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중반이 되고 보니 하루 전 주고받은 이야기도 희미해져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이재명 경기지사와 주고받은 이야기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고 잊혀지지 않는다.
1987년 나는 안동병원 사업과장을 하면서 모교 삼계초등학교 총동창회장을 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삼계초등학교 19회 졸업생 후배가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에 시보검사로 교육받고 있다고 하였다.
그때 사법고시 합격은 하늘에 별 따기보다 힘들었다.
또한 우리 고향 시골, 열악한 환경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정말 나도 모르게 나의 어깨가 으쓱하였다.
후배이기도 하지만 나와는 좀 가까운 인연이었다.
살펴보니 고향 오지마을 도촌동 지통마을에서 초등학교까지 거리는 1.5km 되는데 걸어 다니면서 찌는 가난 속에 어렵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3살에 아버지가 계시는 성남시로 갔다.
아버지는 새벽 3시 추운 겨울에 쓰레기 청소 리어카를 몰고 일하는데 이재명이는 리어카 뒤를 밀어주고, 낮에는 열악한 환경 유해업소 가내공장에서 일을 하였다고 하였다. 효자였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경야독을 하여 작심100일만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합격, 이어서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대학교 수능시험 300점 만점에 286점으로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중앙대학교 법학과 장학생으로 졸업하면서 단번에 사법고시를 우수성적으로 합격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나이가 23살.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말 장하고 장한 후배였다.
그때 시보검사만 해도 일반 사람들과 만나기 힘들었다.
마침 그때 나는 초등학교 총동창회장, 안동병원과장 신분으로 연락되어 만나게 되었다.
장소는 도립 안동의료원 앞골목 신흥옥식당이었다.
때는 봄인지 날짜와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직전 총동창회장 강구섭 선배와 누군가 2사람 있었는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서로 반갑게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나보다는 16년 아래이고 후배지만 검사시보란 직책이 말을 놓을 수가 없고, 축하하네 장하네 고향의 영광일세 하면서 한가를 하였다.
만찬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침 그때 내 초등학교 친한 친구가 고향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돈을 좀 모았는데 도박꾼, 노름꾼들 꾐에 빠져 돈 잃고 바보같이 덮어쓰고 풍산교도소에 가 있었다.
친구 사정을 조심스럽게 꺼내서 도움을 요청했다. 이야기도 끝나기 전에 대뜸하는 답변이 제가 지금 봐 줄수도 없지만 그 선배 노력하지 않고 공짜로 남의 돈 먹으려고 무릎 시파래이 닳아가면서 흑심 먹은 마음 평생 못 고칩니다. 고생해야 합니다. 고생해도 잘 못고칩니다. 매정하게 하는 말에 서운했지만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저가 지금 어떻게 살아왔는데, 저가 복싱은 하지 않지만 복싱도장 링에서 상대와 대결한다면 넘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정신을 잃지 않는 한 항복하지 않고 링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한다면 합니다는 말과 모습에서 강하게 느끼게 하였다.
서스럼없이 하는 이야기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느껴지면서 내가 조금전 했는 이야기가 부끄럽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하기만 하였다.
그 이후로 수차례 만나면서 후배에게 나누는 이야기는 정직하고 진실된 이야기만 하고 부당한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나의 마음 속에 심어주었다.
나는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주고 받은 이야기는 거의 다 잊어버렸는데 34년 전 후배와 처음 만나서 나눈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떠오르는 연유는 무엇일까?
아마 후배가 유명해져서 그럴까도 생각해보지만 그보다는 후배가 한 이야기가 정의롭고, 정당한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그래서 지금도 온국민에게 후배가 전하는 메시지를 믿으면서 옳고 바른 정당한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아울러 선생님들이, 어른들이 제자와 아랫사람에게 옳고 정당한 이야기를 가르치고 전한다면, 정말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 믿어지면서 후배를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