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기업에세이] 경제적 예속, 그것이 두렵다..
오피니언

[기업에세이] 경제적 예속, 그것이 두렵다

박종형 칼럼니스트 기자 johnypark@empas.com 입력 2020/04/08 19:03 수정 2020.04.08 19:11
박종형 칼럼니스트
박종형 칼럼니스트

현재 이념이나 군사력에 의한 국가 간 예속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사실상 예속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가 없는 건 아니다. 그게 선린 공존의 관계에서 묶이는 경제적 예속이다.

지금 세계는 온통 핵무장의 정당성 시비로 들끓고 있으면서 한 편에서는 뜨거운 감자 같은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시장개방을 협상하느라 시끄럽다.
과거 군사력을 가지고 강국을 자처했던 시절에는 군함을 앞세워 개방의 문호와 뱃길을 열게 만들었지만, 지금은 수출상품을 실은 화물선으로 시장을 공략한다. 영토를 차지하고 자원을 빼앗는 싸움이 시장을 점유하고 재물을 챙겨가는 경쟁으로 바뀐 것이다. 때문에 자유로운 경쟁과 무역을 기조로 하는 시장경제가 세계적으로 선호하는 경제방식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시장으로 통하는 길은 관세나 규제의 관문이 있을 뿐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시장에 매매자로든 구경꾼으로든 서면 누구나 ‘세계인’이 되며, 거기다 공장을 지어 생산을 해서 팔거나 투자를 해서 돈을 벌어, 거기서 부자로 살 수도 있고 번 재물을 가져 다 재산을 쌓을 수도 있다.

지금은 자본이나 기술이나 아이디어나 자원을 투자하는 투자가가 가장 환영 받는 귀빈으로, 그런 사람이 찾아오면 마치 국빈을 맞듯이 장관이 공항으로 출영을 나가고 칙사 대접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난 세기에 군함의 시위로 국력을 과시했던 것처럼 현대는 무역선단의 수출입 규모로 국가 경제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물자뿐만 아니라 사람과 정보와 기술과 문화와 지식과 사조까지 교류되고 수입돼 뿌리를 내린다. 해서 마치 도플갱어 같은 판박이 시장이 생기는가 하면, 하이브리드 문화가 성시를 이루고, 실시간으로 동영상이 뜨듯이 일일 권 오프라인 시장으로 번갯불 쇼핑을 다니거나 안방에 앉아 사이버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가장 마음에 드는 상품을 마음껏 골라 가장 싼 값에 살 수 있게 되었다. 파는 쪽이나 사는 쪽 모두가 시장에서 누리는 자유와 선택의 기회는 실로 대단히 다양하고 풍부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풍부하고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에 뒤따르는 문제가 있다. 그건 생존을 거는 경쟁의 치열함과 무책임성의 확산과 정체성의 상실 같은 것들이다.

자본주의경제는 자유로운 경쟁을 기본으로 삼는다. 
경쟁의 속성은 겨루는 것이고 이기는 것이며, 이기려면 보다 빠르고 보다 강하며 보다 유능해야 한다. 그런 요건을 갖추고 소유하며 사용하는 경쟁자는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인이고 경쟁무기는 상품이다. 그것엔 어떤 이념적 상표가 붙지 않기 때문에 경쟁의 원칙이나 요령은 어디까지나 시장원리에 입각한다. 저들은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독일 병정’도 되고 ‘가미가제 특공대‘도 되며, 한신韓信처럼 강자 사타구니를 기기도 하고 적과의 동침도 불사한다. 변화무쌍한 환경에 적응하며 시장에 충성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체제에는 달리 애국자가 없듯이 매국노 또한 없다.
지금은 ‘국민기업’이니 ‘매판자본’이니 하는 용어가 낯설며, ‘다국적기업’이니 ‘해외투자 유치’니 하는 말이 귀에 익다. 찬반과 적과 동지의 구분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고 수시로 바뀌는 것이다. 국가관이나 민족관도 변했다. 예컨대, 민족주의 같은 이념의 파워 보다는 브랜드 파워 가 훨씬 강하고 현실적이다. 예컨대, 한국이 러시아에게 재정차관을 제공하고 그 상환을 첨단 무기로 받는 데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경기하는 세계적인 스타 프로 골퍼들을 보면 상표는 주렁주렁 달았어도 국기 라벨을 단 사람은 없다. 속에 지닌 국민 된 자긍심보다는 밖으로 내보이는 프로 골퍼로서의 이미지가 더 선명한 것이다.

