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연한 자연에 의한 재앙에서 배운 것, 즉 인간의 내면에는 경멸할 것보다 찬미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다만 그렇다는 것만 말하기 위해.” 이 글을 ‘코로나19’퇴치를 위해 헌신하시는 모든 분들께 드립니다. -역자 주 |
---|
카뮈와 본회퍼
- 지금, 까뮈 『페스트』를 읽다 -
미야타 미쓰오 宮田光雄
1928년 태어나다. 도호쿠대학 명예 교수. 유럽 사상사 전공. 저서로는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아가다』 『국가와 종교』 『나치 독일과 언어』 등이 있다.
카뮈와 본회퍼
지금까지 훑어본 것처럼 『페스트』는, 인간이 처해 있는 끝없는 고난과 부조리라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글이자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내포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도 암시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해석함에 있어서, 리외와 타루를 합친 인물이 바로 작가 카뮈라는 사람이라고 지금까지 자주 거론되었다. 그러나 카뮈 자신은,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인가 하면 리외 쪽을 좀 더 자신에 가깝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리외가 곧 카뮈라는 동일화는, 다양한 방면에 걸쳐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의 기본적 성격과 모순된다. 오히려 카뮈는 모든 등장인물 속에 자신의 다양한 측면을 발현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에게, 『페스트』에 나오는 많은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역시 주인공 리외의 존재이며, 그의 헌신적인 행동을 떠받치는 힘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아닐까.
의사 리외는 타루와의 대화에서 “성자의 덕”을 갈망하는 것을 부정하고,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 바로 그것이다”라고 했다. 파늘루와의 마지막 대화에서는 “인간의 구제 같은 것은 너무 거창한 말입니다”라고 거부하고, “내 관심의 대상은 인간의 건강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마찬가지로 랑베르가 페스트 환자를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서 일하는 자기희생의 궁극적인 동기를 캐물었을 때, 그것은 “왜라는 이유도 모른 채”하고 있는 “하나의 사실이다”라고 대답하는 데 그쳤다.
확실히 그 대답들은 명확한 답변이 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하나의 기본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명백한 것은, 의사 리외를 행동하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 기독교적인 세계나 기독교 사상의 유산 ― 교양이나 도덕, 더욱이 종말론적인 희망 같은 ― 과는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만 카뮈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모종의 오해가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다. 그가 파늘루의 입을 통해 들었던 기독교는, 반드시 성서적인 신앙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카뮈는 초월적인 신의 의지와, 이 신에 지배당하는 인간의 삶과의 격절성隔絶性과 대립성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예리하게 파악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해 줄곧, ‘은총’과 ‘자유’의 문제로, 반복해 논란이 되어 왔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페스트』 해석에서도, 파늘루의 기독교관은 기본적으로 카뮈가 젊은 날 접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졌다. 아니,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아우구스티누스 이상으로, 더욱 철저한 해석에 힘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Albert Camus und die Christen. Eine Provokation(알베르 카뮈와 기독교. 하나의 도전)』, Sabine Dramm, Hermann Düringer 공저, 2002년, 참조).
하지만, 파늘루가 두 번째 설교에서 마지막으로 청중에게 요구한 ‘전체’가 아니면 ‘전무’로 비약하는 결단은, 아우구스티누스보다도 오히려 같은 북아프리카 출신인 고대 성직자 테르툴리아누스의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근본주의적 입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파늘루의 미발표 논문의 주제 “사제가 의사의 진찰을 요청했다면, 거기에는 모순이 있다”라는 것은, 너무 비약한 카뮈의 오해라고 할 수 있다.
■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과 기독교도
확실히 카뮈는,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 때문에 바로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과 기독교도』(1948년)라는 제목으로, 그가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행했던 기독교도와의 ‘대화’는 관심을 끈다. 그는 대화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어떠한 절대적인 진리도 어떠한 사명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끼고 있으며, 결코 기독교적 진리가 허망한 것이라는 원칙에서 출발하지 않고, 다만 내가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할 작정이라는 점을 밝혀 두고 싶습니다.”
