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전 한나라당 의원은 '백범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백범정신과 철저히 배치되는 독재권력 이승만·박정희를 신봉하는 미래통합당에서 공천관리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형오 전 의원이 최소한의 역사 인식을 가졌다면 '백범기념사업협회' 회장의 직함을 가지고 일제 36년간 민족을 배반한 친일부역자들을 중용한 이승만과 박정희를 신봉하는 미통당에서 공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들린다.
대한민국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은 헌법전문에 명시된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이승만을 '국부'나 '건국의 아버지'로 떠받들며 당사에 사진까지 걸어두고 기리면서 김구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한다.
김구와 이승만은 절대로 같은 범주의 인물이 아니다. 살아온 길과 결이 다르다. 백범 암살의 배후에는 이승만도 거론된다. 그래서 김 위원장이 미통당에서 정 활약하고 싶다면 백범기념사업회장 직함은 내려놓는 게 이치에 맞는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전력을 보더라도 그렇다. 그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4선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박근혜 정부 새누리당 상임고문을 맡을 정도로 친일 역사관을 가진 정당에서만 경력을 쌓아 태생적으로 뿌리가 다르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2015년 7월부터 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백범기념사업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검은 뿔테의 백범이 환하게 웃는 모습과 '삼천만 동포의 가슴에서 칠천만 겨레의 큰 스승'이라는 문구가 먼저 눈에 띈다. 그리고 '백범일지에 나타난 '지고지순한 애국심'과 백범의 연설문 '나의 소원'에서 '완전 독립' 사상을 엿보게 된다.
김구는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15년형의 언도를 받을 무렵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야밤에도 몇 차례 죽었다 깨어나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 철장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쓰러져 육신이 아파서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다음과 같이 반성했다.
"세 놈이 나를 들어다가 유치장에 눕혔을 때는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신문실(訊問室)에 끌려간 것은 전날 해가 진 후였다. 처음에 신문(訊問)을 시작한 놈이 불을 밝히며 밤을 새운 것과 그놈들이 온 힘을 다해 자기 일에 충성하던 것을 생각하니 자괴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 성심껏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저 왜구들처럼 밤새워 일한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 고통스런 와중에도, 혹시 내게 망국노(亡國奴)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백범일지' 중에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번 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나의 소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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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미통당 대표가 지난 1월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자유한국당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임명된 김형오 전 의장과 회동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일제강점기에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항일 독립운동으로 해방 후에는 남북을 넘나들며 동포 간의 화합과 남북이 하나된 통일 대한민국을 호소하던 김구는 71년 전 이승만과 대립하면서 친일 반민족세력의 결탁에 의해 암살되었다.
김구는 1896년 3월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 '스치다 조스케'를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간주하고 타살한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탈옥한 후 반세기 이상 독립운동을 하며 사선을 넘나들었다.
이승만이 반 쪼가리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만 눈에 불을 켤 때 민족 독립운동의 거목은 해방 후에도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민족통합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다 유명을 달리했다.
‘백범정신’의 생명은 ‘섬김’이다. 그의 호인 '백범'은 미천한 백성을 상징한다. 예전에는 소를 잡는 사람을 ‘백정(白丁)’이라고 해 가장 천대받았다. 사회적 약자인 '백정'의 백(白)과 평범한 농부, 어부들을 통칭한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백범이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려 했는지 호에서 알 수 있듯이 범부들의 섬김에 초점을 맞추고 한평생 헌신적이고 고달픈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지난 2015년 6.25 한국전쟁 65주년을 하루 앞둔 6월 24일 이승만이 당시 일본에 망명정부를 요청했다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보도가 나왔다.
이날 KBS는 '6.25당시 이승만이 일본에 망명을 요청했었다'는 정보를 입수해 방송했다. 방송 내용은 이승만 정부가 전쟁 발발 이틀 만에 미군정을 통해 일본 정부에 '6만 명 망명 의사'를 타진했고 일본은 5만 명으로 '한국인 피난 캠프'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의 비밀문서다.
'비상조치계획서'라는 이 보고서는 일본어와 영어로 쓰여 일본 정부와 미군정에 각각 보내졌다.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이 없어 '설'로만 떠돌던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문서에는 야마구치현 등 4개 지역에 20개의 피난 캠프를 만들고 임시 막사 1곳에 200명씩 모두 250개 막사에 5만 명을 수용하겠다는 계획으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망명을 타진했던 사항들이 기재됐다.
국가와 국민을 수호해야 할 최고 통치자가 전쟁이 나자마자 일본으로 도망가 망명정부를 세울 궁리만 했다는 황당한 행각을 보면서 임진왜란 발발 당시 굶주린 백성은 팽개치고 명나라로 도망갈 궁리만 했던 조선조 선조가 떠오른다. 또 처음에 일본에 데리고 가겠다는 6만 명은 무엇에 기준을 둔 것인지 궁금하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건국에 전혀 공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람에 대한 평가는 마지막이 중요하다. 독재자로서 그의 이력을 따져보면 초대 대통령일 뿐 국부나 건국의 아버지는 과분하다. 전쟁 전에는 친일파 등용 및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고 김구 암살로 친일 청산이 아닌 독립운동 애국자를 핍박했다.
