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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특별한 목사의 삶.. 예수사랑교회 오윤주 목사의..
기획

성탄절, 특별한 목사의 삶.. 예수사랑교회 오윤주 목사의 방앗간 사역

온라인뉴스 기자 onlinenews@nate.com 입력 2019/12/25 18:41 수정 2019.12.26 17:57
"교회는 '큰 건물'이 아닙니다" 가래떡 뽑는 목사의 어떤 성탄

"아, 기도가 밥 먹여줘?" 친척 형님의 푸념은 멈추지 않았다 "그 돈, 그 시간이 있으면 가족부터 챙겨야지." 수화기 건너에서 "에고, 참 내~"라는 한숨이 들려오고 전화는 끊겼다. 성탄 전야부터 흐리던 하늘은 방앗간 유리창에 눈 대신 빗방울을 몇 가닥 뿌렸다.

새벽 제단을 마친 오윤주는 가래떡을 뽑으려는 참에 전화를 받고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11시에는 성탄절 예배도 드려야 하는데... "아, 목사가 그 정도 능력도 없어? 교회에 돈이 있을 거 아니야?"라는 형님의 말이 귀에서 맴맴 돌았다. "내가 방앗간에서 돈 벌어 교회 꾸려가는 걸 알 리가 없지..." 중얼대면서도 오윤주는 마음이 답답했다.

시루 앞에는 밤새 불린 쌀이 무심하게 누워있고 침침한 형광등엔 겨울 한기가 단단히 붙어 있다. 오윤주의 한숨을 밀어내며 벽에 걸린 TV에선 "하나님 꼼짝마..."라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전광훈 목사가 종로경찰서에 출두하는 모습이 보인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진행하는 '교회 개혁' 관련 프로그램 같았다.

방앗간 위의 교회

오윤주는 전 목사가 반복해 비춰지는 화면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 불린 쌀을 기계에 넣어 빻기 시작했다. "덜덜덜..." 소리가 나자 쌀가루는 하얀 눈꽃처럼 쌓여나갔다. 연탄 난로 하나로 버티는 방앗간에도 설핏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벌써 작업 들어갔어요?" 삐익 소리와 함께 오윤주의 아내가 검은 바람을 등지고 들어온다. "아침에 편히 자고 예배시간 맞춰서 오래두..." 그가 잔소리를 하지만 아내는 "내일까지 쌀 두 가마를 해야 하는데 혼자 되겠어요"하며 어느새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서둘러 낀다.

오윤주는 겉으로 타박하지만 속으론 반가웠다. 성탄절 설교도 다시 점검해야 하는데 시간이 빠듯했다. 마음까지 심란해서 일손이 안 잡히던 차에 아내가 들어오니 힘이 났다.

서울 경희대 앞 책방을 정리하고 장안동으로 옮겨온 때가 1993년, 마흔네 살 때였다. 아내는 "우리 방앗간 해봐요, 책방보다는 나을 거예요"라고 권했다. 처갓집은 대를 이어 방앗간을 했다. 그렇게 아내 손에 이끌려 터 잡은 곳이 동대문구 장안동 깊숙한 골목이었다. 쌀·기름·고추가루 빻는 기계 세 대와 찜을 할 수 있는 보일러, 가래떡과 절편을 뽑는 기계 등을 갖췄다. 그때 두 딸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1학년. 아이들을 방앗간 창고방에 재워가면서 지내온 세월이 벌써 26년이다.

오윤주가 곱게 빻은 쌀가루를 떡시루에 담아 올려놓으니 아내는 불을 지폈다. 이내 '쒹쒹' 증기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조금 있으면 한 아름 되는 떡이 눈사람 몸통처럼 쪄져 나올 것이다. 아내가 불도 조절하고 간도 맞추는 시간, 오윤주는 난로 한켠에 앉아 물끄러미 아내를 바라보았다.