이 ‘대화’에서도 카뮈는, 속류적인 기독교 비판으로 볼 수 있는 기독교에 대한 편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도 젊은 날 이후 경의와 친근감을 잃지 않는다. 1950년대 내내, 카뮈는 자신을 신을 믿지는 않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라고, 반복해 말하고 있다(이것에 비해, ‘그리스적’인 것에 대해 말하면, 『시시포스 신화』에 나타나고 있듯이 카뮈는 ‘신화’를 종교적 전통이 아닌, 오히려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한 상징적 언표로 이해하고 있다).
이 ‘대화’ 속에서 카뮈는 “먼저 비관론의 논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여러 가지 공허한 논쟁과 연결을 끊는 것입니다”라고 단언한다. 기독교도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카뮈 자신을 ‘비관론자’라며 비난할 권리는 전혀 없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창조된 존재의 비참이나 신의 저주라는 두려워할 만한 말을 발명한 것은, 내가 아닙니다. …또 저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적 낙관론이라면! 인간에 대한 불신을 이것 이상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세상의 경제적 숙명은, 신의 자의恣意보다도 두려운 것입니다.”
확실히 카뮈는 수직적인 것이든, 수평적인 것이든, 모든 종말론적인 미래를 기다리고 바라는 것에 반대했다. 수직적인 것에 대해서는, 유대교 = 기독교적인 희망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 ― 플라톤적인 영혼 불멸의 형이상학까지 ― 도 포함된다. 수평적인 그것은, 아득하게 먼 역사적 미래에 실현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적 구제론이다.
그러나 이들 사상에 반대하며, 카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인간에 대해 낙관론자”라고 소개하며, 주목할 만한 이유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나에게는 항상 부족한 것으로 생각되는 인간주의의 이름이 아니라,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바의 무지의 이름으로서의 낙관인 것입니다”라고 미리 이야기하고 있다.
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무지의 이름으로”라는 것은, 조금 전에 인용한 ‘대화’의 첫머리에서, 카뮈 자신이 한정한 말에 비추어보면 명백하다. 여기에는 기독교가 주장하는 세계의 ‘비의秘義’에 대해, 카뮈는 개방적인 ― 즉 미결정의 ― 입장에 머물고 있다는 기본적 자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자신이 의도하는 점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여러분 앞에서 내 자신을 기독교도가 되려고 하는 시도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같이 악에 대한 강한 증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과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어린이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이 세계에 맞서 싸움을 계속할 것입니다.”
이 도미니크 수도원에서의 ‘대화’는, 카뮈에게 대화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인간 위에 가져다주는 고난을 저지하기 위한 연대적 행동을 호소하려고 한 일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페스트』에서는, 죄 없는 어린이의 고난이 인간의 삶의 부조리를 응축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 ‘대화’에서는 거기에 더해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틀림없이 이 세계가 어린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세계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당하는 어린이들의 수를 줄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우리에게 그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서 누가 우리에게 그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만약 기독교도들이 그런 결심을 하면, 오늘날 신앙도 없고 계율도 없이 도처에서 꾸준하게 어린이들을 위해 인간을 위해 변호하고 있는 얼마 안 되는 고립된 사람들의 절규에, 전 세계에서 몇 백만이라는 목소리, 아시는 바와 같이 몇 백만이라는 목소리가 늘어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본회퍼와 카뮈
이러한 카뮈의 호소에 몇 년 앞서 이미 선구적으로 응답했던 기독교 교도가 있었다. 그 사람은 히틀러의 전쟁을 저지하기 위해 ‘평화의 공회의公會議’ 호소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고, 나중에 저항 운동에 가담해 순교한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이다. 그는 나치의 교도소에 갇혀 있으면서 독특한 사색을 글로 남겼다.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에 바탕을 둔 『비종교적 기독교』라는 착상이다(『옥중서신 - 저항과 복종』, 디트리히 본회퍼, 김순현 옮김, 복있는 사람들, 2016년).