자유경쟁이 낳는 다른 하나의 폐단은 무책임이다.
국민 된 도리와 상도의는 별로 일치하지 않으며,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기업마인드의 이상적 융합이란 그리 간단치가 않다. 국가에서 요구하는 국민 된 의무와 기업에서 완수해야 되는 의무와 책임은 내용과 본질이 딴판이다. 국가가 보호하고 신장하는 국민의 자유와 평등의 권리와, 기업이 보장하고 발전시키는 종업원의 정당한 분배와 풍족한 삶의 권리 또한, 그 가치가 다르다. 

책임의 영역과 내용과 수준이 다른 것이다. 한 사람 국민의 무책임함이 국기國基를 흔들지는 않으나, 기업에서는 한 사람의 종업원이 책임을 완수하지 않으면 목표달성에 차질이 빚어지고 경영을 망칠 수 있다. 해외시장에 나가 영업을 하는 무수한 마케터들이 생명처럼 지니는 책임정신은 국방을 책임지는 군인정신과 달리 목표로 세운 가치를 철저하게 계수 화 하는 방법으로 책임의 완수를 평가한다. 그러므로 상인정신에 입각해 목표달성 일념으로 시장에서 경쟁하는 비즈니즈 맨 들에게 비사업적인 책임정신, 예컨대 애국심 같은 것을 기업의 그것보다 더 우선하라 요구하는 것은 현실성이 낮다.

정녕 기업하기 어렵고 반 기업정서가 싫으면 설사 자본과 기술이 유출되고 일자리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기업인으로서의 경제적 사회적 책임에 구애받지 않고 공장을 뜯어 기업하기 유리한 타국으로 이전하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저렇게 책임에 대한 인식과 책임지는 행동이 변함으로써 정착 지키고 져야 할 책임정신과 책임지는 행동이 시장논리에 의해 눌리고 기업 생존경쟁에 밟히는 부정적 현상이 빚어지게 되었다.

넘쳐나는 외환보유나 외환거래 자유화나 자본시장의 개방 때문인지 모르나, 과거처럼 외화수입이나 외화절감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책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외국인 기업사냥꾼들은 철저한 검증 없이 들어와 성능 좋은 무기에 풍부한 실탄 가지고 노련한 사냥기술로 큰 은행을 먹어 치우고 공적자금을 듬뿍 얹어 파는 대기업도 낚는다. 거기엔 어떤 책임정신에 입각한 판단이나 책임지는 처신보다는 그저 보다 유리한 거래의 성사만이 우선이다.

자유의 영역이 더 커지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릴수록 그에 상응하는 책임정신이라는 도덕이나 가치가 절실하게 되었다. 그것이 결여된 자유란 방만하게 남용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의 신장, 특히 시장 자유의 일반화는 환경파괴, 불공정 거래, 저 품질 상품의 덤핑 판매, 불법한 상거래와 자금의 이동, 지나치게 이익만을 따지는 비정한 기업사냥, 대규모 외화도피, 방만한 해외 자본투자, 기업의 사회적 경제적 책임을 아랑곳하지 않는 생산기지의 이전 등 책임정신을 더 변질시키고 더 희박하게 만들었다.

시장개방의 확산과 자유화의 확대는 국가나 사회나 민족의 정체성의 변화와 블러(blur)현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하여 국가 이미지보다는 기업 이미지나 상표 이미지가 훨씬 더 강력하고 실생활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대규모 군중이 모여 열광하는 경기장엔 국기는 게양대에서만 나부낄 뿐 관중석은 기업 로고나 상표가 도배하듯 두르고 있다.

지금 사회라는 생활공동체나 문화는 시장하고 떨어져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가령 ‘고창’의 지명을 대면 잘 몰라도, ‘풍천장어’를 대면 그게 고창의 소문난 명산물임을 누구나 안다. 일본의 ‘벳부’가 무엇이며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지옥온천’이라는 괴짜 명칭을 대면 그게 온천마을로 이름난 벳부에 있다는 것을 바로 떠올린다. 영화는 투자가가 경영하는 제작사에서 제작돼 배급시장의 마케팅으로 전 세계 영화관에 공급되며, 대중 공연은 전문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의 중개로 거래된다. 출판문화는 출판과 보급 판매시장에서 유지되고 발전하며, 매체문화는 광고시장에 젖줄을 대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시장은 단순히 상품의 거래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삶과 문화가 생성되고 교류되며 꽃 피는 중요한 생활권이 된 것이다. 수긍하기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지, 사실 저 청맹과니 추종자들이 촌스럽게 외치는 주체사상 같은 시대착오적인 이념은, 순전히 세계화나 시장경제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그런 독선적 이념이란 시장을 멀리 할수록 더욱 나라가 고립되고 가난해지며 살기 고통스러워 진다는 사실을 억지로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시장을 깔보고 멀리하면서 잘 살고 발전하는 나라나 민족이란 없다.

