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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는 ‘하느님의 심판’일까? 2..
기획

페스트는 ‘하느님의 심판’일까? 2

김종익 기자 onlinenews@nate.com 입력 2020/02/27 16:23 수정 2020.02.27 16:29
- 지금, 까뮈 『페스트』를 읽다 -
이 글을 ‘코로나19’퇴치를 위해 헌신하시는 모든 분들께 드립니다. -역자 주
미야타 미쓰오 宮田光雄1928년 태어나다. 도호쿠대학 명예 교수. 유럽 사상사 전공. 저서로는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아가다』 『국가와 종교』 『나치 독일과 언어』 등이 있다.
미야타 미쓰오 宮田光雄1928년 태어나다. 도호쿠대학 명예 교수. 유럽 사상사 전공. 저서로는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아가다』 『국가와 종교』 『나치 독일과 언어』 등이 있다.

 

페스트가 발병한 첫 번째 달 끝 무렵, 오랑의 상황은, 전염병이 악화된 것 외에도, 파늘루 신부의 “열렬한 설교”로, 한층 암담해졌다.

파늘루의 이름은, 이미 소설 첫 부분에서 소개되었다. 그는 “박학하고 동시에 전투적인 예수회 신부”이며, 오랑시에서는 종교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파늘루의 신학적 입장은, 물론 근대적 개인주의의 ‘방종’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전 세기의 ‘몽매주의’(Ultramontanism, 교황지상주의)와도 마찬가지로 거리가 먼 “원하는 것이 많은”,― 바로 이상이 높은, 자신에 찬― “기독교의 열렬한 수호자”였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이런 시기에 그는 청중을 향해 무참한 진실을 가차 없이 말했다. 그것을 통해 그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시 당국자는, 페스트와 싸우는 독자적 방법으로 집단 기도 주간을 가질 계획을 세웠다. 이 “공적 신앙심 표시”로, 마지막 날에는 페스트 수호성인 로크의 가호를 기원하는 장엄 미사를 올리게 되어 있었다. 그때 설교자로 지명된 사람이 파늘루 신부였다. “천성적으로 혈기 왕성한, 쉽게 흥분하는 성격인” 그는, 맡겨진 사명을 결연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이 기도 주간에는 일반 시민이 많이 참가했다. 그것은 시와 항구가 폐쇄되어 예년처럼 해수욕을 즐길 수 없었던 것도 틀림없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또 시민들의 “아주 특수한 정신 상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덮친 놀라운 사건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면서, 페스트로 뭔가가 변한 것을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겁은 났지만, 절망은 하지 않았다. …요컨대, 그들은 기다리며 바라고 있었다.”

■ 파늘루의 첫 번째 설교

설교 당일에는 꽤 많은 군중이 참석해 배석 신부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성당의 앞뜰과 계단까지 넘쳐날 정도였다.

그러나 “전날 밤부터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해 억수같이 비를 퍼붓고 있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산을 펼쳐 들고 있었다.” 작가 카뮈는 파늘루의 격정적인 설교가 궂은 날씨 속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신부의 위압적인 외모가 풍기는 인상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키는 중키 정도였지만 몸집은 딱 바라졌다. 그가 두툼한 두 손으로 단을 꽉 잡고 설교단의 가장자리에 몸을 올려놓았을 때, 사람들의 눈에는 뭔가 두툼한 검은 형체 위에 강철 테 안경 아래 붉은 빛을 띤 볼이 두 개의 반점처럼 얹혀 있는 모습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파늘루의 설교는, 결코 어지러운 구조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설교의 주제는, 오랑 주민의 죄와 벌에 관한 것이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재앙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당연한 응보입니다.”