본회퍼에게는, 신앙의 이름으로 “피안으로 도피”나 거꾸로 “기계 장치에서 나오는 신”[Deus ex machina이란, 연출 기법의 하나이며, 고대극에서 기계 장치로 공중에서 내려와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신을 말한다. 갑자기 출현해 난국을 타개하는 극(소설) 속의 인물]에 의한 이 세상에 대한 개입을 설명하는 기독교는, 모두 부정해야 할 종교의 비판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은, 우리의 생활 한복판에 있어서 피안적인 것이다.” 기독교 신자란, ‘진정한 이 세상의 속성’= 이 세상의 속성에 개방된, 종교적 후견에서 벗어나 ‘성인이 된’ 인간으로서 ‘타자를 위해 봉사하는’ 책임을 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타자를 위한 존재’에서 새로운 삶, 즉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삶인 것이다. 무수하게 많은, 도달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과제라는 것이 아니라, 손이 미치는 이웃이 초월적인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카뮈의 방대한 저서 『반항적 인간』(1951년) 속에서 사용되는 다음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반항에 있어서는, 인간은 타인 속에, 자기를 초월하게 한다”라는. 그 말이 의미하는 점을 얼마쯤 상세하게 더듬어 보자.
카뮈는 이미 이 방대한 저작에 앞서, 그 스케치라고 할 수 있는 논문 「반항에 관한 고찰」(1945년)을 쓰고 있었다. 이 논문에는 “부조리 체험 속에서의 비극은, 개인적인 것이다. 반항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비극은 집단적임을 자각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반항적 인간』의 논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전개된다.
‘반항적 인간’이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거부해도 단념은 하지 않는다. (반항의) 첫 충동에서 ‘네’라고 하는 인간이다.” “반항하는 사람이 입을 열면, 가령 ‘아니다’라고 말할 때에도, 그는 희망하고, 판단하고 있다.” “모든 반항적 행동은, 자기 의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상태로,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 그래서 “반항이라는 행동은 허용하기 어렵다고 판단된 침해에 대한 절대적 거부와 동시에 정당한 권리에 대한 막연한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카뮈에 따르면, 반항은 압박을 당하는 사람이 받는 자신에 대한 박해에 내부적으로 생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타인이 희생되는 압박을 보고도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에 생기는 “다른 개인과의 일체화”는, 단순한 “심리적 일체화”도 아니며, “이해利害 공통성의 감정”도 아니다. 즉 자신으로서는 반항하지 않고서 참고 견딜 수 있는 박해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 박해가 가해지는 것을 목격하면, 어느새 묵인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또 우리가 평소에는 적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옳지 못한 일이 가해지는 경우, 보고 있을 수만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 거기에는 “다만, 운명의 일체화와 같은 편이라는 의식만이 존재한다.”
여기서 카뮈는, 앞의 주목할 만한 말을 사용하여, 놀라운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개인이 지키려고 하는 가치는,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가치를 만드는 데는 적어도 모든 사람이 필요하다. 반항에 있어서는, 인간은 타인 속에서, 자신을 초월하게 한다.”
이제까지 단 한 사람의 “개인을 괴롭히고 있었던 병이 집단적 페스트가 된다. 우리 것인 매일 매일의 고난 속에서, 반항은 사고의 영역에서 ‘나는 생각한다’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반항이 첫 번째 명확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확한 증거는 개인을 고독에서 끌어낸다. 반항은 모든 인간 위에, 최초의 가치를 이루는 공통의 장이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카뮈에게, ‘반항’은, ‘혁명’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혁명’은 지나치게 파괴적이며, 지나치게 전체주의적인 이념을 가진, 너무나 방대한 생명의 부정을 수반한다. ‘반항’은 이러한 지나친 것에 반대해야 한다. 그것은 지나치게 큰 것, 관리할 수 없게 된 것, 생명에 적대하는 것을 ‘방향을 바꾸게’ 해야만 한다. 바로 그것들을 정당한 한도까지 되돌려, 대량 파괴로부터 지켜 낸 삶을 재건해야만 한다.
