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육(臘肉)을 아십니까?
먹거리가 풍요로운 요즘 세대의 젊은이야 도통 뭔 소린지 모르는 이야기겠지만 50대 이후는 어린 시절 한겨울이면 눈 덮인 벌판에서 형들을 따라다니며 덧 등을 이용해 꿩 사냥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마당 한쪽에 싸라기 같은 먹이를 뿌린 다음 소쿠리 등으로 참새 잡이 덧을 놓고 밤이면 손전등을 비춰가며 초가집 처마아래 구멍에서 참새를 잡아본 아련한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매년 동짓날이 지나고 세 번째 미일(未日)을 납일(臘日) 또는 지역에 따라 납평(臘平), 가평(嘉平), 가평절(嘉平節), 납향일(臘享日)로 부릅니다. 납육은 납일에 잡은 고기를 일컫는 말로서 즉 납일고기(臘肉)입니다. 이날 잡은 짐승의 고기는 모두 사람에게 이롭지만 특히 참새는 노약자에게 매우 유익다고 믿었답니다. 특히 이날 잡은 참새고기를 어린이가 먹으면 내병성이 강해지고 천연두(마마)에 걸리지 않으며 침을 흘리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에 동지가 지나는 시기가 되면 참새들이 수난을 겪었습니다.
납일이 되면 충청 호남지역에서는 엿(조청)을 고아 만드는 풍속이 있었는데 설탕 같은 당질제품이 없었던 시절 꿀과 엿에서 주로 당분을 취할 수밖에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은 조청과 엿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납일이 길일이라 여기고 이날 만든 엿을 제일 상품으로 쳤으며 ‘납향엿’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납일에 노루나 사슴, 메추라기, 참새 같은 고기들로 만든 전골을 진상하였는데 이름이 ‘납평전골’이랍니다.
1970년대 까지만 하여도 서울 시내에서는 새총(공기총)을 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규정을 이날만큼은 허용하고 참새사냥을 눈감아 주기도 했었답니다. 농촌지역에서는 밤이면 추위를 피해 추녀 밑에 생겨난 구멍 속에 웅크리고 잠든 참새를 손을 넣어 직접 잡거나 새잡이 전용 통발을 대고 장대로 추녀를 두드리면 새들이 놀라 날아오르며 스스로 통발 속으로 들어가 손쉽게 잡는 방법도 있었답니다. 평소에 새들이 많이 모이는 대나무밭에 그물을 둘러쳐놓고 밤이면 대나무를 흔들어 참새를 잡는 등 그 시절의 관습이기도 했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절기 참새는 알곡이 없으므로 먹이가 부족하여 고기 맛이 없다고 생각했는 모양입니다. 가을추수기부터는 알곡 등 풍부해진 먹이 때문에 납일 무렵 참새고기 맛이 최고로 좋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먹어본 사람들 경험담으로 참새고기 맛은 대단히 좋았답니다. 얼마나 맛이 좋았으면 동지 무렵 참새가 소 등에 올라타고 앉아 내 고기 한 점이 네고기 열점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겠습니까?
납일은 대개 음력으로 동짓달이나 섣달에 해당되므로 연말이 되는 시기로 조정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일 년 동안의 나랏일에 대해 조상에게 고하는 제사를 지냈답니다. 일반 백성들도 이때 여러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지나간 한 해 동안의 집안 대소사(大小事)와 농사결과 등을 고하며 남은 한해를 마무리 했답니다. 이렇게 지내는 제사를 납향(臘享)이라 부른답니다. 납향(臘享)이나 납일(臘日)을 쓰는 납(臘)자는 짐승을 사냥한다는 뜻의 렵(獵)자에서 유래된 글자라고 전해지며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이날에 사냥을 하였던 풍속이 있습니다.
정조대왕 치세에 서출이라는 신분을 극복한 북학파 학자이자 발해역사를 정립한 유득공이 저술한 ‘경도잡지’(京都雜志)에 “경기지역 산촌의 군(郡)에서는 예전부터 납향일(臘享日)에 사용할 돼지고기를 공물로 진상하였습니다. 원님들이 산돼지사냥을 위해 주민 동원령을 내리니 상감(정조)께서 옳지 못하다 허락지 아니하고 왕의 직속부대 장용영(將勇營)의 장교들로 하여금 포수들을 데리고 용문산과 축령산으로 가서 잡아다가 바치도록 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자연보호 차원이 아니더라도 참새고기를 먹을 요량으로 잡으러 다니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주말이면 너도나도 각 지역별로 이름난 맛 집을 찾아다니며 산해진미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세상 아닙니까? 겨울철 손을 호호 불며 초가집 처마 밑의 참새 잡이 이야기는 보리밥도 배부르게 먹을 수 없었던 먼 옛날 얘기가 되어 이제는 기억 저만큼 희미해진 추억일 뿐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