 당시 ‘장자연 대책반'이 존재했는지와 각자의 역할에 관해 묻고자 연락을 취했지만, 회신하지 않거나 답변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은 '저널리즘토크쇼 J'에 "2009년 이른바 장자연 사건 당시 사내에 대책반을 구성해 운영한 사실이 없다. 조선일보는 이 사건과 관련해 허위사실을 유포한 언론사와 개인을 허위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고, 민사소송도 제기한 상태이다”는 입장문을 보내왔다.
'저널리즘 토크쇼 J'의 패널인 독일인 기자 안톤 숄츠는 “올해 2월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아마존'의 탈세 의혹 관련 보도를 아주 비중 있게 다뤘는데 워싱턴포스트는 당시 제프 베저스 아마존 창업주가 소유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언론사 사주 일가와 관련된 보도를 다루는 한국 언론과의 차이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창간 99주년 기념사’ 중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창간 99주년 기념사’ 중
지난 5일 조선일보는 창간 99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방상훈 사장은 "조선일보의 비판을 불편해하는 세력이 조선일보를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공격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은 윤리의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라는 기념사를 낭독했다. 하지만 사주 일가의 일탈 행위, 박수환 문자로 드러난 자사 기자들의 금품 수수, 기사 거래 의혹들, 과거 친일 행적, 5.18 왜곡 보도 논란에 대한 사과나 언급은 없었다.
정준희 교수는 이에 대해 "방상훈 사장의 기념사와 김대중 전 주필의 칼럼이 일맥상통한다고 본다.상당히 많은 조선일보 기자가 조선일보의 운명과 사주 일가의 운명과 자신들의 운명을 상당히 일체화해 살아온 측면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조선일보라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언론사가 언론의 기능을 하는데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 이 때문이다. 내부에서 이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작업을 선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널리즘 토크쇼 J'는 KBS 기자들의 취재와 전문가 패널의 토크를 통해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들여다보는 신개념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이다. 17일 밤 10시 30분, KBS 1TV와 유튜브를 통해 방송되는 35회는 정준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 팟캐스트 MC 최욱, 독일 ARD 안톤 숄츠 기자, MBC PD수첩 서정문 피디, KBS 최경영·신지원 기자가 출연한다. [= KBS, 김빛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