70년 전 한국전쟁 중에는 자신이 도망간 수도 서울을 사수한다며 거짓 방송을 일삼고 한강철교를 폭파하여 수많은 시민을 죽게 한 것도 부족해서 반성은커녕 무고한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3.15 부정선거와 장기 독재의 결말로 하와이에서 죽은 허울 좋은 초대 대통령일 뿐이다.
특히 6.25 직후 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에게 '곧 북한군을 격퇴할 테니 피난 가지 말고 안심하라"고 거짓 홍보하면서 정부 고위층들은 먼저 도망갔다. 새파랗게 어린 학생들에게는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하면서 서둘러 자신만 기울어져 가는 배를 탈출한 세월호 선장과 판박이다. 오리발을 내밀고 있지만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는 '하늘의 그물'에서 박근혜와 황교안도 피해갈 수는 없다.
이승만이 일제 36년간 민족을 배반한 친일부역자들을 처단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기반을 수립한 후 단임으로 물러나는 모범이라도 보였으면 어쩌면 '건국의 아버지'로 역사에 기록되는 영광을 안을 수도 있었다.
권력욕과 아첨에 눈이 멀어 국가보다는 자신의 영달과 안위만 챙기다 보니 전쟁이라는 국가 비상사태에서도 앞서 도망가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 국가와 국민에 대한 애국, 애민 정신이 있었다면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 6.25 발발한 지 이틀 만에 우리 민족을 36년간 핍박한 일본에 망명정부를 세우겠다는 참으로 해괴망측한 구상을 했을 것이다.
당시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의 부인 즉 이승만의 며느리는 KBS의 해당 보도를 완강히 부인하면서 KBS를 '종북빨갱이 소굴'이라고 비난했다. 어쩌면 지금이나 그때나 이들은 급하면 종북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거는 한결같다. 2015년 KBS는 정부 어용 방송으로 불릴 때라 아이러니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듯, 3번의 장기집권을 하고도 노욕을 부리다가 국민에게 거부당하고 쫓겨난 정치가였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이것 또한 최순실의 야욕에 꼭두각시 노릇 하다가 국민에 탄핵당한 박근혜와 판박이다.
왜적에게 유린당하는 삼천리강산과 백성을 나 몰라라 하고 혼자 도망간 선조가 조선조 가장 무능한 왕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 것처럼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친일 부역자들의 온상으로 만들고 전란에 혼자 도망친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서 역사적 과오에 대한 냉철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로 이어진 친일파 옹호 정책과 반민특위의 무산으로 해방 직후 가장 절실한 민족적 과제인 친일파 청산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민족 반역자요, 전쟁 범죄의 공범인 친일파와 그 비호 세력들은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 갔다. 그들에게 친일은 더는 원죄가 아니었다. 그들은 친일 반민족 행위를 은폐 또는 정당화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대를 이어 막강한 권력과 부를 물려받은 자신의 후예들이 교육적 세뇌를 통해 어두운 과거를 오히려 미화하고 칭송할 수 있게 만드는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친일파들은 사회 주도 세력으로 기세도 등등하게 재등장하였고, 분단국가의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반면,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독립운동 세력은 오히려 사회의 주류에서 배제되고, 친일 세력에 의해 핍박받는 꼴이 되었다.
박정희 18년 독재정권 아래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친일 문제를 언급하는 자체가 금기시될 만큼 역사의 정의는 사라졌다. 하지만 촛불 국민의 힘으로 박근혜를 탄핵하고 과거의 이런 어두운 친일을 청산하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우대하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역사는 조금씩 정의로 진보하는 모양새지만 70년 뿌리 박힌 이들의 저항이 만만찮다.
항일 독립운동의 거두 백범정신을 계승하는 백범기념사업협회의 회장이 왜 하필이면 백범의 정신과 철저히 위배되는 '박정희·이승만 신봉당'에서 공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해석되는 것인지.
이문제는 개인의 양심으로 따져 볼 수밖에 없다. 김형오 미통당 공관위원장이 백범 정신은 전혀 안중에도 없이 개인의 영예로 단순 직함으로만 백범기념사업협회장 직을 안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설사 기념사업회에서 위촉했더라도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그게 최소한의 양심이다. 친일에 뿌리를 둔 미래통합당과 평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친일 반민족세력에 운명을 달리한 김구는 살아온 결이 티끌만큼도 일치점이 없기 때문이다.
'김구의 나라', '이승만의 나라'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어느 인생에 손을 들어 주고 싶은가? 김형오 위원장의 정체성을 묻고 싶다. 그리고 자신의 거취를 지금이라도 분명히 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