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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세이] 뱁새의 시나브로 새는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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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세이] 뱁새의 시나브로 새는 지갑

박종형 칼럼니스트 기자 johnypark@empas.com 입력 2020/02/06 16:19 수정 2020.02.06 16:33

우리나라에서 갑종근로소득세를 무는 월급쟁이들, 특히 회사원은 갈 데 없는 ‘유리지갑을 차고 사는 만만한 봉’으로 그 지갑에선 이런 저런 명목으로 돈이 줄줄 새 나가고 있다.
하위 봉급생활자인 회사원한테 조세형평성에 대한 소감을 물으면 뭐라 대답할까. 아마도 공평하다는 건 당치않다고 할 것이다. 정권마다 으레 선심 쓰듯 맛보이는 소득분배구조의 합리적인 개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틀림없이 분통이 터져 발길질이라도 하고 싶다고 화를 낼 것이다. 제도 개선이나 정책 입안의 칼자루를 쥔 나리들이 근로자가 부담하는 세금을 줄여 주겠다는 게 아주 보잘 것 없는 액수인데 반해 전문직 고소득자들 지갑 여는 데는 너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낮은 봉급생활자들의 수탈감이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근거 있는 불만이란 게 문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유리지갑을 차고 사는 만만한 봉’ 취급을 당해 오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매년, 갑근세를 올리고, 와장창 까먹은 의료보험기금 충당 하겠다 보험료 부담을 늘려도, 저들은 불만을 속으로 쌓을 뿐 그 어떤 조세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만만한 게다.

어떻든 저들이 매달 또박또박 무는 갑근세는 개인 가계 부담에 있어서나 국가 재정수입에 있어 결코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저들에 대한 복지나 사회보장 혜택은 별로이면서 붙박이 충실한 납세자로 잘도 부린다. 저들이 봉인 것은 납부 금액을 속이거나 납부를 미루거나 거부할 수 없는 독안에 든 쥐 형국이고 세금 거둬들이는데 땅 짚고 헤엄치듯 아무런 힘도 들지 않고 탈도 없는 효자 납세자이기 때문이다. 봉급생활자들이 벌어 기업이 부담하든가 소비자로서 치르는 각종 부담금은 무려 1백여 종류에다 매년 인상해서 저들의 가계에 큰 부담을 안긴다.

말인즉 그런 부담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제공하는 각종 공익서비스의 대가라고 하지만 월급쟁이들로서는 안팎으로 무는 과중한 것이다. 거기에다 경영마인드가 결여된 정부의 열악한 보민정책保民政策 때문에 살인적인 사교육비다 주택비용이다 저들 지갑을 가차 없이 훑어가는 돈 또한 위협적이다.

이쯤에서만 봐도 저 월급쟁이들은 산 채로 살점 떨어져 나가듯이 우두망찰하니 월급을 뜯기고 발리는 것이다.
저들 지갑이 새는 사단은 그런 것들 말고도 많다.
저들 소득수준에 걸맞지 않은 ‘소비문화의 빠른 확산’과 가랑이가 찢어질 ‘생활고급화’와 쉽사리 조절되지 않는 ‘동류 화 바람과 동등화 욕망’이 저들 지갑에 신용불량자 붉은 딱지를 붙이게 만든다.

이를테면, 저들은 자의든 타의든 ‘전시효과 demonstration effect’나 ‘속물효과 snob effect’나 ‘과시소비행태 veblen effect’ 같은 깃발이 휘날리는 밴드왜건에 올라타고 뱁새 처지에 황새 행세를 하느라 그 살점 같은 돈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깃발에 홀린 듯 휘말려 따라가는 건 ‘이카로스의 날개’를 단 비상과 같다.

대체 월급쟁이들을 현혹 시키는 그런 깃발들이란 어떤 바람을 일으키는가.
‘전시효과’란 사회 일반 소비수준의 영향을 받아 개인이 남의 소비행동을 모방하는 소비성향인데, 옆집 똘똘이 네가 최신형 고급 세탁기를 샀다는 사실에 샘이 난 봉순 엄마가 남편을 짓졸라 기어코 같은 세탁기를 사들여 가계에 과분수의 추(錘)를 다는 것이다. 그들을 미혹 시키는 것은 ‘신 모델’이니, ‘고급’이니, ‘슈퍼’니, ‘하이테크’니 하는 미끼다. 우리가 언제부터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다고 ‘승용차는 5년 타면 새 차로 바꿔야 한다.’고 말하길 예사로 하는가, 우린 지금 전시효과 증에 단단히 중독돼 있는 것이다.  