“혁명이 권력과 역사의 이름 아래, 살인적인 과격한 기계 장치가 될 때, 새로운 반항이, 중용과 생명의 이름으로 신성한 것이 된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극한에 놓여 있다. 어둠의 끝에는 반드시 빛이 있는 데, 우리는 선뜻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이 밝게 빛날 수 있게 싸워야 한다. 허무주의의 저쪽에, 폐허 속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르네상스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실은 카뮈가 1943년 7월부터 다음해 7월말까지 이어서 쓴 네 통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남아 있다. 나치 점령하의 유럽에서 동시대의 독일을 준열하게 비판한 문장이다.
‘이탈리아어판 서문’에서, 카뮈는 이 편지의 필자가 “자네들(너희)”이라고 한 것은 “독일인 일반”을 의미하지 않고, “나치스의 사람들을”가리키는 것이라고 밝힌다. 반대로 “우리”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 프랑스 사람 모두”를 의미하지 않고, “우리 자유로운 유럽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최초의 편지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애착”이나 “평화 애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길게 길을 돌아가야 했고, 그 때문에 값비싼 희생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었다고 적는다. 바로 “굴욕과, 침묵과, 감옥과, 처형의 아침과, 방기와, 이별과, 나날의 굶주림과 비쩍 마른 아이들과, 무엇보다 먼저 강제된 고행.” 그 후 “우리는 정신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 지금 손에 칼을 드는 것을 승낙했던 것이다. …우리는 확신을, 대의명분을, 정의를 가지고 있다. 너희의 패배는 피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마지막 편지는, 이미 프랑스 해방의 날도 가까워진 무렵의 것이다.
“너희는 절망에 취해, 절망을 보편적 진리로까지 향상시켜, …대지를 파괴하는 만큼의, 사람을 피로하게 만드는 저 모험 속에 몸을 눕혔다.”
“나는 너희와는 반대로, 대지에 충실한 사람이 되려고 정의를 선택한다. 이 세상에는 최고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는 계속하여 믿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 있는 어떤 존재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이야말로 의미를 가질 것을 요구받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적어도 인간이라는 진리가 있다.”
레지스탕스의 한복판에서 쓴 이 편지들은, 당시 반反나치 저항자로 감옥에 갇혀 있던 본회퍼에 연대하는 편지였다는 엉뚱한 상상조차 불러일으킨다.
확실히 본회퍼는 카뮈와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카뮈와 달리 열정적인 기독교 신자이며, 거기에 더해 신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도소에 갇힌 본회퍼가 한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함께, 그러나 하느님 없이 산다”라는 말은, 더할 수 없이 카뮈에 가깝다.
예를 들면,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를 둘러싸고 독일과 소련이 사활을 건 공방을 벌이고 있던 무렵, 본회퍼는 저항 운동의 동료를 위해 「10년 후에」라는 제목을 붙여 당시의 상황 인식을 총괄하는 초고를 쓰고 있었다. 그 글 속에서 본회퍼는, 근대사 속에서 독일인에게 결여되어 있는 “시민적 용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라는 신앙 고백을 ‘세속적 범주’(E.Bethge)를 사용해 이른바 ‘비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대 인식이나 정치적 사고에서 본회퍼와 카뮈 사이에는 공통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치즘에 맞서는 저항이라는 한 가지에서 일치하고 있었다. 이 독일 신학자는, 예수의 고난에서 배운, 희생자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과감히 나치 정권에 ‘대역죄’를 범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 점을 카뮈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카뮈가 규정하는 ‘반항’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거꾸로 또 만약 본회퍼가 프랑스 사람이었다면, 레지스탕스 안에서 함께 싸우는 것이 가능했으리라.
