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우리는 심한 벤처 열병을 앓은 적이 있다. 그때 굴뚝산업은 사양화 될 것이고 벤처산업만이 살 길이라 했다. 과연 벤처는 신동 효자산업인 것인가.
우리가 벤처 열병을 호되게 앓고 났을 때 불과 이태 동안에 거덜 난 벤처 창업자의 주검이 수만에 달했다. 흑사병이나 콜레라 같은 전염병에 수많은 목숨을 잃은 대 참사에 버금가는 비극이었다. 대체 벤처란 하나의 새로운 사업모델인가, 아니면 새롭게 포장된 사업방식일 뿐인가. 진정 벤처는 자본주의가 낳은 최고의 걸작 품으로 21세기를 리드할 가장 이상적이고 강력한 사업모델인가, 아니면 시장의 진화과정에서 등장한 다분히 신화적인 우상인가.
벤처가 우리한테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외환위기라는 암흑기였다.
그때 기업인들은 하나 같이 죄인이었고, 종업원들은 절망과 불안 속에 메마른 광야를 헤매는 양들이었다. 뭔가 구원의 복음이 필요했고 희망을 걸 비전이 필요했다. 그 대망(待望)의 절박한 시기에 ‘벤처’는 마치 구원의 천사처럼 등장했다. 처음 그것을 들었을 때 우리는 왠지 신선한 느낌을 받았으며, 지금에 와서 그게 매우 ‘신화적 mythic’임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엔 신비스럽기조차 했었다. 심지어 ‘목욕탕벤처’, 그것이 때밀이 서비스라는 효자상품을 배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라는 희극적 신조어까지도 귀를 즐겁게 했다. 맥 빠져 너부러진 기업들이 그것에서 희망을 찾고 재기하자 함빡 마음을 빼앗겼다. 이름 하여 ‘이(e) 비즈니스’다 깃발을 휘두르며 벤처가 살길이다 외치기만 하면, 기업의 도사이건 시중의 아마추어이건 하루아침에 맹신자가 되었다.
가장 풍요롭고 가장 첨단적이라는 테헤란로에 ‘벤처벨리’라는 성채가 급조되었으며, 거기 성공의 신전에 모셔진 우상의 신도가 되려는 미래 기업가와 성공을 열망하는 인재들의 엑서더스가 시작됐다. 정부와 관리들은 벤처 열기를 고무시키고자 요란스럽게 나팔을 불어댔고, 일일투자자들은 알밤을 줍자 몰렸으며 ‘테헤란벨리’는 선민의 땅, 성공의 요람으로 둔갑했다.
테헤란벨리, 거긴 한국의 실리콘밸리고 신 패러다임으로 무장한 미래 기업가들의 위대한 창조의 장이라 했다. 거긴 늘 열정과 희망이 넘치는 불야성이었고, 먹지 않아도 공연히 배가 부른 신바람 나는 약속의 땅이라 했다. 누구도 거기가 바벨탑처럼 조만간에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가 본시 창조적 도전보다는 안일에 안주하는 부자들의 고장이고 주지육림의 쾌락이 질탕한 곳임을 개의치 않았다.
저들의 행진이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노도와 같았던지 여간한 용기와 소신을 갖지 않고서는 저들의 헛됨과 실패를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렇게 벤처 열풍은 빠르게 번졌으며, 그것은 여러 가지 모양의 모래성을 만들었다. 전시행정에 이골이 난 정부기관이 경쟁적으로 벤처지원 천사로 나섰는가 하면, 이미 운영 중인 산학협동 시스템과 별도로 대학에다 보육분야에 대한 특화도 안 된 창업보육센터를 연간 수십 개씩 설립했다.
