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에 처음인 여기자로서 나의 생활이 일천만 여자계(女子界)에 큰 공헌이 없다면 아무 가치 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자란, 수줍은 태도를 떠나서 아주 대담한 마음으로 동으로 서로 남으로 북으로 정처도 없고 청함도 없는 발길을 멈출 사이 없이 자꾸 돌아다녀야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고 당부하고 싶다.”
추계 최은희가 후배 기자들과 나눈 대담에서 한 말이다. 최은희(1904~1984)는 유교적 봉건체제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3·1운동에 적극 뛰어든 여성으로, 그의 일생과 활동이 주목되는 것은 빈약한 여성 독립운동사 기록에 남긴 흔적이 크기 때문이다. 최은희는 1924년 우리나라 초대 여성 기자가 된 뒤 여성 독립운동의 증인들을 찾아다니며 기록물을 남긴 기자였고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운명이자 소명으로 여긴 기자의 사명은 흰머리를 휘날리던 나이에도 서적과 원고를 한 아름 안고 다니며 시대의 기록물을 6000매 원고에 담았다. 그 기록은 한국 근대 여성사와 한국 여성운동 연구의 이정표로 남게 된다.
농지 무상분배 실천 등 파격적 개화파
최은희는 1902년(호적 1904년) 11월 21일 황해도 백천에서 부친 최병규와 모친 서덕경의 5남 5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손이 귀한 집안의 삼대독자인 부친은 한학자였고, 모친은 아흔아홉 칸이 있는 녹천정에서 자라난 부유한 집안의 여성이었다. 부친 최병규는 그 시대에 파격적인 활동을 한 개화파였다. 대한제국기 말 서울에서 경무부 판임을 지내다 낙향한 뒤 노비 해방과 계급 타파에 앞장서며 가난한 농민에게 무상분배를 시도했고, 사재를 털어 읍과 면에 동흥학교, 영명학교, 용덕학교를 세워 교육에 앞장섰다. 제도에 얽매어 있던 시대의 틀을 스스로 깬 부친의 영향은 고스란히 최은희에게 전해졌다.
최은희는 6세에 기독교 학교인 창동소학교 여자부에서 수학한 뒤, 해주 의정여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했다. 지역 선교회 활동을 하던 중 동경 유학을 결정한다. 그리고 준비 기간에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최초 관립여학교였지만 동시에 국권침탈 이후 수업 과정에서 일제의 역사침탈과 역사왜곡 교육이 일어나는 현장이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몇 번이고 분개를 했던 최은희는 주말이면 인근 교회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러던 중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박희도 선생과 인연이 닿으면서 매주 오후 2시마다 수창동 영신학교 2층 근거지에 모여 비밀 서클 활동을 시작한다. 1919년 고종황제 서거 소식을 접했을 때, 이들은 3·1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고종황제 서거 소식에 최은희는 경성여자고등학교에서 만난 고수선, 최정숙, 강평국 등 제주에서 유학 온 학생, 기숙사생들과 함께 대한문 곡반에 참가시켜달라며 학교에 통곡 시위를 했다. 국권을 상실한 아픔에 황제 서거라는 깊은 슬픔을 감당해내며 최은희를 비롯한 70여 명의 기숙생 전체는 대한문을 찾아갔고, 검정 교복 통치마를 찢어서 조색댕기와 나비조표를 만들어 통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최은희의 독립운동은 3·1만세운동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만세시위의 선봉장에 선 것이다. 만세운동을 하기로 약속한 3월 1일, 최은희를 비롯한 학생들은 학교를 나서기 위해 교문을 향했다. 그런데 교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일본인 교사들이 학교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 비밀 서클 일원이던 고수선 학생이 도끼를 들고 잠긴 자물쇠를 부수려 하자 전교생 300여 명도 저마다 도끼와 돌멩이, 막대기를 들고 나와 교문을 부수면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때 학교의 만세시위 주동자로 32명이 잡혔는데, 그중 최은희와 최정숙은 주요 인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불령선인(不逞鮮人) 요시찰 인물로 기록되었다.
여기자 최초로 비행 취재해 전파 타기도
최은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김마리아, 나혜석, 어윤희, 권애라 등 전국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만났다. 전국의 만세운동 이야기를 직접 들은 최은희는 3월 27일 고향으로 내려온 뒤에도 만세운동에 투신해서 다시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 의로움이 열의로 바뀌고, 부당함에 대한 항거가 애국으로 바뀌는 과정 속에 최은희는 요주의 인물로 감시가 삼엄해지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 최은희는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에서 춘원 이광수를 만나게 되고, 그의 발탁으로 1924년 10월 5일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4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일보> 기자와 학예부장을 지낸 최은희는 여기자로 신기록을 이어나갔다. 초대 여성 기자로 독립운동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로 역사의 기록을 담기 시작했고, 1927년에는 근우회 40명 발기인으로서 중앙위원으로 독립운동 사건의 현장에서 관련 증인들과 교류했다.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최은희는 여기자로는 최초로 비행기 취재를 시도해 전파 방송을 타는 등 선구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최은희는 펜 끝에서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치열했던 독립운동 현장을 오갔고 광복 이후에도 독립운동 사건의 증인을 만나고, 신문과 비밀문서를 캐내면서 한국 여성 독립운동의 일화와 비화, 기록을 하나하나 회복시켜 나갔다. 1945년 9월 여권실천운동자클럽 조직, 서울보건부인회 창립, 1948년 대한부인회 서울시부회장, 1962년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당수, 1971년 3·1국민회의 대표위원, 1981년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 등을 거치면서 여성신문사와 기간지, 사회 전반의 현안에 목소리를 냈던 최은희. 그가 남긴 6000매의 원고는 <조국을 찾기까지> <한국 근대 여성사>(전집)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최은희는 1992년 3·1운동 계열 활동으로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l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