방앗간에서 아내를 바라보는 오윤주부부가 26년간을 버텨온 방앗간, 이 사역으로 교회를 이끌었다. ⓒ 민병래
방앗간에서 아내를 바라보는 오윤주부부가 26년간을 버텨온 방앗간, 이 사역으로 교회를 이끌었다. ⓒ 민병래

1층에서는 '대성방앗간 사장님'이고 3층에서는 '예수생명교회 목사님'인 그는 전북 남원 가산리, 가난한 농군 집에서 태어났다. 전주공고를 마치고 군대에서 제대한 스물네 살 무렵, 검찰 사무직시험을 준비하다가 여의치 않아 고향 형님댁에서 소 치는 일을 도왔다.

그런데 이문동에 있던 중앙정보부에 '지인'이 취업을 시켜주겠다고 해 서울로 왔다. 결과는 취업 사기. 그때부터 청량리 부근에서 과일장사와 고물장사를 했다. 잠은 청량리역 부근, 독방은 250원 여럿이 자는 방은 하루 150원 하는 합숙소에서 비닐을 덮고 잤다.

그러던 어느 날 오윤주는 정화여상 앞으로 리어카 가득 하루 종일 책을 날라주고 당시 돈 2 만원을 받았다. 헌책이 돈이 된다는 걸 그때 직감했다. 그 후 닥치는 대로 선데이서울 같은 잡지와 단행본을 모아 청계8가로 싣고 갔다. 그렇게 눈을 떠 정릉에 조그만 책방을 열었다. 아내를 만났을 때는 빚만 400만 원 있는, 한 뼘짜리 책방에 매달려있던 청년이었다. 아내는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보여 마음을 줬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도 한 뼘짜리 방앗간에 매어 있게 하니 그저 미안할 뿐이다.

떡의 달인이 된 목사님

십분이나 지났을까? 아내가 서있는 찜통에서는 기세 좋게 김이 올라왔다. 방앗간에는 순식간에 안개가 퍼진 듯했다. 안개를 밀어내며 TV에선 '교회개혁' 얘기가 계속됐다. "명성교회 세습문제는 한국 교회의 큰 상처입니다. 지켜보던 다른 교회에서도 세습 시도를 할 것입니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어요"하며 이어지는 발언에 오윤주는 답답해져 리모컨을 찾았다.

그때 "이제 날라요"라며 아내가 찜이 다 됐다고 소리친다. 오윤주는 손바닥을 비비며 다가가 시루를 번쩍 들었다. 뒤에서 아내가 "밑에 물기 조심해요"라고 일러준다. 30년 가까이 한 일이지만 칠십 줄에 이르니 이젠 손목도 허리도 예전 같지가 않다. '끙' 소리를 내며 찐 떡을 가래떡 뽑는 기계에 엎어 놓았다.

떡시루를 옮기는 오윤주 목사3층에서 목회를, 1층에선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다. ⓒ 민병래
떡시루를 옮기는 오윤주 목사3층에서 목회를, 1층에선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다. ⓒ 민병래

그리곤 떡칼을 들어 찐 떡을 큼직큼직 갈라 가래떡 기계 입구로 밀어 넣었다. 곧 이어 포동포동한 굵기로, 윤기마저 반지르르한 긴 가래떡이 나오기 시작한다. 순순한 하얀 빛의 결정으로 새 생명처럼 쏟아져 나온다. 방금 전만 해도 그저 무심히 천장만 바라보던 쌀 알갱이였는데.

아내는 뽑혀져 나오는 녀석들을 찬물 가득한 '다라'에 식혀 맞춤맞게 잘라 떡판에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열 다섯 줄씩 한판, 그 위에 한 층을 올리고 또 한 층을 올리고... 세 판 정도가 쌓이면 부부는 함께 들어 고추 빻는 기계 앞으로 가져다 놓는다. 시간이 지나면 적당히 굳을 것이고 떡국 떡으로 모양 좋게 썰어내면 그만이다.