‘속물효과’란 나, 특히 저들의 아내들이 이상한 경쟁심과 샘 때문에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뭔가 다른 물건, 설사 그것이 할부의 족쇄로 발목을 채워 속으로 생가슴을 앓으며 질질 끌려 다닐지언정, 경쟁상대 것보다 더 최신이고 더 호화판이고 더 비싼 명품을 사고 입으며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그 과분수가 중증이다. 이를테면 여자들이 외출할 때만 지니는 평범한 장신구인 핸드백 가격이 저가품서 최고 명품까지 사이에 하늘과 땅 차이 같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은 스너비즘(속물적인 태 부림)을 당의糖衣로 입힌 욕망이 얼마나 천정부지인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오죽하면 나중에 가짜가 들통 나 창피를 당할지언정 ‘짝퉁’으로라도 명품을 들었다 하겠는가.  

‘과시소비행태’란 스노비즘과 사촌 간으로 괜한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배가 아파도 허세를 부리는 소비행태다.
이를테면 두 배의 항공요금을 물더라도 굳이 비즈니스클래스를 타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과시적 행동을 의미한다. 우월감이란 게 특히 여자들한테는 거의 본능적이랄 만큼 턱없이 집착하는 것이어서, 더 아름다워 보이고 더 마님처럼 보일 수만 있다면 비싼 대가를 치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의 밥벌이 남자들 지갑은 늘 고달프다. 골프장에 가면 타고 오는 승용차의 고급 경쟁이나 휘두르는 골프채의 고가 경쟁 등 우월감 경쟁을 벌이는 속물들이 지천이다. 남녀 간에 속물적인 과시나 허세나 체면치례 하느라 낭비를 서슴지 않는 풍조는 지금 일종의 돌림병 같다. 문제는 사는 형편이 좀 유족해졌다고 너도 나도 그런 깃발 따라 밴드왜건을 무작정 올라타고 그런 행태로 살면서 자식들 키울 경우 사회나 기업에 낳게 될 부작용이다.

우린 소득 수준에 걸맞지 않게 삶의 질을 높여 놓았다. 웬만한 중산층 봉급생활자는 자가용을 굴린다.  주말엔 레저 여행을 다니고 휴가 때는 해외여행을 간다.  먹고 마시는 빈도가 늘었으며 그 수준이 상당히 고급화되었다.
그런데 봉급소득이란 그런 식으로 씀씀이가 증가하는 속도를 내지 못한다.

실질소득의 증가는 원천적으로는 생산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시장경쟁력과 경영효율 같은 수익성 인자들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므로 엿장수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실질소득과 지출과의 괴리가 생긴다. 그리고 실질소득의 증가를 앞지르는 과소비는 그 적자를 틀어막기 위해 신용카드를 끌어들여 임시방편으로 긁어대고 할부의 곡예를 일삼게 만든다. 그런 수순으로 괴리가 진행되면 회사원은 종국에 가서 기업에 ‘과도한 요구’를 하게 되며, 그런 요구를 정당화하기 위해 ‘분배 우선’ 논리로 무장하고 관철을 위해 생산성 향상이 아닌 임금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뿐만이 아닌 심각한 부작용은, 지갑이 비면 월급쟁이가 부정한 돈을 챙기려는 유혹을 외면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데 있다. 지금 미국 같은 기업천국에선 직장 절도로 인한 연간 손실 금액이 천문학적인 규모에 달해 경제적으로는 물론 도덕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기업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과분수로 잘못 질주하게 되면, 기업이 편할 날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사리분별 없이 거기 올라탄 개인이나 가계 또한 병들고 망가지게 된다.

요즈음, 뱁새 회사원들이 가계를 운영하는 솜씨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 씀씀이가 너무나 충동적이고 헤픈 것이다. 겁도 없이 그 ‘욕망의 전차’를 타기 때문이다. ‘나는 융단’ 같은 신용카드를 무분별하게 올라탔다가 여기저기서 적자가계라는 늪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신용의 보증기능을 상실한 채 유리지갑을 차고 사는 수많은 월급쟁이 발목에 빚의 족쇄를 채우고 이마에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들은 전도가 양양한 회사원이 아니라 할부 인생에 신용카드의 신종 노예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 모든 게 뱁새의 짧은 날개로 황새의 멋있는 비상을 턱없이 동경한 탓일 것이다. 그 동경의 미약은 아마도 닮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욕망으로 선망의 대상을 흉내 내느라 빚어졌을 것이며, 혼자서가 아니라 친구 따라 강남 가고 아내가 짓졸라 그래 까짓 것 기분이다 하고 마셨을 것이다. 비싼 양담배를 피우고 양주를 마시는 것은 무심한 타성적 모방이고, 결혼식 전에 월급에 몇 배나 드는 기념사진을 찍고 수십 배의 비용을 들여 호화판 결혼식을 치르는 게 당연한 것은 허무한 자존심 때문이거나, 아니면 스스로 땀 흘려 번 돈이 아니라 부모의 부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일 게다. 월급쟁이 가계에서 외식비 지출이 급증하면서 경제 교과서에 ‘소득이 늘어나면 엥겔계수는 낮아진다.’고 쓰인 원리가 무너졌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경제학자의 미래 예측에 허점이 있었던 탓인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선남선녀 연인들의 멋진 식당에서의 로맨틱한 데이트 장면을 선망해선가, 아니면 토끼 같은 귀여운 아이들 손잡고 여우같은 아내를 동반해 외식 나들이를 함으로써 동류의식이라는 사회적 욕구가 충족되어 선가, 부자들처럼 팔뚝만한 바다가재도 먹어봐야겠고, 이름조차 고급스런 티본스테이크를 난들 못 먹을 것이며, 문자 그대로 산해진미가 상다리가 휘어져라 차려진 뷔페를 배터지게 먹어보자는 탐식 욕 때문인가.