본회퍼의 『옥중 서간집』에는 대단히 특징적인 문장이 적혀 있다.
“우리는 이 미친 듯이 날뛰는 시대 속에서, 도대체 생존하는 것에 왜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또는 저 사람이 생존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생존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오히려 이렇다. 대지가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떠맡을 자격을 부여받았다고 하면, 그리고 예수 같은 사람이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하면, 그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우리 인간에게도 생존의 의미가 있다. 만약 예수가 생존할 수 없었다면, 그때 우리의 삶은, 자신들이 알고, 존경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그 밖의 모든 사람이 생존하고 있다고 해도,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자신들의 직업이 가진 진정한 의의나 과제를 종종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본회퍼가 예수의 고난에 연대함으로써 타자를 위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려고 했다면, 카뮈의 사상은, 인간의 고난에 연대해 타자를 위해 생존하는 ‘초월성의 행위’(T. Simons)를 호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경우, 본회퍼에 있어서는 ‘초월성의 내재’라는 그리스도론(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업적을 중심으로 전개한 신학)적 동기 부여가 명백하다. 이것에 비해 카뮈에 대해서는 ― 감히 대비적인 말을 사용한다면 ― ‘내재성의 초월’이라는 사상적 계기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거기에는 대단히 흥미 깊은 ‘대조 속의 유추’가 있다(Sabine Dramm 『본회퍼와 카뮈』1998년).
앞에서 인용한 본회퍼의 『10년 후에』의 총괄은, “매일을 그것이 최후의 날인 것처럼 수용”하면서 “아주 좁은 길”을 살아가려고 하는 종말론적 희망으로 일관되어 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서, 최악의 사람에게서조차도, 선한 사람이 태어나게 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바란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 때문에 하느님은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도록 쓸모 있게 하는 인간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신뢰가, 그것에 대응해 인간의 입장에서 책임 있는 행동 = ‘시민적 용기’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이 요청되고 있다. 이 본회퍼의 ‘신앙적’ 낙천주의에는, 카뮈가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말한 ‘대화’라는 말을 대비할 수 있다. 본회퍼는 자신을 “인간을 위한 낙관론자”라고 규정하고, 거기에 더해 그것을 “무지의 이름으로”, 즉 본회퍼 자신의 사물의 본질이나 궁극적 실재의 참모습은 사람의 경험으로는 결코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근거해 주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 “미친 듯이 날뛰는 시대” 속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본회퍼인가 카뮈인가라는 ‘이것인가 저것인가’라는 선택이 아니라, 본회퍼와 카뮈의 ‘대화’에 기초해 공동의 실천 행위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페스트』에서 작가 카뮈가 호소하려고 한 것도,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리라. 파늘루 신부는 ― 두 번의 설교에서 하느님을 믿는 입장을 기본적으로 바꾸지 않은 채 ― 보건대에 가담, 의사 리외의 활동을 측면에서 도와주는 공동 전선에 설 수 있었다. 의사 리외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고 환영했다.
■ ‘신 없이’ 페스트와 싸우는 힘
우리는 지금까지 의사 리외를 끝까지 떠받치는 힘의 비밀은 무엇이었던가, 라는 질문을 계속해 왔다. 마침내 명료해진 것은, 카뮈에게 연대하는 인간의 실존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반항’이 틀림없다는, 모순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역설이다.
의사 리외는 페스트가 소멸된 후에, 자신에게 남겨진 과제로 ‘페스트’의 기록에 착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자들 편이 되겠다는 의지를 명확하게 한 다음, 다시 이어서 집필 의도에 관해 주목할 만한 말을 덧붙이고 있다.