그가 “힘차고 정열적인,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한 마디 한 마디가 딱딱 부러지는 듯한 어조로, 최초의 통렬한 한 마디를 청중에게 퍼부었을 때, 커다란 술렁임이 앞뜰 쪽까지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먼저 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인용하고, 그것을 이집트 백성을 덮친 페스트와 관련시켜 풀어 간다. 이어서 중세의 『황금 전설』과 아비시니아의 기독교도 이야기 등, 전설과 역사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오랑을 덮친 페스트는 지금까지 이 도시의 사람들이 쌓아 온 죄책에서 기인하며, 게다가 그 죄책을 회개하지 않고 지낸 것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악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하느님의 자비 위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단 회개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 (그러나) 참으로 오랫동안 이 도시 사람들 위로 그 연민의 존안을 드러내 주시고 계셨던 하느님도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의 기대는 배반당하고, 지금은 그 눈을 돌리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후광을 잃어버리고, 우리는 앞으로 오랫동안 페스트의 암흑 속에 빠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신부는 한층 “풍부한 윤색으로” 재앙과 환란의 비참함을 잇달아 이야기한다. ― “마치 마왕처럼 당당하게”, 손에 “붉은 산돼지 사냥 창”을 치켜들고 지붕 위에 서 있는 “페스트의 천사”까지 등장한다. “페스트는 거기에 있습니다 ― 참을성 있게, 주의 깊게, 신중하게, 이 세상의 질서 그 자체처럼 태연자약하게.” “세계라는 어마어마한 곡창 속에서, 가차 없는 재앙의 도리깨는 인류라는 보리를 타작하고, 마침내 짚에서 보리알이 떨어질 때까지 타작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페스트가 “하느님이 보낸 것”이며, 이 재앙이 가진 “징벌적 성격”을 명확하게 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현실 세계의 행복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일에서 몸을 돌릴 것, 하느님에게 마음을 돌리는 전면적 ‘회심’[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신앙에 눈을 뜸]을 호소했다.

“그렇습니다. 반성할 때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요일에 하느님이 계시는 곳을 찾아오기만 하면 나머지 날은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유부단한 분이 아닙니다. 그런 매우 소원한 관계로는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에 보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이야말로, 그리고 마침내,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에 와서 진리는 이미 명령입니다. 그리고 구제로 가는 길은, 바로 붉은 산돼지 사냥 창이 여러분에게 그것을 가리키고, 또 그곳으로 밀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만물 가운데 선과 악을 배치하고, 분노와 연민, 페스트와 구제를 배치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마침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이 재앙 바로 그것이, 여러분을 고양시키고,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마치 자신이 ‘하느님의 병사’가 되어 싸우는 듯한 예수회 신부의 모습을 어렴풋이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이렇게 하여 파늘루는, 청중에게 자신이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단순히 징벌의 말만이 아니라, 또 마음을 달래고, 활기도 가지고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고뇌의 밑바탕에 깃들어 있는, 저 영세무궁의 광채”가 강조되고, 현실 세계의 고난을 보상받기 위한 천국의 희망을 호소하고 있다.

파늘루의 설교는, 설교자 자신이 준 인상이나 청중의 반응에 대해 이따금씩 삽입된 기록자 리외의 짧은 논평으로 중단되지만 ― 그 대부분은 직설적인 어투로 소개되고 있다. 설교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리외 자신은 그 어떤 개인적인 감동도 느끼지 않고,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설교의 마지막은, 사도 바울의 유명한 로마서 4장 18절의 말(“희망을 가질 수 없을 때, 더욱더 희망을 품는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그것은 파늘루 자신의 직설적인 말이 아니라, 리외가 요약하는 간접 형태로 기록된다.

“일찍이 오늘만큼, 파늘루 신부는, 만인에게 제시된 하느님의 구원과 기독교도의 희망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그는 모든 희망을 넘어서, 우리 시민이 이 나날의 참상과 거의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도의 유일한 말인, 바로 사랑의 말을 하늘에 바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 나머지 일은 하느님이 하실 것이다.”

이 설교가 오랑 시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확정하는 것은 어렵다. 리외에게는 물론, 일의적一義的으로 부정적인 것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파늘루의 설교는, 페스트의 원인 규명을 위해서도 또 재앙과 싸우는 실천적 활동을 위해서도 공헌한 것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중 가운데에는, 판사 오통이 리외에게 분명하게 말했듯이, 파늘루 신부의 논지에 “전혀 반박의 여지가 없다”고 느낀 사람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그때까지는 “막연하게 여기고 있던 관념”, 즉 “자신들은 뭔가 알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벌로, 상상을 초월한 감금 상태에 놓였다는 것이다”라는 관념을, 한층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 어떤 사람들은 변함없는 생활 속에서 ‘유폐 상태’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단 한 가지 생각에 더욱 매달렸다.

