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내부적으로 가장 비생산적인 갈등을 빚고 이해가 충돌돼 심각한 경우 기업의 존망까지 위협하는 불화나 다툼이 노사 간의 대립이다.
지금 우리나라 노사관계는 마치 조개와 도요새, 키잡이와 삿대 잡이가 싸우는 형국 같다. 그 가멸차지도 지혜롭지도 못한 노사분규는 기업 호의 뱃길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노사분규를 마치 연례행사처럼 아귀차게 벌이는 기업을 보노라면 이런 고사가 생각난다.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천하를 제패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을 때 마침 조趙나라와 연燕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조가 연을 공격하려 했다. 연나라 사신 소대蘇代가 조나라 혜왕惠王을 찾아가, 양국 간의 전쟁이 엉뚱하게 진나라한테 이로울 뿐 양국에 해로운 어리석은 싸움임을 이렇게 비유를 들어 설득했다.
큰 조개가 모래밭에서 입을 벌린 채 일광욕을 하고 있는데 도요새가 나타나 좋은 먹이라 여겨 그 살을 쪼았다. 대합은 당황해 입을 다물어 도요새의 부리를 꽉 물었다. 둘 다 사력을 다 해 싸우고 있을 때 지나가던 어부가 그것을 보고 둘 다 잡아갔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네 기업들은 노사분규로 매년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난 손실을 당하고 있다. 우린 세계적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훨씬 큰 파업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투쟁적으로 계속하는 나라로 왜자하다. 일본만 해도 폭력적인 극렬한 파업행태를 버리고 노동문화를 노사화합 지향적으로 일신한 지 오래 되었는데, 우린 ‘상투적 투쟁’에 시쳇말을 빌리건 데 그야말로 ‘수구꼴통’이다. 무슨 타당한 필요성에서인지 모르지만 노총은 둘로 쪼개져 늘더니 이젠 급기야 대합과 도요새 싸우듯이 자주 맡 베개 베고 자듯 한다.
우리네 노동운동이 얼마나 인기가 없는지, 노조 가입률은 저조하고, 국민의 시선은 싸늘하다. 오죽이나 지겨웠으면 시민들이 파업 현장에 몰려가 파업을 물리라고 항의시위까지 하 기에 이르렀겠는가. 노조가 부정인사 등 경영에 개입하여 어쭙잖게 위세를 떨면서, 간부가 노동하지 않고 높은 임금을 챙기는, 별로 떳떳치 못한 행보를 무리수를 써서 계속해 오는 동안에, 사업주들은 사람을 부품쯤으로 취급해 전체 노동자의 6할이나 되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키웠다.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존중되려면 모든 관계에서 ‘사람이 우선돼야’ 하는데, 지금 우리네 노동문화에서는, 노조는 존중은 고사하고 골치 아픈 애물단지다.
노조원 노동자는 언제 딴지 걸고 덤빌지 모를 ‘잠재적 투쟁대상’인 형국이다.
노사 간 불화를 말하고 시비할 때 보통 어느 쪽을 탓하기 일쑤인데, 그건 기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다. 기업경영이란 어느 한 가지도 ‘울력(協同)의 이치’로 되어 지지 않는 게 없다. 그건 노사 모두가 자본을 생산에 투자하되 이익을 내는 재화를 생산함으로써 고용을 확충하고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가장 강력한 협동 시너지를 창출하는 관계는 말할 것도 없이 노사관계다. 기업을 병들게 만들고 망치는 힘 또한 거기에 있다. 생산적인 힘과 비생산적인 힘 어느 쪽을 가치로 삼아 지향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사원정신에 달려 있다.
2004년 일본 기업사상 최초로 최고의 이익을 올리고도 노사 간에 합의해서 임금인상을 동결해 세계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샀던 토요타자동차회사가 초일류 기업의 반열에서 계속 놀라운 경영성과를 올리고 있는 이유란 아주 간단하다. 도시 그 기업엔 1951년 이후 파업이란 게 없었다. 50개 회사가 불법파업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받기 위해 노조원을 상대로 2천2백억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가압류를 청구한 우리네 노사풍토에선 상상조차 하 기 힘든 참으로 부럽고 멋진 노사문화다.
