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설립’ 통치기반 확고히 다져
정조(正祖)는 조선 제22대왕(1777년∼1800년)으로 조부(祖父)인 영조(英祖)와 함께 조선 후기 사회 전반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성군 중의 하나이다. 영조 28년인 1752년 출생하여 49세의 나이인 정조 24년 6월인 1800년 붕어(崩御)했다.
정조의 통치시절은 한마디로 말해 ‘조선의 르네상스기’였다. 정조가 설립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은 정조의 개혁정책과 조선 후기 문화발달에 기폭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이곳에서 정조는 ‘우문지치(右文之治, 학문 중심의 정치), 작성지화(作成之化, 만들어냄으로써 발전을 꾀함)’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며 문화정치를 본격 추진하고 인재 양성을 꾀하였다.
‘우문지치’의 기치 아래 서적 간행에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임진자(壬辰字)·정유자(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등을 새로 만들어 다수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특히 ‘작성지화’라는 명분아래 인재를 모으고, 젊은 문신들을 대거 선발하고 교육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친위세력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정조는 지방인재 선발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당시 정국이 주로 서울 세력을 중심으로 주도되는 것을 혁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각 지역에 측근들을 파견해 과거를 시험보고, 여러 책자를 간행하였다.
이렇듯, 정조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극력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논리적으로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의 총애를 빙자해 세도정치를 자행하던 홍국영마저 축출해 노심초사 친정체제의 대결실을 맺는다.
新탕평책 이끌고 ‘정권안정 일궈’
만고풍상을 겪고 집권한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당쟁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으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 정비의 지속적 혁신을 위해 영조의 국정 이념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정조는 탕평책 기치의 힘찬 전진을 위해 이른바 청류(淸流) 세력들을 끌어들였다. 영조 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노론의 우위를 주장하는 척신(戚臣, 외척에 의해 주도된 정치형태) 세력과 이들을 타파하려는 노선인 청류를 자처하는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척신 세력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조정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이른바 ‘신탕평책’(新蕩平策)을 펼치었는데,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남인 세력까지 등용하여 정치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정적이었다고 말해지는 벽파 세력까지도 협력 세력으로 포섭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노론이 완강하게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조는 이런 탕평책의 추진과정에서 정권 수호의 물리력 확보를 목적으로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였다.
‘화성 신도시’ 개혁정치 실험무대
정조가 추진한 개혁의 백미는 신도시 화성(華城·수원)의 건설에 모아진다. 팔달산 기슭에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고 어머니의 회갑연을 화성 행궁에서 열었다. 권신(權臣)들의 뿌리가 굵직한 서울에서 벗어나 신도시 수원을 중심으로 한 혁신적 정치 구상을 도모한 것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단순한 군사적 기능을 수행한 성곽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신이 개혁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연출하는 무대로 삼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부친인 장헌세자의 무덤 이전을 계기로 조성된 계획도시인 화성을 군사와 상업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에 있던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해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가 다시 융릉(隆陵)으로 올렸고, 용주사(龍珠寺)를 세워 원찰(願刹)로 삼았다.
화성 축성 과정에는 가장 선진적 축성 기술을 도입하였는데, 거중기 등 근대적 기술을 이용하여 당시의 발달된 화포에도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하게 성을 쌓았다. 그가 즉위 이후 육성했던 정약용 등 측근세력을 대거 투입하여 이를 주도하였다.
더욱이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국영 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경작을 위한 물의 확보를 위해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선진적 농법 및 농업 경영 방식을 시험적으로 추진하였다.
‘제왕학 확립’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
조선시대 제왕학(帝王學)은 모든 군주가 갖춰야 할 학문을 말한다. 조선시대 군주들의 제왕학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인물의 능력, 민생의 고락을 파악하는 실사구시 학문으로, 학습을 통해 터득한 논리는 정치 현실에서 구현되어야 했다. 이를 통해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실현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조선 시대 원자(元子, 왕의 적장자)나 원손(元孫, 왕세자의 적장자)을 보호 양육하기 위하여 설치한 특별기구인 ‘보양청’(輔養廳)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영조는 보양청 단계에서부터 정조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영조는 1757년 6살인 어린 원손을 불러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암송하게 하였고, 이듬해 경연자리에는 원손을 불러 ‘소학’(小學)을 외우게 함으로써 학습 정진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수시로 정조를 데리고 경연에 참석하여 신하들과 토론에 열중하였다.