이 일요일을 경계로 하여, 오랑시에는 “상당히 일반적이고 또한 심각한 일종의 공포”가 생겨났고, 시민들은 자신들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 오통 소년의 죽음

설교가 끝나자마자, 더위가 시작되었다. 여름의 무더위가 거침없이 허공과 시가지 구석구석에 스며드는, 페스트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때를 맞이했다. 전염병의 확대에 맞서서, 여러 가지 형태로 자발적 보건대保健隊를 조직하는 일이 계획된다. 리외는 타루로부터 파늘루 신부가 거기에 참가 신청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대답한다. “그가 자신이 한 설교보다는 나은 인간이라고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네요.” 파늘루 신부는, 이제야 비로소 구체적으로 페스트 환자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죽어가는 병상에서 그것을 체험한 것은, 신부에게 적어도 자신이 행한 페스트의 신학적 해석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늙은 의사 카스텔이 개발한 새로운 혈청은, 이 소년이 겪는 죽음의 고통을 조금 더 연장해 고문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았다.

이 사건이 가진 중요한 상징적 의의를 새겨두기 위해, 작가 카뮈는 이 소설의 중요한 등장인물 전원을, 이 죽음의 장면에 입회시킨다. 그들은 모두 소년의 죽음에 내면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으며, 마음이 흔들리는 체험을 맛본다. 어떤 의미에서 소년의 죽음은 이 작품의 주제를 해석하는 ‘열쇠’도 되는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소년의 죽음을 매우 상세하게 또 생생하게 묘사한다.

“몇 달 전부터, 병마의 사나운 기세는 이미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벌써 어린아이들이 죽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부터 내내 지켜 본 것처럼, 어린아이의 고통을 시시각각 계속 지켜 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물론, 이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고통은, 그들의 눈에 일찍이 한 번쯤은 그 실체 그대로의 것, 바로 공분할 만한 사실로 비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추상적으로 공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이 지금까지, 죄 없는 사람의 임종의 고통을 이렇게 오래, 정면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인용 가운데, 작가가 “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파늘루 신부의 도덕적ㆍ종교적 해석을 전제로, 리외를 파늘루와 결코 동일시할 수 없다는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파늘루가 첫 번째 설교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느님이 죄를 짓지 않은 사람과 죄를 지은 사람을 구별한다면, 이 소년은 ― 그 짧은 생애에서 저지른 죄가 작은 것 때문에도 ― 긴 고통은 용서되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침내 발작이 끝났을 때, 완전히 탈진해 48시간 사이에 살이 쏙 빠져 버린 두 팔과 뼈만 앙상한 두 다리를 떨면서, 소년은 뒤죽박죽이 된 침대 속에서, 죽음의 십자가에 묶인 사람처럼 기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파늘루는, 꽤 지친 듯이 몸을 벽에 기대고 있었는데,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죽는다면, 남보다 고통만 더 겪고 마는 것이지”라고. 이 말에 대한 리외의 반응 ---- “갑자기 신부 쪽으로 돌아보며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대로 입을 다물고, 애써 간신히 자제한 다음, 다시 소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룻밤이 지나고 유리창 너머로 무더운 아침 햇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소년은 다리를 구부리고, 양 넓적다리를 배 부근까지 끌어당겼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회색의 찰흙이 굳어져 버린 것 같은 그 얼굴 우묵한 곳에서, 입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계속되는 외마디 비명 ― 호흡에 따른 억양마저 거의 없는, 별안간 단조롭고 고르지 않은 항의로 실내를 가득 채우고, 그리고 마치 모든 인간이 동시에 내지른다고 생각할 만큼 비인간적인 비명 ― 이, 소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소년이 죽어가는 이른 아침의 분위기를, 작가 카뮈는 마치 성금요일(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일을 기념하는 날. 성주간의 금요일로 부활절의 이틀 전날이다.)에 죽은 예수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듯한 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십자가의 모습, 절규, “모든 것은 끝났다!”).