가래떡을 뽑는 부부의 모습이 작업은 부부의 살가운 호흡이 중요하다. ⓒ 민병래
가래떡을 뽑는 부부의 모습이 작업은 부부의 살가운 호흡이 중요하다. ⓒ 민병래
환하게 웃고 있는 오윤주 목사 내외위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푯말이 보인다. ⓒ 민병래
환하게 웃고 있는 오윤주 목사 내외위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푯말이 보인다. ⓒ 민병래

오윤주 부부가 이곳에 왔을 때 장안동에만 방앗간이 28군데였다. 그때는 나름 장사가 재미있었다. 결혼 성수기나 설날에는 며칠씩 밤도 샜다. 어느 날은 밤을 꼴딱 새고 새벽을 맞았을 때 동네 할머니가 "젊은 부부들이 밥은 먹으면서 일하느냐"며 따뜻한 국밥을 담아 오신 적도 있었다.

그랬던 방앗간이 꺾이기 시작한 것은 IMF 직후. 동대문 원단시장이 가까워 집집마다 편직기를 돌렸던 장안동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당연히 이전·확장 고사 떡이 줄어들었다. 또 대형마트에서 고춧가루와 기름을 편히 살 수 있고 중국산 때문에 가격도 낮아져 재래식 방앗간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래도 30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왔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다섯 시부터 시작한 가래떡 작업은 어느덧 오전 아홉시를 가리킬 때까지 이어졌다. TV에선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어렵겠다'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바깥 날씨는 꾸물꾸물할 뿐 눈올 기미는 없다.

시계를 보던 아내가 "이제 올라가서 아침 드시고 설교 준비해요"라고 재촉한다. 성화에 못 이겨 오윤주가 떡가루를 훔쳐내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데 "안녕하세요. 오늘 성탄절인데 예수 믿고 부자되세요"하며 나이 지긋한 여자 둘이 성경을 끼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우리 교회 엄청 커요. 목사님이 능력 있어서 성전을 크게 지었어요"하며 시키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오윤주는 "여기 이 양반도 목사님이에요"라는 아내의 목소리, 당황하는 두 여자의 표정을 뒤로 하고 방앗간을 나섰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교회 성추문'이라는 말이 언뜻 TV에서 흘러나왔다.

3층 교회로 들어서는 계단 앞에는 벌써 유모차와 보행기들이 여러 대 줄지어 서있다. 예수생명교회 신도들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거동이 시원치 않아 노인들이 의지해온 보호장구들이 예배 때면 길게 줄을 선다.

오윤주가 교회를 다니게 된 계기는 고물장수를 하던 총각 시절, 어머니처럼 따뜻한 신도를 만난 덕분이었다. 그 후 경희대 앞 책방을 하던 76년, 산정현교회에 다니면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그때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49살의 나이에 감옥에서 순교한 사실을 알았고 이는 청년 오윤주에게 평생 큰 가르침이 됐다.

가난한 교회의 성탄 풍경

그 후 평범한 교인 생활을 하던 그에게 장안동은 변화를 주었다. 마침 방앗간 건물 3층에 교회가 있었다. 젊은 목사였는데 교회에는 성도를 위한 프로그램도, 새벽예배도 없었다. 성인 게임방에 빠졌다느니 이런저런 소문도 돌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오윤주는 안수집사, 장로를 거치면서 7년 동안 목사를 대신해 4시 30분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이끌었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목사안수를 받으라고 권했다. 그래서 오윤주는 김국경 목사가 총장으로 있는 '선목총회' 신학원을 다녔다. 여기서 속성으로 2년 8학기를 마치고 1년 반 동안 대학원을 다녀 목사가 되었다. 그때 따가운 눈초리들이 있었다. "군소신학교에서 무자격 목회자를 양산한다", "영적 수준이 낮다", 그런 말들이 수군수군 들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2000년, 방앗간의 3층 교회를 인수했다. 새롭게 꾸미면서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모두 헌금으로 처리했다. 워낙 신도들이 적고, 형편 어려운 노인들이어서 헌금이래야 일이천 원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례비, 목사 월급을 받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실천했다. 심방비는 모두 교회에 헌금했다.