“만연한 자연에 의한 재앙에서 배운 것, 즉 인간의 내면에는 경멸할 것보다 찬미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다만 그렇다는 것만 말하기 위해.”
이 말에서는, 리외의 인간에 대한 ‘희망’의 증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곧 소설 『페스트』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은, 개인의 운명을 넘어서 동일의 운명을 짊어진 타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등장인물은, 누구나 동일한 부조리의 고난 속에 내몰려 있으면서, 그러나 고난을 함께 나누는 것, 연대하면서 고난과 싸우는 것이 자신에게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러한 우정·사랑·연대감은, 부조리한 삶의 감정에 대항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인생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확실히 소설 『페스트』는, 어떤 면에서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모든 인간이 이러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사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대해서 인간을 반항하게 만들기도 한다. 물론 이 반항은 다만 제한된 범위와 의미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리외의 눈에 비치는, 집집마다 문간에서, 스러지는 햇빛 속에서, 힘껏 서로 껴안고, 멍하니 얼굴을 서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가지고 싶었던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어떻게든 손에 넣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것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소설 『페스트』가 호소하는 사실은, 리외의 기록 맨 끝에 덧붙여 적혀 있는 다음의 말일 것이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은 적도 소멸한 적도 없다. 수십 년간 가구나 속옷 같은 것들 속에서 잠자며 생존할 수 있으며, 방이나 지하실, 가방이나 손수건, 휴지 속에서, 끈질기게 계속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는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페스트가 다시 그 쥐들을 불러내서, 어느 행복한 도시에 쥐들을 죽으라고 보내는 날이 올 것이다.”
이 마지막 말에는 삶의 부조리라는 주제가 메아리치고 있다. 소설 『페스트』는, 죽음과 고난으로 규정된 인간의 삶이 처한 상황이라는 기본적인 사태를 특별히 강렬한 형태로 제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 해변에서의 대화에서 타루가 리외를 향해 자신의 출신과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그의 생애를 ‘페스트 환자의 삶’으로 규정하여 보여 주었다. 등장인물의 한 사람인 천식을 앓고 있는 노인도, 완전히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페스트란, 인생이라는 것이다”라고.
앞으로도 전쟁은 반복하여 일어날지 모른다. 병과 죄 없는 사람의 고난, 인간 사이의 다양한 악행은 끊이지 않고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지상의 삶의 현실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과거의 ‘페스트’에 대한 역사적 증언을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페스트’가 향하는 방향을 똑바로 지켜보는 것이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미래를 보고 상황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해 두어야만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주어진 자기 자리에서 굳게 버티며, 다양한 형태로 가능한 연대적 행동에 나서기 위해.
이 시대에서도 자기 자신에 의해, 자기 자신에 대해 정의된 가치를 발견하고, 자기 자신의 결심에 근거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정한 자유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공통으로 체험한 ‘집단적 페스트’에 대한 연대적인 ‘반항’에서, 언젠가 새로운 관계에 기초해 보편적인 인간성으로 개방된 ‘우리’ 사회가 탄생할 수 있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카뮈는 1957년 가을,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으로 행한 「스웨덴 연설」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위대한 사상은 비둘기 다리를 타고 이 세상에 찾아온다고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귀를 기울이면, 수많은 나라와 국민의 소요 그 한복판에 있어도, 삶과 희망이 조용하게 이동하는 소리가, 희미한 날갯짓처럼 들려오겠지요. 이 희망은 어떤 나라의 인민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한 사람의 인간이 가져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요. 저는 거꾸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희망을 만들어 내고, 활기를 불어넣고, 기르고 있는 것은 몇 백만의 고독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행동과 작품은 경계와 조잡하기 그지없는 역사의 외모를 날마다 부정하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고뇌와 자신의 기쁨에 더해 만인을 위해 수립하려고 하는 저 진실, 늘 위협당하고 있는 저 진실을, 한순간 찬연히 빛을 발하게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