“리외는 이를 악물었고, 타루는 외면했다. 랑베르는 카스텔 곁의 침대로 다가갔다. 카스텔은 무릎에 펴놓았던 책을 덮었다. 파늘루는 병에 전염되어 비명으로 가득 차 버린 귀여운 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풀썩 무릎을 꿇었다 싶더니, 거의 ‘숨죽인 듯한 목소리’로, 그러나 끊이지 않는 비명의 뒤에서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느님이시여, 이 아이를 구해 주소서.’ 밀물 같은 흐느낌이 실내로 밀어닥쳐 파늘루의 기도 소리를 덮어 버렸다.”

소년은 흐트러진 이불의 우묵한 곳에서 갑자기 작아져서,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얼굴로 누워 있었다. 파늘루 신부는 침대로 다가가, 축성의 행위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밖으로 나온 리외는,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몹시 성이 나 있었기 때문에, 신부를 앞질러 가려고 했다. 그때 신부가 그를 붙잡으려고 말을 걸었다. 격렬한 몸짓으로 돌아선 리외는, 세차게 팽개치는 치는 듯한 어조로 신부에게 말했다. “아, 이 아이만은 적어도 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도 그것은 알고 계실 테지요!”

■ 파늘루의 두 번째 설교

오통 소년이 죽은 날 이후, 파늘루 신부는 “변한 것처럼 보였다.” 보건대에 가담하고 나서 그는, 병원과 페스트가 나타난 장소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구호자들 속에서 “가장 앞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파늘루의 두 번째 설교가 행해진 것은, “바람이 심하게 부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교회에 참석한 사람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미사에 나가기보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같은 “불합리한 미신”으로 대체되어, 기꺼이 액막이 메달이나 성로크[로크(1295~1327년)는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페스트에 대한 수호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옛날부터 유럽에서 숭상의 대상이 되어 왔다]의 부적을 몸에 지니는 일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첫 번째 설교 때보다도 “한층 온화하고 사려 깊은 어조”로, “어떤 종류의 망설임” 속에 이야기했다. 첫 번째 설교에서 눈에 띄었던 성급한 단정이나 무리한 설득의 어조가 사라졌다. 더욱 흥미 깊었던 것은, 그가 이제 “여러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는 청중에 대한 감정 이입이 있고, 그들로부터 자신을 격리하지 않는 일체감이 있었다.

두 번째 설교에서는, 그 내용을 파늘루의 직접 화법이 아니라, 작가 카뮈에 의해 기록자 뢰외의 보고와 거의 구별할 수 없는 형태로 전달되고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화법보다도 이번의 설교에서 이야기된 내용 그 자체일 것이다.

이상하게 파늘루는 지난번 설교에서 말했던 것들이 내용적으로는 진실이라는 확신을 여전히 바꾸지 않았다. 지난번은 그 일을 “자비심 없이 생각하고 또한 말했다.” 그러나 “가장 잔혹한 시련도, 기독교인에게는 그래도 역시 이익이다”라는 점은, 여전히 진실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리외가 상당한 흥미를 가졌던 것은, 파늘루가 지난번의 견해와는 다르게 말한 다음의 단 하나였다. 바로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페스트를 오로지 하느님의 심판으로 보는 지난번 견해를 포기했던 부분이다.

파늘루는 “세상에는 하느님을 따라 해석할 수 있는 것과 해석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강조해서 말했던 것이다. 그는 “언뜻 보기에 필요한 악과 언뜻 보기에 쓸데없는 악이 있다”고 하며, 지옥에 떨어진 방탕아 돈 후안과 죄 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에 관해 언급했다. “사실은 이 지상에서 그 어떤 존재도, 어린아이의 고통과 이 고통에 얽힌 비참함, 또 이것에서 찾아내야 할 이유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죄 없는 어린아이의 언뜻 보기에 불필요한 고난이라는 사실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결국 이런 상태에서 페스트로 둘러싸인 장벽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벽이 드리운 죽음의 그늘 바로 그 속에서, 우리의 보람을 찾아내야만 한다”라고.