싫고 동의하고 싶지 않아도, 국가나 민족이나 사회의 기존 정체성이 변했거나, 훼손되었거나, 상실되었음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이념을 정립하고 변화를 일으켜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시대사조에 맞게 유지하고 지켜야 할 정체성의 새로운 정립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유를 구가하며 자주적인 정치를 한다 하면서 기실은 어느 나라나 어느 경제권 또는 어느 시장에 사실상 예속돼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런 경제적 예속을 극복하고 벗어나려면 모든 분야에서 도덕성과 교육과 기술과 기업가정신과 경영마인드와 질서의식과 책임정신 등이 고품질화 되고 함양되며 신장돼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그런 변화나 혁신은 경시 당하고 더디며 어긋나기 일쑤라는 사실이다.  도시 우리나라는 정치적 민주화와 민족자주는 도에 지나칠 만큼 열렬하게 외치고 소중히 여기면서도, 늪에 빠진 형국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제적 예속을 심각하게 문제 삼는 데는 매우 등한하고 무지하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예속은 상상보다 심각하다. 극히 우려되고 충격적인 것은 그런 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과 정치나 이념적 갈등과 노사 간 불화 때문에 그런 심화 현상을 더 가중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예속 실상은 하도 뿌리가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만성 화 되어 있어서 그 예속의 굴레를 벗어 던지기가 지난해 보일 정도다.
우리가 다분히 감정적으로 밉게 보는 일본의 경우 우리 경제의 저들 의존도는 너무나 만성적이고 개선되지 않아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심각하다.
우리나라가 1945년 광복으로 정치적으로 독립했으나 그 후 일본과 본격적으로 무역을 시작한 이래 단 한 해도 적자를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36년간 일본 제국주의 압제 하에 식민지로 고통스럽고 서럽게 살았든 것처럼 엄청난 무역역조라는 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다시 쓰고 그 세월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들한테 경제적으로 예속되게 된 동기는 6.25전쟁 때문이었다.
경제가 쑥대밭이 되면서, 분루를 삼키며 저들한테 자본도 꾸어오고, 산업시설을 빌려오기도 하고, 기술도 배워오고, 무역도 하면서, 야금야금 저들 손아귀에 쥐이게 되었다. 저들이 ‘일본주식회사’의 약삭빠른 상인임은 세상이 다 아는 것, 저들은 선린의 탈을 쓰고 베니스 상인의 칼만 들지 않았을 뿐 굶주리며 경제부흥에 피땀을 쏟는 우리에게서 비정한 글겅이처럼 큰 이문을 줄기차게 긁어 챙겨 갔다. 저들은 우리한테 단물을 다 빨아먹은 후진 기술과 산업시설을 생색내며 비싼 값에 팔았으며, 핵심기술과 부품의 공급권을 틀어쥐고 저들한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생산기계설비나 부품의 국산화 수입대체에 장장 수십 년이나 걸렸으며, 그러고도 첨단 분야나 고도의 정밀기계나 장비를 여전히 상당수를 저들로부터 수입한다.

저들하고의 장사가 항상 밑질 뿐만 아니라 기술이나 품질에서 뒤떨어진 간격을 좀처럼 다 줄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속상한 사실이지만, 우린 식민지의 굴레를 벗자마자 경제적 예속이라는 더 고약하고 벗기 힘든 굴레를 할 수 없이 쓴 것이다. 
그리고 지난 거의 반세기 동안에, 이념이나 민주화나 노사분쟁의 집안싸움에는 열정적이고 완강하였으면서도, 대일무역 역조의 반전이나 극일운동에는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다. 해서 어느 지식인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일본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의식과 두려워하면서 선망하고 숭배하는 의식이 함께 잠재해 있다’고 그 이중성을 지적했다. 만일 우리나라가 일본과 국교라도 단절하고 교역을 중단한다면 우리한테 어떤 긴박한 상황이 닥치게 될까 상상해 보면 끔찍하다. 아마도 우리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아무리 심정적으로 부인하고 싶지만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저들보다 국력이 훨씬 약하고 못 살며 기술력이 뒤지고, 저들과 무역하며 이익을 남긴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민주화니 평등화니 자주외교니 자주국방이니 온통 정치적인 과제에 목소리를 높이고 매달렸을 뿐, 국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봐 두려워서인지 일본에의 경제적 예속을 벗어날 장기 국가전략을 제대로 세워 실천한 정부는 없었다.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일본 정치인이 한국을 비판하는 치졸한 언동이나 독도의 영유권에 대한 가당찮은 주장을 들었다 하면 정계고 언론계고 국민이고 온통 분개해 지탄을 하고 나서지만, 저들이 경제적 우월의 고삐를 쥐고 우리가 피땀 흘려 번 돈을 거드름을 피면서 가져가는 경제적 지배를 통탄해 깨우치고 대처하자 외치는 사람은 없다는 현실이다.

