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에 와서 정부가 앞장 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자고 독려가 부쩍 자심해졌다. 정부의 기업정책 또한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틀린 말도 아니고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다만 만시지탄이고 또 과거에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을 런지 싶은 게 문제다.
과거에는 상생이라는 용어 대신에 더불어 잘 살자는 취지의 공존공영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어의인데 새삼스러워 보일만큼 티를 내는 것은 아마도 현실적인 문제성이 간과하기에 심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 심각성이란,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일 수도 있고, 날로 고착화되어가고 있는 두 기업군 간의 부정적 갈등일 수도 있고, 경제의 균형 성장에 두 기업군간의 윈윈이 너무나 요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경제성장의 나무 격인 기업의 근간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의 잔뿌리와 같은 중소기업의 불만 해소와 신명 살리기가 매우 시급하긴 하다. 그 동안 내리 정부의 기업정책이란 수출드라이브정책 때문이든 빠른 성장위주 정책 때문이든 대기업 위주로 운영돼 왔다. 따라서 중소기업들이 스스로 자조하듯이 중소기업은 다분히 찬밥신세였다. 대기업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소기업은 항상 ‘을’이고 약자였으며 예속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거래관계에서 중소기업이 거래하는 대기업한테 당하는 부당하고 불리한 사례란 비일비재했고 당연한 관행처럼 오래 동안 반복돼 왔다.
예컨대, 정부가 무슨 새로운 상생방안이라도 안출해 낸 듯이 떠벌인 중소기업 고유영역에 해당하는 사업에 대기업이 끼어들지 말라는 제한조치만 해도 그렇다. 그게 고육지계라 속사정을 이해해도 그 발상이 신선하지도 현책이지도 못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독자가 기억할지 모르나 대기업의 저런 식의 분별없고 비정하며 이악스러운 약육강식 짓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자행돼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 금지됐던 양담배 판매가 허용되었을 때 모든 수입권은 이른바 재벌가 혈족들이 수입권을 몽땅 차지해서 중소 수입상들은 입맛만 다셔야 했었다. 대기업이 압도적인 힘을 휘둘러 저런 식으로 중소기업들이 향유하고자 하는 기회를 차지하는 짓거리를 시장원리로 해석한다거나 자유경쟁의 자연스러운 결말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주 무지하고도 무책임한 논리다. 저런 식의 사업방식은 결코 상도라 할 수 없다.
이른바 수만에 달하는 대기업의 협력업체와 그 하청업체가 그야말로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쥔 대기업과 얼마나 전제적인 주종관계를 맺고 거래를 하고 있는가는 비밀도 아니다. 언제나 ‘을’인 중소업체들은 다소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대기업 위주의 일방적인 결제방식, ‘갑’의 원가절감분을 납품가의 희생으로 떠안는 울며 겨자 먹기 식 거래계약 지키기, 대기업의 칼자루 쥔 분들의 고달픈 경조사 챙기기, 구조적으로 뿌리 깊은 큰 부담되는 뇌물 바치기에 발목을 잡혀 시달린다.
진정 상생을 하자면 대기업더러 중소기업의 고유(?) 사업영역을 침범하지 말라 시장원리에 어울리지 않는 요구를 할 게 아니라 저런 비민주적이고 부당한 거래관계와 부정한 관행을 단절하고 뿌리 뽑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조화란 어느 것 한 가지도 상생하지 않고 이뤄지는 것이 없다. 사소한 가위질만 보아도 그렇다. 가위가 가위질이라는 그 소임을 제대로 해 내려면 가위다리가 나란히 사북에 매여 상생으로 자르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가 없다.
상생이란 본디의 진리이며 기업이야말로 조직과 조직, 사람과 사람이 상생하는 협동의 장이고 경제라는 큰 한마당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효율적인 상생을 하는 공존공영의 장이다.
그러므로 돈을 벌기 위해서나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인의를 저버리는 것은 부도덕한 짓이다. 기업, 특히 국가경제를 주도한다는 대기업이 부도덕하면 정치와 경제가 부패하기 마련이고 나아가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므로 기업, 특히 대기업이 극히 경계하고 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