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부활시기 중 발 씻기기 행사 때 제자가 열한 명인 것은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가 빠져서다. 그는 겨우 은전 삼십 닢을 소유하고자 도저히 값으로 저울질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제자 자리를 포기했다.
예수를 배반하기 전 유다는 재정을 담당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큰 신임을 받은 축에 속하지 않았든가 여겨진다. 말하자면 그는 예수 측근에서 살림을 도맡았던 것이다.
그의 중요한 역할로 보아 그가 매우 유능하고 촉망받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그가 은전 몇 십 냥에 구세주이신 예수를 배반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선 듯 납득되지 않는다. 아무리 돈이 탐나고 당시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불안한 상황이 두려웠다 하드라도, 그까짓 얼마간의 돈에 주인이요 스승이며 구세주인 예수를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니, 아마도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쫓겨난 이후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배반의 시작이 탐욕이었고 그것이 그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 본시부터 약해 악마의 유혹에 힘없이 흔들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천상에서 누릴 영원한 행복보다는 당장 눈을 즐겁게 하는 은전의 빛이 더 그를 사로잡았으며, 미래이긴 하지만 약속된 커다란 축복을 믿지 않고 버린 인간한테 있어 배신이란 그다지 지기 어려운 십자가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업에 있어 사원은 사도들과 같다. 그들한테 기업은 구세주 같은 존재이고, 경영의 성공은 구원과 같은 지향 이상이다. 그들은 모두 기업이 ‘소망과 행복의 장(場)’임을 믿고 모였다. 그들은 각자 업무성과책임이라는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일한다. 이를테면 경영진은 열두 제자인 셈이고 유다는 그중 재무담당 중역쯤 된다 할 수 있다.
사원은 예수를 믿는 제자들과 무리가 그러했듯이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영광의 그날을 위해 땀 흘려 일했고 믿고 따른다. 그들이 기업을 통해 이상으로 지향한 세계는 다 같이 잘 살고 행복하게 사는 미래고 직장공동체이며 보람의 장이다. 그런 기업을 ‘유다의 더러운 은전’을 챙기느라 배반하고 팔아먹는 경영자나 사원이 있다는 것은 여간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슬프게도 기업에도 유다와 같은 사도들이 있다.
그들은 평소 인재로 인정받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충신처럼 굴며 중요한 일들을 맡아 한다. 그런데도 그들 역시 유다처럼 은전 챙기느라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거나 그 하수인이 되어 기업을 팔아먹거나 부실화 시킨다.
그들에게 섬뜩한 칼날을 들이대며 충복이 되라 위협하는 사람은, 유다를 협박하고 회유한 대사제들처럼 인사권이라는 권력을 쥔 기업주며, 저들을 눈부신 은전으로 유혹하는 사람은 기업이야 어떻게 멍들고 병들건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배반자들이다.
기업의 주인 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몫과 무게의 책임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있다. 그건 협동하여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장인 기업을 떠받치고 있는 주인정신이다. 그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책임지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자중자애’와 남도 나처럼 존중하고 사랑하는 ‘인仁 즉 ‘애인(愛人)’을 실천하는 정신으로 경영의 제일가는 덕목이다. 그건 비록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영광스러운 목표로 가며 마땅히 지고 가야 되는 저마다의 십자가인 것이다.
그런 그것을 은전 탐욕 때문에 벗어 팽개치는 것은 우선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고 이웃을 배반하는 것이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로서 책임정신이 죽고 주인의식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 저들이 기업한테 무거운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끌고 가 세우는 곳은 다름 아닌 도산이라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골고타 언덕이거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음침한 부실의 골짜기인 것이다. 무지몽매한 군중이 죄 없는 예수한테 그러했듯이, 저들 때문에 기업이 부실의 십자가를 지고 나서게 되면, 시장의 군중은 침 뱉고 조롱하며 도산이라는 못을 박아 죽이라 소리친다.
그리고 그 군중을 향해, 어찌하여 우리를 버립니까하고 아무리 가슴을 치며 원망하고 호소한들, 저들은 예수가 숨을 거둔 후 옷가지를 나눠가진 로마 병사들처럼 달려들어 기업의 남은 것들을 챙겨가거나 언제 구세주로 따랐던가 싶게 외면하고 돌아선다.
시장이나 시장의 군중인 소비자가 외면한 기업은 이미 죽은 것이다. 기업이 시장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은 그처럼 처참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피땀 흘려 가꿔 세운 기업이 다름 아닌 시장 추종자들한테 조롱당하며 억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다니 그보다 더 참담한 일은 없다. 그 모든 배반이 부른 비극이 단지 돈주머니를 움켜쥐거나 주인정신의 포기와 타락에서 연유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어이없다.
기업한테 그런 배반자들이 언감생심 발붙일 수 없는 도덕이 필요하며, 그런 자들을 가려 배신의 흥정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경영의 지혜가 필요하다. 유다의 배반은 미래의 심판에 맡겨질 일 이기나 하지만, 기업을 배반하는 유다들에 대한 응징은 기업 생존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기업에 숨어 있는 유다들을 가려내 축출해야 되는 매우 심각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