저들이 변함없이 신사참배니 독도 영유권 주장이니 교과서 왜곡으로 우리한테 고자세이고 완강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경제적 예속에서 웃자란 우월감 때문이다. 그놈의 우월감, 바꾸어 말하면 한국인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며, 그 후 군함 몇 척으로 대포를 쏘아 위협해 조선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집어 삼킬 수 있었든 것이다.
지금 그런 유사한 관계가 저들하고 사이에 깊이 뿌리박히고 있는 것이다.
육십 년 세월을 제멋대로 조종해가며 무역을 하고 경제적 교류를 하면서 지켜보았으나 아직도 무역역조를 반전시키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과 무관심과 무신념을 저들이 옛일을 상고하면서 느긋하게 속으로 웃고 있는 것이다.

해서 일본인들 의식 속에 박힌 그런 맥락에서 어느 일본 지도자가 ‘한국(인)은 결코 일본(인)을 능가할 수 없다’고 호언장담을 한 것이다.
가정컨대, 만일 반미주의자들이 득세해서 미국과의 교역이 대폭 감소하거나 중단된다면 우리 경제에 어떤 상황이 닥칠까, 아마도 국가부도라는 위기를 초래한 외환위기의 수십 수백 배의 타격을 우리 경제에 가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과거세기에 비해 수출다변화로 미국 일변도의 수출의존도를 줄였다 하나 아직도 그 비중은 우리 경제의 사활을 좌우할 만큼 심대하다.
만일 핵문제든 북미 간 분쟁 때문에든 불안한 정국이 조성돼 자본시장에서 미국 투자가들이 철수하고 덩달아 외국투자가들이 주식을 팔고 떠난다면 저들의 투자규모가 총 투자액의 3분의 1에 달하는 우리 자본시장은 치명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의 수익성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2대 요인이 있는데, 그 하나가 달러화의 환율이다. 우리의 원화 가치가 얼마나 달러화 환율의 등락에 요동을 치는지를 보면 우리 경제의 허약함에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1달러당 원화가 1백 원만 떨어져도 기업의 경상이익은 적지 않게 감소한다. 특히 수출기업의 경우 더욱 그렇다. 1년 사이에 무려 3백 원씩이나 떨어지면 웬만한 기업은 달리 그 손실을 보전할 방법이 없이 속수무책이다. 이를테면 전쟁 억제를 위해 핵우산을 쓰고 군사적 보호를 받는 것처럼 우리나라 경제는 사실상 미국한테 예속에 가까운 의존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런 열등한 위상을 동등한 관계로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급선무지, 무슨 자주외교니 자주국방이니 공연한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은 현명치도 않으며 절박한 국가적 과제도 아니다.

어디 국가 간의 예속적 경제관계 만이 문제인가, 기술적 예속이나 주요 산업자원의 공급 의존도나 양질의 투자자본의 조달 의존도 또한 부국강병에 긴요한 경제력을 키우는데 커다란 약점이고 장애물이다. 예컨대 외국자본이 한국 종묘시장의 70 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다든가, 핵심 종묘의 조달을 거의 미국 등 외국에 의존하고 있다든가, 장미 한 송이에 15원씩이나 로열티를 외국에 지불하고 있다든가, 우리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반도체 생산의 첨단 장비 공급이 거의 일본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든가, 휴대전화기의 핵심기술에 대한 거금 로열티를 미국의 원천기술 제공기업한테 지불한다든가 하는 일방적 의존이 문제인 것이다.

핵우산을 받아쓰고 외교적 군사적 지원을 받는 게 국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다고 반미니 반일이니 구호를 외칠 게 아니라, 우리가 반세기 가까이 벗지 못하고 있는 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벗자 정부고 기업이고 혁신운동을 벌이라 외쳐야 한다. 진정 일등 가는 코리아, 필승 코리아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런 국가적 전략은 정권과 이념을 뛰어넘어 부강한 국가 장래나 잘 사는 국민의 미래를 위한 사과나무를 심고 키워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므로, 불굴의 신념과 오랜 시일과 국민적 합의와 피나는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