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우당(錄雨堂)을 아십니까?
땅 끝 마을로 더 잘 알려진 전라남도 해남 땅, 해남을 대표하는 두륜산 줄기에서 뻗어나 400m 높이 덕음산 아래 약 350년 전에 건립된 60여칸의 반듯한 기와집이 한 무리 터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남도의 명문가로 소문난 해남윤씨 종가(宗家)집입니다. 당대 재상출신이며 문장가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자택이기도합니다. 원래 해남윤씨가 해남지방 토호(土豪)로서 터를 이루고 살았으며 고산은 부모님 덕분에 한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628년 42세 나이로 세자(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스승이 되었던 인연으로 효종은 즉위 한 뒤 은혜에 보답고자 수원에 집을 한 채 지어 주었습니다. 1660년 효종이 죽자 고산은 낙향하며 그 집을 해남으로 옮겨왔습니다. 임금께서 하사하신 집은 남에게 팔거나 빈집으로 둘 수 없는 당시 사회관습 때문에 머나먼 해남 땅으로 옮겨지었답니다. 건물 뒷편으로 자리 잡은 덕음산 자락에 수령이 500년쯤으로 추정되는 비자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습니다.
우거진 비자나무가 한줄기 바람이 불때마다 마치 장대비가 쏟아지는 듯 쏴아 하는 소리에 사랑채에 녹우당이라는 현판을 걸었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건물일체를 녹우당으로 알고 그렇게 부르지만 원래는 사랑채 이름만 녹우당 이랍니다. 천연기념물 제241호로 지정된 비자나무 숲이 일설에는 젊은 시절 고산이 직접 심었다고도 하고 뒷산 바위가 보이면 동네가 가난해 진다는 조상의 유언에 따라 윤씨 가문과 마을 사람들이 심어 가꾸었다고 전해집니다.
수원에 있던 건물은 천리가 넘는 먼 곳으로 옮겨 녹우당을 완공했으나 고산은 완공 3년 후 은둔 생활을 햇던 보길도 부용동(芙蓉洞), 낙서재(樂書에齊)에서 85세로 생을 마쳤습니다. 세자의 스승이 될 만큼 학식이 뛰어나 한때는 인조의 신임을 받았지만 타협을 모르는 곧은 성품 때문에 평생 유배생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3대 시가인(詩歌人)으로 꼽히는 그의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한 시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산 윤선도를 비롯해 공제(恭齋) 윤두서(尹斗緖) 같은 재상을 배출한 해남윤씨, 당시에는 하늘에 날던 새도 떨어뜨릴 권문세가였지만 관습의 체통 때문에 녹우당에는 가슴이 아리도록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답니다. 유학(儒學)의 일부종사(一夫從事)가 미덕이라는 관습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홀로된 여인이 수절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답니다. 수절로 생을 마치면 조정이 앞장서 절개를 치하하고 열녀문을 세웠으니 천민인들 명예롭기 싫었겠습니까?
그로 인해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자 정부는 재혼을 적극 권장하고 각 고을 수령들이 앞장서 재혼을 장려했지만 평민들한테나 해당되는 경우였습니다. 오죽했으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 애민(愛民)편에 “목민관은 합독이라 하여 홀아비와 과부를 재혼 시키는 일에 적극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겠습니까? 가문을 중히 여기는 사대부나 양반가에서는 정혼을 한 뒤 신랑 될 이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 결혼식조차 없는 시집을 가야 했습니다.
흔치는 않았지만 기막힌 상황이 벌어져 남편 없는 시집의 귀신이 되어야 하는 불운한 여인네들을 일컬어 까막과부 또는 망문과부(望門寡婦)라 불렀답니다. 첫날밤은 고사하고 신랑의 얼굴조차도 한번 보지 못한 처지에 부모님들의 약속 때문에 청상과부로 늙어야 하는 운 없는 양갓집 처자의 슬픈 삶을 어찌 범부의 졸필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 선조시절 남도지방의 명문가 중의 명문가인 해남윤씨 집안에서 한바탕 때 아닌 소동이 한바탕 일어났습니다. 윤선도의 후손부(後孫婦) 가운데 어느 처자가 불의에 사고로 사망한 얼굴도 본적 없는 정혼자 집으로 장례를 치르러 가야할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남편 잡아먹은 액살(厄煞) 낀 여인으로 낙인 찍혀 온갖 수난에 고초를 겪으며 평생을 청상과부로 살아야 했으니 당사자가 가마 안에서 목을 메는 자살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없어 반 쯤 넋이 빠진 상태로 하염없이 울고 있는 조카딸의 손을 잡고 달래는 당숙의 말이 “네가 시집에서 정히 못살겠으면 내가 너한테 잠자듯이 죽을 수 있는 약을 꼭 구해다 줄 것이니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협박 같은 위로와 아씨를 잘 모시라는 불호령에 어느새 가마는 시댁에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가문의 체면을 중시하던 관습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딸자식의 꽃다운 청춘을 짓밟아야만 했습니다.
평생 동안 뼈를 깎는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할 당사자야 무슨 말로 표현 할까만 피눈물을 흘리며 아득히 멀어져 가는 가마 행렬을 선돌 위 기둥을 붙잡고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아비의 심정을 무슨 말로 표현하루 수 있겠습니까? 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고관대작 양반가도 말 못할 그런 기막힌 사연을 숨기고 살아야 했답니다. [이 승 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