그러나 이 고난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 부여에 대해, 파늘루 신부는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유를 묻는 것을 단념하는 것이다. 기록자 리외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그로서는 그 어린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하고 무궁한 환희가 그 고통을 보상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쉬웠겠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도대체 영원의 환희가, 한 순간의 인간의 고통을 보상할 수 있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온몸으로 영혼으로 고통을 맛보셨던 주님을 섬기는, 기독교도라는 것을 단정하며 말할 수 없으리라. 아니, 신부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채, 십자가로 상징되는 저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충실하게 몸으로 체득하고, 어린아이의 고통을 정면에서 마주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는 신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해야만 했다고 판단한다.

“여러분, 그 때가 왔습니다. 모든 것을 믿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부정할 것인가 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도대체 누가 감히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믿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부인할 것인가. 이 과격한 양자택일은, 이 불가지론자 그러니까 사물의 본질이나 궁극적 실재의 참모습은 사람의 경험으로는 결코 인식할 수 없다고 믿는 리외에게도 “거의 이단”처럼 보였다. 그러나 숨도 돌리지 않고, 신부는 이어서 계속 말한다.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평상시의 종교”와 같을 수는 없다. 즉 이 “‘전부’인가 ‘전무’인가의 주의를 굳게 지킨다”라는 “가장 위대한 변함없는 지조”를 실천해야만 할 정도로 페스트라는 격렬한 불행 속으로 기독교도를 팽개친 것에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서 요구되고 있는 “전적인 수용이라는 덕”은, “평범한 체념”도 “곤란한 자기 비하”도 아니다. 그것은 “굴종”이지만, “스스로 동의하는 굴종”이다. 확실히 “어린아이의 고통”은, 정신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야말로” ― 그렇게 말하고 파늘루는 자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말하기 쉬운 것이 아니라고 청중에게 단언한다 ―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라고.

파늘루는 이때 청중 사이에서 일어난 술렁거리는 분위기를 알아채고, “청중을 대신하여” 마치 자문자답하듯이 강조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즉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그는 페스트를 단지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운명론”에는 반대했다. 이것에 대해 “능동적이라는 형용사를 곁들인” 운명론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했다. 역사상의 실례를 인용해 내놓고, 그것을 설명한다. 마르세유의 대대적인 페스트를 기록한 사람의 말을 믿는다면, 메르시파 수도원의 수도사 81명 가운데, 네 사람만이 이 열병 뒤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네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은 도망가고 말았다.

“이것을 읽을 때, 파늘루 신부의 모든 생각은 홀로 남아 있었던 수도사 ― 일흔일곱 구의 사체를 보고 있을 뿐 아니라, 또 특히 동료 세 사람의 사례가 있는 데도 홀로 남아 있었던 그 수도사 ― 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신부는 설교단의 가장자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이렇게 소리쳤다. ‘여러분, 우리는 남아 있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기록한 리외는 그 설교가 의미하는 것을 아래와 같이 요약하고 있다.

“어둠 속이더라도 무턱대고 앞으로 나가야만 하고, 그리고 선을 행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밖의 문제는 지금까지 했던 대로의 태도를 견지해야만 한다. 또 스스로 깨달아 모든 것을 어린아이의 죽음조차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개인의 힘에 의지하려는 짓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파늘루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불행과 맞서 싸우라고 하는 의사 리외의 평소 실천을 지지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고난과 악이라는 세상의 부조리에 직면해 도출해 낸 현실적ㆍ구체적인 결론일 것이다.

물론 파늘루 같은 신앙자에게는, 이 싸움은 필연적으로 ― 불가지론자 리외에게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 다른 문제와 마지막까지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파늘루는, 두 번째 설교 마지막에 하느님의 사랑,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성서학적인 주제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페스트는 ‘우리’ ― 바로 여기서는 기독교도 ― 에 대해 “하느님을 미워하든가 아니면 사랑하든가”라는 양자택일을 들이대기 때문이다. 이 경우 “누가 하느님을 미워하는 일을 감히 선택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여 파늘루에게는, 이 세상에는 인간의 불신앙과 증오를 야기하는 다양한 유혹이 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무지와 이해 불능인 것과의 긴장이 계속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에 대한 고뇌로 가득 찬 물음과 ‘어려운 사랑’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두 번째 설교 마지막에, 기록자 리외가 직접 화법 형식으로 문자 그대로 재현한 파늘루의 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어려운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아의 전면적인 포기와 우리 자신의 멸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만이 어린아이의 고통과 죽음을 지워 없앨 수 있으며, 이 사랑만이 아무튼 그것을 필요한 것 ―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만 그것을 소망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 ―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바라는 어려운 교훈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눈에는 잔인하게 보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결정적인 신앙이며, 거기에 우리는 다가가야 합니다.”