이때 오윤주는 교회 이름을 '예수생명교회'라 바꾸고 '딱한 어르신 모시기'로 방향을 세웠다. 노인대학도 만들어 장안동과 전농동 노인정을 돌며 홍보했다. 예배를 마치면 점심 끼니를 대접했고 돌아갈 때는 쌀 1kg을 봉지에 담아 나눠줬다. 그러다 보니 교회 재정은 늘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세월이 벌써 19년이다.

30평 남짓 되는, 소박한 제단에 양 옆으로 신도들이 앉는 의자가 열줄 정도 놓여있는 교회당, 예수생명교회의 11시 성탄절 예배가 시작되었다.

예수생명교회의 교회당 전경작고 소박한 교회, 오윤주 목사는 이곳에서 19년 동안 사례비, 목사 월급을 받지 않았다. ⓒ 민병래
예수생명교회의 교회당 전경작고 소박한 교회, 오윤주 목사는 이곳에서 19년 동안 사례비, 목사 월급을 받지 않았다. ⓒ 민병래

성가대의 찬송가는 긴 고갯길을 쉬엄쉬엄 넘어가는 발걸음 같았다. 앉고 서는 예배 동작은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는 듯했다. 그래도 성탄 예배 덕인가, 오늘은 제법 자리가 찼고 활기가 있었다.

사실 초빙 전도사 중에는 "목사님, 우리도 부흥회 한번 합시다"라고 하기도 했다. "우리도 교회 신축사업 벌려 성전 헌금을 받자"는 제안도 있었다. 오윤주는 다 마다했다. 성도들에게 부담 주지 말고 내가 '방앗간 사역'을 더 하면 된다고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찬송가가 끝나고 오윤주는 천천히 성탄 설교 말머리를 열었다. 어느 결에 올라와 성도들 식사 준비까지 마친 아내가 뒤쪽에 보였다.

"교회는 큰 건물이 아닙니다. 화려한 장식이 아닙니다.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낮은 곳에 임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고자 하는 섬기는 마음이 교회입니다."

오윤주의 음성이 조금씩 높아진다. 창가에는 꾸물대는 하늘만 보일 뿐, 아직도 성탄을 축하하는 눈소식은 기미가 없다. 설교가 달아올라도 까믓 조는 할머니, 긴 하품에 주름을 더하는 할아버지, 그저 아멘 아멘만 읊조리는 신도들이 보인다. 오윤주는 이 모습, 이 예배 장면을 사랑한다.

그런데 걱정이다. 자신도 이제 칠십이 넘어 예수생명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후배 목사를 발굴하고 키우고 싶다. 하지만 젊은 목회자들은 대형교회에 취직(?)을 하려고 할 뿐 작고 힘없는 교회는 외면한다.

문득 돌아본 창가에 뽀얀 쌀가루 같은 눈 한 송이가 미끄러져 내려간다. 바람에 잠시 주춤하더니 26년 된 방앗간 간판의 헤진 글씨 '대'자에 다시 '성'자에 잠시 머무른다. 오윤주가 설교를 마치니 다시 긴 고갯길을 넘어가는 찬송가가 시작된다.

<못다 한 이야기>

1. 이 글은 성탄절 이전에 작성하였지만 성탄절을 배경으로 재구성하였고 TV프로나 전도 방문 역시 성탄절로 맞춰 구성하였습니다.

2. 방앗간 창고방에서 재우기까지 하며 키운 두 따님은 훌륭히 성장, 한 분은 민주노총 소속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낮은 데로 임하는' 변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3. 오윤주 목사님은 늘 가슴에 새기는 성경구절로 마태오복음 9장 12절과 13절, 20장 20절을 꼽습니다. 각각 인용하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한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4. 오윤주 목사님은 많은 존경하는 분들을 통해 배웠지만 특히 세 분 목사님
-- 직접 만나뵈지는 못했지만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
-- 결혼 주례를 서주시고 신앙생활로 인도하신 회기동 산정현교회 김광수 목사님
-- 목사의 길로 안수해주신 선목총회 김국경목사님이
자신을 어려움 속에서 잘 인도해준 표상이라고 말합니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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