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이준화기자] 5.18 학살자 전두환, 노태우 공소시효 만기가 되었다. 5·18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폭탄을 장착한 전투기를 출격 대기 시켰다는 보도가 나왔다. “5·18 직후에 출격 대기명령이 내려졌고, 전투기에 공대지 폭탄을 장착한 채 출격을 준비했다”는 조종사들의 증언을 공개했다. 보도에 따르면 수원 비행단 외에 광주와 김해, 성남, 사천 비행장에서도 광주 출격을 준비 중이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전투기 출격 대기는 20사단의 시내 진입이 어려워진 1980년 5월 21일 오전 10시로 헬기 투입 작전 대기 시간과 일치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보도 이틀 뒤인 8월 23일 특별조사를 지시했다. 문 대통령의 조사 지시로 발포 명령자를 찾아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그러나 전두환씨는 최근 회고록에서까지 발포명령자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두환 신군부가 민간인 지역에 폭탄을 투하하기 위해 전투기 출격 대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로 다시금 5·18 조사와 처벌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1월16일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과 이를 지지했던 시민들을 무참히 살육했던 살인마 전두환, 노태우에게 면죄부를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자 역사적 대전환점이 된 5.18!
당시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이를 결코 묵과할 수 없어 '5.18 특별법 제정 운동'을 벌였다. 매주 수만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종로 한복판을 휘젓고 다니며 5.18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알리기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페퍼포그(최루차)와 백골단이 등장하기도 했고, 대학생들은 쇠파이프를 들고 화염병을 던지기도 했다.
한편에선 대학생들이 '전두환, 노태우 체포조'를 결성하여 연희동 전두환 집 진격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100명으로 구성된 체포조는 경찰과 육박전을 벌이기도 하고, 쇠사슬 연좌투쟁을 벌이기도 하면서 강도 높은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매일 20여명씩 경찰서에 끌려가 구류를 살다나오는 것은 부지기수였으며, 경찰로부터 폭행을 당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본 기자도 전두환, 노태우 체포조의 일원이었다.
대학생, 시민들, 재야단체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결국 5.18 특별법은 제정되었고, 결국 전두환, 노태우는 철창행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 (아쉽지만 김대중 대통령때 사면이 되서 다시 풀려나오게 되었다. 두고두고 천추의 한이 된 일이다.)
23년전 매일같이 방문했던 연희동 전두환 집을 오늘에서야 다시 방문한다.
아직도 시퍼렇게 두눈 뜨고 살아있는 전두환, 그리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일상을 즐기고 있는 전두환, 재산을 빼돌려 자식과 손주들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상속한 전두환.
23년전에 만났던 이 놈을 오늘 다시 만나러 간다.
오후 4시 연희동 전두환 집 도착.
도착과 동시에 백은종 선생님께서 '내라수괴 전두환', '살인마 전두환'이 적힌 손 피켓을 전두환 집 대문에 붙이고 서울의 소리 기자들이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하자'라는 구호를 외침과 동시에 경호팀들이 수십명이 몰려들었다.
약간의 몸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서도 '살인마 전두환을 처벌하자'는 구호는 멈추지를 않았고 조선 의열단 소속 김태현(매국노 저격수)님은 소리높여 '5.18 학살범 전두환을 처벌하자!'를 외쳤다.
몇몇의 기자들은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담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23년전보다는 훨씬 느슨해진 경호구역이었지만 아직도 학살자 전두환에 대한 경호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국민들의 혈세로 아직도 국민 학살자를 경호해야 하는가?
영화 '1987'을 보면 전두환과 부역자들의 만행이 잘 묘사되어 있다. 어찌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러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인지 일반 시민의 입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1995년과 2018년. 무려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던 청년이 어느새 중년의 아저씨가 됐지만, 전두환에 대한 처벌은 아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더이상 법적 처벌을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민적 처벌이라도 이뤄져야 한다.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처벌이 미진했기에 박근혜, 이명박이라는 귀태가 탄생할 수 있었다'라는 김태현님의 말씀. 우리가 다시 새겨 들어야 하지 않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신채호 선생님의 80여년 전 외침.
우리가 사는 21세기 오늘 그 외침과 당부가 귀에 쟁쟁히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