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5적’은 모두 재판장,판사 출신들이었다.
1905년 을사년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으로 우리는 을사늑약이라고 칭한다. 을사오적이란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된 말이다. 그런데 이 을사오적은 모두 판사출신이었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07.17.-1926.02.12.) 전라북도와 평안남도 재판소 판사 출신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1858.12.07.-1916.06.20.) 평리원 재판장서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1865.09.30.-1919.12.16.) 평리원 재판장(현재의 대법원장)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10.23.-1928.06.28.) 평리원 재판장과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1854.11.27.-1934.03.19.) 평리원 재판장서리
을사5적 중 지방 재판소 판사 출신인 이완용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 모두가 요즘의 대법원격인 평리원의 재판장 혹은 재판장 서리를 지냈다. 이들은 을사조약에 찬성함으로써 스스로 매국노의 길을 택한 것이다. ※ 평리원(平理院: 1899년 5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존치되었던 최고법원; 현재의 대법원)
경북 구미 출신의 왕산 허위선생은 고종에게<論時事疏> (시사를 논하는 상소), 그리고 재소를 올려 이완용,이근택등 다섯명의 매국노 을사오적(乙巳五賊)의 머리를 베어 거리에 매달아 국민들의 분노를 풀어달라고 주청하면서 친일파는 목을 잘라 베어라 할 정도로 친일파 척결에 앞장선 분이다.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선 을사오적 무리들과는 달리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서리재판장(대법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승(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하고도 위급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1907년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 양주, 철원, 장단, 연천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해산군인까지 받아들여 1만여명의 전국연합의병인 ‘13도 창의군 결성하고 군사장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일제 통감부를 치기위해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했던 왕산 허위 선생의 삶은 너무나 극명히 대비된다.
왕산 허위는 2차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1908년 6월 이완용의 체포명령에 의해 결국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그해 10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안중근은 왕산 허위가 순국한지 꼭 1년 후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1909년 10월 21일 아침 가슴에는 벨기에제 브라우닝 M1900 권총을 품고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하얼빈으로 가고자 우스리스크 행 열차를 탄다. 그들은 우스리스크역에서 기차를 갈아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10월 26일 전 내각총리대신, 전 조선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거사 후 5차 공판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은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같은 국욕은 받지 않았을것이다” 라고 말했다.
일제 때 판사를 지내다 정부 수립 후 대법원장을 지낸 사람은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1888-1964), 2대 조용순(趙容淳: 1898.-1975), 3-4대 조진만(趙鎭滿: 1903.-1979), 5-6대 민복기(閔復基: 1913-2007) 등이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제외한, 나머지 세 대법원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등재돼 있다. 11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친일파는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살아 날뛰고 있다. 그들은 신 을사오적의 이름으로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이다.
朴근혜 정권 강제징용 재판거래 실상…현대판 ‘을사오적’ 일본 앞잡이 행각을 적시한 도표
나라를 팔아먹고 나라를 망치는 자들이 주로 판사,검사들이 앞장을 썼다는 점에서 과거나 현재나 별 다름이 없었다는 점은 법을 공부하고 법률을 자신들의 부귀와 출세의 도구로 삼은 자들이 있었기에 국가의 비극이 생겨난것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진 부패한 판검사와는 달리 법을 사회 질서 유지와 정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도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있다.
왕산 허위 선생의 직계제자로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식민지 관리가 되지 않겠다며 사퇴하고 대한 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관이 된 그는 당시 토지 900 마지기 (18만평)을 팔아 독립군자금 모금 상덕태 상회를 만들고 나중 의형제를 맺은 김좌진 장군에게 10억3천만원의 군자금을 지원해 만주 부사령관으로 파견했다. 청산리 대첩의 출발점인 것이다.
왕산 허위 선생은 고관대작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맞서 장렬히 싸우다가 끝내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선생의 순국 후 경북 구미 임은동의 허씨일족은 모두 만주로 망명을 가서 그곳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3대에 걸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선생의 가문은 14분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항일가문이지만 그 후손들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 중국 미국 북한등 전세계에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아직도 친일파 후손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지만 왕산 허위 가문의 후손들은 아직 단 1명도 그들의 고향인 구미에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허위와 허훈, 허겸의 동상이 앞에 그 뒤로 허형, 허필, 허종, 허학, 허영, 허준, 허국, 허발, 허규, 허형식 허은등의 부조상이 기제작 완료되었으나 1년 넘게 창고에 방치되어 있는 상태다. 원래 조감도에는 13분의 조형물이 만들어졌으나 임청각 3대 종부 허은 여사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음으로 14분의 기념 조형물을 만들었다. 왕산의 큰 형님 방산 허훈은 당시 전답 3천 마지기 (60만평)을 팔아 허겸과 허위의 의병창의 군자금으로 보태며 재산과 목숨까지 바쳐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집안이다.
서울의 을지路..종路.퇴계路.세종路는 누구나 잘 아는 유명한 도로명이다. 그리고 하루에 수십 번 교통방송안내에 흘러나오는 왕산로의 유래는 고종황제시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 평리원 서리재판장(대법원장),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비서원 승(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왕산허위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도로명이다. 정부는 1962년 허위선생의 공훈을 인정하려 대한민국 건국훈장 1급 대한민국장을 서훈하였다. 왕산 허위 의병장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호 이기도 하다.
왕산 허위의 12살 많은 사촌 형인 범산 허형은 아들 일창 허발등과 을사오적 중 군부대신 이근택의 처단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근택 처단에 관련되어 허발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범산 허형의 외손자 이육사(이원록)과 형제들, 왕산의 사위 이기영과 그의 형제들을 더하면 왕산가와 연결된 독립운동가는 20명이 훨씬 넘는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가문이며 50여 년간 3대에 걸친 한 가문의 독립투쟁의 역사는 세계 독립운동사에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고향이 구미라서 그런것일지도 모른다.
선조들의 독립운동 활동으로 구미출신 임은허씨 가문의 후손들은 전세계로 뿔뿔히 흩어져 살고 있다. 그들의 언어도 영어,중국어,러시아어, 중국어등 다양하다.
한국에 남아 있는 몇 명 안 되는 직계 후손 중 한명인 허소 전 청와대 행정관이 4.15 총선 대구 달서을 민주당 당내 경선에 승리해 이제 본선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