우리네 도시근로자 가계의 소비행태는 가히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느라 가랑이가 찢어지는 형국이다. 실질소득에 있어 일본보다 훨씬 떨어지면서도 자기 집 소유에 있어서는 배나 되는가 하면, 소득증가율에 비해 자가용 구입과 유지비의 증가율이 무려 다섯 배 가까이 더 높아 가계 적자의 주범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천사는 ‘소비의 미덕’이라는 날개를 달고 있는데 기실 그것은 ‘이카로스의 재앙의 날개’이기도 하다. 병아리 월급쟁이가 밀랍으로 빚은 욕망의 날개를 함부로 달고 ‘소비의 즐거움이라는 태양’을 향해 기분 나는 대로 비상했다가는 적자가계라는 불행한 추락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고대 희랍이나 로마에서 일대에 명성을 날렸던 영웅들이 상상하기조차 벅찬 명예를 탐하면서도 사생활에 있어서는 하나 같이 젊어서부터 믿기 어려울 정도로 소식素食을 하고 고통스러운 근검을 실천한 것은 진정 아름답고 가치 있는 절제의 미덕이었다.

기업의 봉급생활자들이 근검의 미덕을 소중히 여기고 애써 실천하며 살지 않으면 재앙은 개인의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시작되어 기업을 병들게 만든다.  근검절약하는 정신이나 절제력은 월급봉투를 받아들 때의 가슴 뿌듯한 희열에서 나오므로 외상값이 빠져나간 헐렁한 월급봉투는 그 어느 것보다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든다. 지갑이 늘 가벼우면 어깨가 쳐지고 자존심이 구겨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낭비는 생각지 않고 그놈의 돈 원수를 언제 갚을거나 앙앙불락 하다가 슬그머니 공돈 생각이 들면서 ‘돈벼락’을 맞을 궁리까지 하게 된다. 이쯤이면 바보게임에 기적을 걸게 되고 검은 돈에 유혹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젊은 회사원 고유의 순수한 열정과 가치 있는 재능과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시간 같은 보석들이 술과 담배 연기와 자학과 화투장과 허세와 거짓말에 시나브로 짓밟히고 부서지며 사라지기 예사다.

적자가계로 인한 도미노 현상은 기업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해마다 급여를 인상하라는 요구 하며, 기업이 적자를 냈어도 상여금은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는 불합리한 의식이 다 그 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근로의욕이 떨어지고 인간관계가 타산적으로 변질되며, 신의 대신에 기교가 판을 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이 횡행하게 되는 것 또한 그러하다.

무서운 것은 개인적 타락이 그대로 가계를 망가뜨려 가정의 안정과 평화를 깨고 기업의 윤리기반을 흔들며 사회불안으로 번진다는 사실이다.
기업 밖에서 그 누구보다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가계를 책임지고 있는 주부다. 주부의 허영심은 남편을 부패시키기 마련이며,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지 못할 경우 가뜩이나 고달픈 그들은 더욱 허덕이게 되고, 희망을 잃게 된다.

문제인 것은 가사노동이 어쩌고 쥐꼬리만 한 월급이 어떻다느니 푸념하며 무시로 찬물을 끼얹고 쪽박을 깨고 있는 아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남편이 조퇴를 하고 돌아와 부엌일을 거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부정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박봉을 불릴 수 있는 묘책이 있을 수 없는데 말이다.

모름지기 월급쟁이 아내들은 월급쟁이 아내답게 월급쟁이다운 살림살이를 꾸려갈 각오와 노력으로 살아가야할 뿐 달리 묘수가 없다. 남편은 아내가 할 나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월급쟁이 지갑은 시나브로 새는 가볍고 투명한 지갑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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