토요타 라고 어두운 과거가 없었든 게 아니다. 토요타도 1950년 판매부진으로 경영이 악화돼 부도라는 벼랑 끝으로 몰렸든 적이 있다. 사용자측은 위기타개책으로 1천5백 명 종업원을 해고했고, 노조는 맞대응으로 파업했다.
어쩌면 토요타를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뜨릴지도 모를 그 위협을 기회로 만든 것은 창업주 토요타 기이치로의 사임이었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종업원을 감원한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최고경영자가 사임하자 사태는 진정됐다. 그리고 그 후에는 단 한 번도 파업하지 않았다. 그 후 토요타의 노사는 서로 물고 물리는 맡 베개를 내던지고, 무엇에 열정을 쏟아 진력했으며 어떤 놀라운 시너지를 창출했는가.
2003년의 경우 일본 기업을 중흥시킨 경영혁신 <카이젠 改善>을 토요타의 노사는 물경 57만 건이나 성사시켜 자그만 치 2조 원의 원가절감을 달성해 냈다. 그렇게 노사 간 신뢰에서 솟는 시너지를 성장 동력으로 토요타는 초일류 기업으로 발전했다. 지금 세계 자동차 톱 메이커 자리가 흔들리고는 있지만 여전히 세계 굴지의 자동차메이커 자리는 탄탄하다.
과거 십 수 년간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커다란 경제적 타격을 입히는 투쟁적 파업을 벌여온 현대자동차가 국제경쟁력이나 수익성에 있어 토요타에 한참 뒤쳐지는 이유란 게 바로 저런 노사문화와 사원정신의 수준 차이에 있는 것이다.
대합과 도요새가 서로 물고 물려 다투면 웃음거리밖에 될 게 없는 것처럼 노사정勞使政이 물고 물리며 의아하게 하고 실소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사용자 측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태도가 문제다.
생산적인 노사문화는 사용자측이 먼저 정의로워야 정착하고 발전할 수 있다. 투명경영을 하고 그 과정을 숨김없이 종업원들에게 공개해야 한다. 경영성과를 잘 알지 못해서 낳는 오해나 엉뚱한 기대란 다 해롭다. 또한 사측에서 원칙과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비위를 맞출 요량으로 예외적인 대우와 혜택으로 노조를 쓰다듬어 그 본령마저 변질 시키는 일체의 관행은 건전한 노사문화를 해친다.
지금 노사 간의 암묵적인 크고 작은 이면야합은 공지된 비밀에다 불가피한 필요악쯤으로 만성화 돼 있다. 노사가 피차 약점을 잡거나 잡히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앉지 않고서는 불의한 야합을 피할 수 없으며 법대로 정의롭게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노조가 여전히 폭력적 파업으로 요구를 관철하려는 협상방식은 노사정 모두에게 독을 무친 부메랑을 날리는 것과 같다. 노조가 걸핏하면 날리는 ‘투쟁적 노조’라는 낙인이 찍힌 부메랑이 돌아와 노조에 천문학적 규모의 손해배상이라는 피를 흘리게 했다. 피를 보게 한 쪽이나 피를 본 쪽은 영락없이 원수지간이 된 것이다. 장차 그들이 한 공장에서 어떻게 호흡을 맞추고 손잡고 생산을 할 것인지 상상만 해도 답답하다.
국민들은 물론 상당수 노조원들조차도 그 상투적이고 극렬한 파업 되풀이를 지겨워하고 있다. 그 파괴적인 파업은, 노동자들 스스로가 일구고 지켜야 할 자신의 일터와 재산을 요구라는 철퇴로 내려 쳐 백억 원도 날리고 천억 원도 날려 기업을 심하게 멍들게 만든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런 손실은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노조가 기업을 망하게 할 목적으로 설립되고 활동하는 게 아닐 진데 그 어떤 이유로도 기업에 손실을 입히는 파괴적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국제경쟁에서 한참을 뒤떨어져 정신 바짝 차리고 경쟁력을 길러 상대해야 할 나라에선 벌써 오래전에 사라진 투쟁적 노조가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판을 치며 가뜩이나 고달픈 기업에 무책임하게 딴지를 예사로 걸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런 유의 부메랑이 하도 난무하여 치열한 국제경쟁 하기에 여념이 없는 정부는 노동정책 수행에 만성적인 속앓이를 하며 허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