정조는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책 10갑에 달하는 그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가 간행되었다. 정조에게는 굳건한 학문적 토대가 내재되었기에 스스로 임금이자 스승인 ‘군사(君師)’로 자부하고 신하들을 무난하게 친히 영도할 수 있었다.
정조는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등 수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은 1785년(정조 9년)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그 뒤의 법령을 통합해 편찬한 6권 5책의 통일 법전이며, ‘동문휘고’(同文彙考)는 대청(對淸) 및 대일(對日) 관계의 교섭 문서를 집대성한 책이다.
탁지지(度支志)는 정조의 명에 따라 호조(戶曹)의 모든 사례를 정리하여 편찬한 책이다. 호조(戶曹)는 조선시대 육조(六曹)의 하나로서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錢糧)·식화(食貨)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한편, 정조는 문화의 저변확산뿐만 아니라 문화의 대통합을 꾀해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을 적극 지원하였다. 위항문학은 중인·서얼·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주도된 문학으로 여항문학(閭巷文學)·중인문학(中人文學)·서리문학(胥吏文學)으로 일컫는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실학(實學) 발달’
특히 정조 시대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인 실학 연구가 발달하였다.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이라는 뜻인 실학(實學)은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후기 사회에서 나타났던 새로운 사상으로서 ‘유학의 전통에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헛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과 대립된 말로 폭넓게 쓰여 왔다.
실학에서 중농학파(重農學派), 중상학파(重商學派)로 대분(大分) 되는데, ‘중농학파’는 토지개혁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중시한 반면, ‘중상학파’는 상공업 발달을 중시하였다.
중농학파의 대표 인물로는 정약용, 유형원, 이익이 있었으며, 그들의 대표저서에는 정약용(목민심서, 흠흠심서, 여유당전서, 경세유포), 유형원(반계수록, 반계유형원) 그리고 이익(성호사설'이 있다.
중상학파에는 유수원, 박지원, 박제가의 거두가 있으며, 그들의 대표저서에는 유수원의 ‘우수’, 박지원의 ‘열하일기’ 그리고 박제가의 ‘북학의’ 등이 있다.
기득상권의 대붕괴 ‘금난전권’ 폐지
정조가 대업적중 하나로 중·서민 상인의 상업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의 폐지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육의전’(六矣廛, 조선시대 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고 국가 수요품을 조달한 여섯 종류의 큰 상점)을 제외한 일반 시전(市廛)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일반 시전상인들만의 상행위 활동을 배타적으로 용인)을 폐지하여 비시전(非市廛) 상인들의 활동을 용인한 혁명적 상업정책이었다.
‘난전’(亂廛)은 시전(옛날 전통 사회의 성읍(城邑)이나 도시에 있던 상설 점)에서 취급하는 물종과 상인의 주소, 성명을 등록한 행위자의 대장)에 등록되지 않거나, 허가된 상품 이외의 것을 몰래 파는 행위 또는 가게를 말한다. 조선후기 난전의 등장은 어용상인인 시전상인의 상권을 침해하였고, 이에 시전상인은 자신의 상업적 특권을 유지·보호하려고 난전 금지를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재정수입을 늘릴 목적에서 국역을 부담하는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에게 서울 도성 안과 도성 아래 십리 이내의 지역에서 난전의 활동을 규제하고,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권을 지킬 수 있도록 ‘금난전권’을 부여하여 난전을 강력히 단속했다.
금난전권은 시전 측으로서는 새로이 성장하는 비시전계 상인인 난전 또는 사상(私商)과의 경쟁을 배제하고 이윤을 독점할 수 있고, 그것을 인정한 정부로서는 이를 통해 상업계에 대한 파악도를 높이고 특정상인의 자본을 육성함으로써 세수입을 증대시키는 방책이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자유 상인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이들은 끊임없이 금난전권의 폐지와 자유로운 상행위의 보장을 요구했다. 또한 금난전권을 이용한 시전의 봉건적 독점상업은 영세 상인들과 도시의 빈민층으로부터도 강한 반발을 받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금난전권의 폐지 여부를 둘러싼 논의가 계속 되었다.
결국 1791년 정조는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蔡濟恭)의 주장이 받아들여, 6의전 이외의 모든 시전이 갖고 있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으며, 세워진지 30년 미만의 시전들은 철폐되었다.
이는 이제 봉건 정부의 힘으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른 자유상인 층의 성장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어용상인들이 몰락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