파늘루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두려워해야 할 원형”이며, 이 “가장 높은 곳”에서는 “모든 것이 융합되고, 모든 것이 동등해지며, 겉으로는 정의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에서 진리가 분출하는” 것을 소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희망을 궁극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은, ‘수직적 = 종말론적인 희망’(슈렛테) 이외에는 없는 것이 아닐까?

리외의 기록은, 파늘루의 두 번째 설교에 대한 반향의 일단도 짧게 언급하고 있다. 그는 마침 교회당에서 나온 어떤 연로한 사제와 젊은 부제副祭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연로한 사제는 파늘루의 웅변에 경의를 표하기는 했지만, 그 사고의 “대담함”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 설교에는 “마음 든든함보다도 오히려 불안”이 나타나고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것에 반해 평소 신부네 집을 드나든 적도 있는 젊은 부제 쪽은, 파늘루가 현재 이 설교보다도 “한층 대담한 논문”을 집필하고 있는 데, 어쩌면 교회 당국이 출판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 내용은 “사제가 의사에게 진료를 요청하면, 거기에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파늘루 개인에 관해서는, 두 번째 설교 후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도 언급해야만 한다. 전염병이 만연해 시내는 어디랄 것도 없이 이사를 하고 있었다. 파늘루도 지금까지 예수회에서 배당한 거처를 비우고, 교회의 열성 신도인 노부인 집의 임시 거처로 옮겨야만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갑자기 피로한 나머지 호흡 곤란에 빠져 병상에 드러누웠다. 그는 그 논문의 주제대로 의사의 왕진을 거부하며, 노부인에게 전화를 받고 급히 달려온 의사 리외의 구조는 이미 때를 놓쳐 소용없게 되었다. 파늘루는 이송된 격리 병원에서도, 자신에게 취해지는 모든 조치에 아무런 반응도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방 침대 머리맡에서 있던 십자가상만은 꼭 움켜쥐고 손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침대에서 상체를 내밀고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눈에서는 어떤 표정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파늘루의 죽음은, 마치 그의 죽음을 예정한 하느님의 구제 계획을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구제는 신체의 건강보다도 더욱 가치 높은 것이라는 점을, 그 양심에 확신하고 있는 사람으로 죽은 것처럼 보였다. 이미 파늘루의 두 번째 설교에 관해 의사 리외의 친구 타루가 한 논평은, 파늘루의 신앙에 기반을 둔 겸허한 죽음의 수용을 정확하게 알아맞혔다.

“죄 없는 사람이 눈이 멀게 되면, 기독교도는 신앙을 잃거나, 그렇지 않으면 눈이 멀게 되는 일을 받아들이거나 해야 한다. 파늘루는 신앙은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끝까지 갈 작정인 것이다.”

의사 리외에게는 파늘루의 사인이 페스트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마지막까지 불확실했던 것 같다. 진료 기록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병명 미상”

그러나 이 말은, 병의 사인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더욱 상징적인 많은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것은, 파늘루의 신학적 확신에 대한 의사 리외의 의문 같은 반응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파늘루의 신의론神義論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진리의 깊은 뜻을 “숨겨진 신비로서의 하느님의 지혜”(고린도전서 2장 7절)와 같이 근거를 부여하려고 하는 모든 신학적 시도와 마찬가지로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튼 “전투적인 예수회 신부” 파늘루는, 그 깊은 뜻의 인식을 단념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완전한 고독 속에, 신앙을 위한 싸움에 목숨을 바친 순교자로 죽은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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