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청계천 7가 평화 시장.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를 열사로 불렀다. 더러는 '인간 예수'라고 했다. 바로 전태일이다. 하도 많이 읽어 누더기가 된 근로기준법 책자가 손에 들려 있었다. 스물두 살 젊은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평화 시장의 노동 현실은 비참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일요 근무는 예사였고 만성 신경통과 피부병, 위장병에 시달렸다. 잠이 안 오는 주사를 맞고 야근을 한 끝에 돌아오는 급여는 커피 한 잔 값인 70원. 열악한 환경 속에 소년 전태일은 서서히 눈을 뜬다. 스스로 근로기준법을 공부해 어린 봉제공을 도와가던 재단사 전태일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전태일의 요구는 노동 시간을 하루 10~12시간으로 단축하고 일요일을 쉬며 건강 진단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태웠다.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노동 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듬해인 1971년 발생한 노사 분규가 1,656건. 전년의 165건보다 10배가 많았다. 대학가에도 영향을 미쳐 노학(勞學) 연대 투쟁은 1970년대 전체를 관통한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남긴 《전태일 평전》은 대학 새내기의 필독서였다. 50년 전 오늘.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기 위해 평화 시장 앞에서 웅성거릴 즈음, 전태일은 몸에 불을 붙인 채 피맺힌 절규를 쏟아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리고 밤 10시, 명동 성모병원에서 어머니 이소선 씨 품에 안긴 전태일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배가 고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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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영래가 쓴 부분은 갈색, 전태일의 유고에서 인용한 부분은 파란색으로 표시했다. 전태일, 조영래, 두 사람 모두 내가 감히 뭐라 코멘트 남기기에는 너무도 훌륭한 분들이라, 내 말은 최소로 줄인다.
한 달 월급은 1,500원이었다. 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50원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고 고파 울고 있을지도 무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되지 않았다. (87)
전태일이 처음 시다 생활을 할 때 기록이다. 투잡 쓰리잡 영끌 빚투 2020년.
우선 노임 지불제도를 보면 미싱사, 미싱보조, 견습공의 경우 대부분이 정액 월급제가 아니라 작업량에 따라(예컨대 1매당 얼마라는 식으로) 지불되는 도급제다. 따라서 견습공과 미싱보조의 임금은 업주가 직접 지불하지 않고 오야미싱사가 지불하게 되는데 이것은 근로기준법 상의 임금직불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이에 의하여 견습공과 보조공의 저임금이 합리화되고 있다. (97-98)
파견노동, 하청, 아웃소싱. 사람들은 갈수록 똑똑해진다.
또 비철의 경우 일감이 적을 때라도 노동자들은 언제 무슨 일이 주어질지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작업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하다못해 주인의 잔심부름이나 청소 따위의 일까지 하게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보수가 지급되지 아니한다. (98)
식당 문 열기 전에 청소하고 준비하는 시간도 엄연히 근로 시간입니다. 그런데 시급은?
실제의 나는 일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 육신이 일을 하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육감과 이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 긋고 나라시가 되고, 다 되면 또 재단기계를 잡고 그은 금대로 자르는 것이다. 누가 잘랐을까? 어렇게 생각이 갈때에는 역시 내가 잘랐다.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렴풋이 생각이 확실해질 때는 퇴근시간이 다 될 때이다. 세면을 하고 외출복으로 바꿔 입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오면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밥을 먹고 몇 마디 지껄이다가 드러누우면 그걸로 하루가 끝나는 것이다. (123)
1967년 3월의 일기. 개인적으로 이 책 [ 전태일 평전 ]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사회는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되찾으려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조소를 던지고 그들을 바보라고 낙인찍는다. 노예사회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비정상적으로 취급한다. (156)
2020년에도 그러하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릴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209)
1969년 12월을 전후하여 쓰여진 글여러분, 오늘날 여러분이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여기에는 숨은 희생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212)
1969년 12월 전후에 쓰여진 글.
최근 어느 재벌 회장의 사망으로 인해 그의 공과 과를 두고 논쟁이 있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이 지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백혈병으로 쓰러진 그 회사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에 대해선 그 누구도 관심이 없는 듯.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237-38)
1970년 8월 9일
평소에는 쓰레기 취급을 당하던 밑바닥 인생들도 선거철만 되면 “존경하는 유권자 여러분!”의 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사람대접을 받고 활개를 펼 수 있다. 선거 때마다 판잣집 철거가 중단되고, 곳곳에 새 판자촌이 생기고, 취로사업이 확장되고, 밀린 노임이 청산되고, 농협 융자금이 풍성해지고 하는 것은 다 그 때문이다. [ . . . ] 이것이 바로 1971년도까지의 한국 정치계절 풍경도였다. (277)
2020년 4월에도 봤던 광경이다.
한마디를 하고는 손을 내밀려는 듯 몸을 움칫하다 되려 잠잠해지며,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하였다.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달라는 아들의 이 한마디는 어머니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어 박혔다. 입술을 깨물며 그 말을 되새기면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약속했다.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305)
전태일의 어머니가 그 후 어떤 일을 하셨는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이소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컨퍼런스 서울 2020 이 10월 31일 오후 2시에 온라인 행사로 진행됩니다. 이소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소선 (李小仙, 1929년 12월 30일 ~ 2011년 9월 3일 )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이자 민주화 운동가이다. 1970년 11월 13일 아들인 전태일 이 평화시장 노동 조건 향상을 위해 활동하다 분신하자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노동운동가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대해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다. [1] 민주화 운동 중에 희생된 사람들의 가족 모임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를 만들고...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하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領域)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指環, 金力을 뜻함)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야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기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308-09)
전태일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했던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중학교 다닐 시기를 놓친 사람들을 위한 1-3년제 각종 학교이고 학력은 비인정—시절의 동창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남긴 유언.
조정래.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 전태일, 2009.
부탁하나 드릴께요. 혹시 자신이 이용하는 도서관에서 아직 [ 전태일 평전 ]이 비치되어있지 않다면,
이 땅의 모든 전태일, 그리고 자라나는 전태일들이 당당하고 행복했으면 합니다. 아니, 바로 우리가 전태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