코스닥 시장이 급조됐고, 수익모델을 검증도 받지 않은 어중이떠중이 벤처 기업들이 마치 신흥개발지역에 몰려드는 땅 투기꾼처럼 진을 치고는 부끄러운 짓거리들을 벌였다. 에인절(개인벤처투자가)의 탄생과 활동의 터전은 말할 수 없이 척박했고, 장기적인 연구개발을 진작시킬 정부의 벤처투자전략은 허술했다. 창업보육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위임받은 대학 캠퍼스에는 구호만 요란했지 교수들의 관심과 참여 같은 실제적인 창업 열기는 뜨거워지지 않았다.
그러구러 이 년여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열병 징후가 나타났다.
망해서 테헤란벨리를 떠났거나, 창업 초기에 유행하는 고사枯死 병으로 쓰러진 벤처 기업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났다. 코스닥 시장은 사기와 도덕적 해이로 난장판이 되었고 심한 몸살을 앓았다. 실망한 인재들은 벤처 산실을 헌신짝처럼 버렸으며, 시중에 넘쳐흘렀던 벤처에 대한 관심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저토록 우리의 짧은 벤처개척 역사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개척과정에서 그런 시행착오를 겪고 상처를 입기 마련이라는 건 상식이다. 그럼에도, 남이 조롱할 정도로 거기에 한심스러운 거품이 끼고 모두가 비이성적 흥분에 놀아났던 것은, 전적으로 정부의 허술한 정책과 벤처 기업인들의 잘못된 의식 탓이다. 벤처 역사가 한 세기 가까이 되는 선진국을 벤치마킹해서 철두철미하게 준비하고 시작해도 그 성공률이 10 퍼센트 미만이라는 사실을 우린 부슨 배포가 그리도 컸든지 모두가 대수롭잖게 여겼든 것이다.
미국이 벤처 강국인 것은 제조업이 그 모태요 그 기반이 견실하기 때문이다. 제조업이 국내 고용의 받침대며 경제호황의 견인차일 정도로 저들의 고용과 성장에 대한 기여도는 타 업종에 비해 여전히 높다. 산업발전에 있어 저들 제조업이 선두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데는 평범하나 매우 귀중한 이유가 있다.
저들은 경영혁신에 있어 항상 앞서 갔으며 기술혁신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세계시장을 상대로 경쟁을 함에 있어 저들이 늘 강자요 선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든 게 다 그런 데 연유한다. 때문에 우리처럼 시장 장악에 급급해 턱없이 밑지는 장사를 할 필요가 없으며, 핵심기술을 도입하거나 핵심기술부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식의 수출드라이브정책을 무리하게 펼 필요도 없다.
그만큼 연구개발에 대한 기반이 탄탄하게 구축돼 있고 투자 또한 장기 비전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한 풍토란 하루아침에 조성된 것도 아니며 정부가 주도해 추진된 것도 아니다. 그 에너지란 부단히 개선되는 산업 인프라와 알찬 기초과학 교육에서 샘솟는 것이다. 활동 중인 연구소가 자그만 치 2만 기천 개나 된다는 것은 미국이 두뇌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게 당연하다는 단적인 증거다.
저들에게는 갑작스러운 벤처 열풍이 불지 않는다. 실리콘밸리가 한 세기 가까이 벤처 요람으로 발전하는 동안 제조업은 세계 일등 가는 기업으로 발전했고, 성공률이 30 퍼센트를 넘지 못해도 연간 수십만 개씩 창업이 될 정도로 창업 풍토는 비옥해져 왔다. 그런 풍토에서 경쟁하여 살아남은 기업들이 강하고 부자가 되며 국제경쟁에서 우위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저들이 고수하고 자긍심을 갖는 이른바 미국식 경영이 다 그런 데서 연유하고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처럼 ‘오, 벤처!’하고 든 데 없이 들떴다가 곧 허무하게 ‘어, 벤처!’ 망쳤다며 후회하고 머쓱하게 주저앉는 의식과 경영 풍토로는 이 무한경쟁시대에 설사 살아남는다 해도 종살이 신세를 면키 어렵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