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평화협정에 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어떤 협정으로 평화를 보장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인류가 왜 아직도 평화와 전쟁문제로 이렇게 골치를 앓겠는가? 국가안보는 낭만이나 낙관보다는 현실이나 비관이 더욱 필요한 사안일 수 있다.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종전선언 또는 평화선언을 하고 이어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 중이다. 북한이 오랫동안 요구해온 평화협정은 한반도 안정의 메시지이지만 때와 조건을 잘못 선택하면 맹독이 된다. 한반도에 평화적인 여건이 정착하기도 전에 평화협정 체결은 한미연합의 전쟁 수행체제를 와해시키는 재앙적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커서 수영선수가 되길 희망한다면서 세 살 난 아이를 물속에 던져 넣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현재 한반도는 1950년 북한의 침공으로 발생한 한국전쟁 이후 휴전 상태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휴전을 합의한 정전협정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대체해 전쟁을 종식하자는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가 보장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그러나 이를 섣부르게 추진했다가 큰 낭패를 본 사례가 적지 않다. 이 낭패는 다시 전쟁을 유발해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국토 황폐화를 불러왔다.
‘로카르노조약(The Locarno Pact)’이 대표적 낭패 사례다. 1925년 10월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 7개국이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체결한 국지적인 안전보장조약이다. 로카르노조약은 벨기에의 중립, 독일과 프랑스의 불가침을 약속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라인란트에 군대를 배치함으로써 1936년 이 조약을 폐기하였고, 1940년 벨기에와 프랑스를 기습적으로 침공하였다. 뮌헨협정도 마찬가지다. 영국 체임벌린 총리는 1938년의 9월 독일 히틀러와 뮌헨협정을 맺은 뒤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를 달성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속임수였고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73년 1월 베트남의 전쟁 종결과 평화 회복을 위한 파리협정도 실패한 경우다. 파리협정은 정전,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 평화적·단계적 통일 실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협정 체결 2년 뒤 남베트남(월남)은 북베트남(월맹)에 의해 무력으로 정복돼 공산화됐다.
일반적으로 정전협정은 군사령관들이 전쟁을 중지하는 것이다. 이를 정치적으로 결말짓는 방식이 평화협정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과 연합군이 파리 북동쪽 콩피에뉴 숲에 정차된 열차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중지됐다. 이어 이듬해 6월 파리 베르사유조약으로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도 1945년 9월 미주리함 상에서 일본군이 항복한 뒤 1951년 8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해 끝냈다. 그러나 평화협정 없이도 전쟁을 종결한 케이스도 있다. 유럽의 경우 1945년 5월 독일군 참모총장이 항복 서명한 것으로 오늘까지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걸프전(1991)과 이라크전쟁(2003)도 어떤 정치적 협정이 없었다. 국제법학자들도 협정보다는 실질적인 평화상태를 더 중요시하고 있다.
남북 간에 진정한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면 선행돼야 할 과제가 많다. 우선 남북한 관계 설정이다. 남북이 서로 국가로 인정하는 게 통일을 위한 조치다. 그렇지 않으면 남북이 서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고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필수적인 조치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다. 북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다. 북한이 핵무기를 가진 상태에서 평화협정 체결은 언제든 북한의 핵위협으로 평화가 깨질 수 있는 구도다. 더구나 핵무기 없는 한국은 속수무책이다. 북한의 화학무기와 생물학무기의 폐기도 중요하다. 북한은 최대 5000t의 화학무기를 갖고 있다. 이밖에 평양-원산 이남에 70%가 배치된 북한 군사력도 후방으로 물려야 한다. 유엔평화유지군에 의한 평화협정 이행의 감독도 필수다.
이러한 평화적 조건들은 꼭 평화협정을 체결해야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지금이라도 남북기본합의서(1992)에 따라 북한이 노력하면 가능하다. 사실 지금 한반도 안보 불안은 북한의 핵 개발과 적화통일 목표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정부가 생각하는 평화협정의 핵심 내용은 남북한 기본합의서에 모두 포함돼 있다. 남북 간의 상호 인정(제1조), 파괴 및 전복 행위 금지(제4조), 무력 불사용(제9조), 평화적 해결(제10조),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제11조) 등이다. 여기에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1991) 합의도 있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유엔군사령부(UNC)와도 연계돼 있다. 유엔사는 한국전쟁 때 북한을 물리치기 위해 파견된 유엔 회원국 부대들을 통제하기 위해 유엔결의로 설치한 부대다. 때문에 종전이 선언되면 유엔사가 한국에 주둔할 근거가 취약해진다. 현재 유엔군의 규모는 작지만 정전협정 당사자로서 평화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왔다. 북한이 다시 남침하면 별도의 유엔 결의 없이 유엔 회원국들은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매우 유리한 시스템이다. 또 유엔사는 전시임무 수행을 위해 7개의 주일 미군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 과거 공산권에서 유엔사 해체를 집요하게 요구했던 것도 유엔사만 없어지면 한국의 공산화가 쉽다고 봤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한미연합사가 있어서 유엔사가 해체돼도 문제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유엔사와 달리 한미연합사는 한·미가 만든 부대여서 법적 지위가 낮다. 또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 연합사 해체 요구가 나올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내에 전작권 환수를 추진 중이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의 전쟁 억제와 유사시 한국 방어에 관한 미군 책임이 없어진다. 그 후속 조치로 주한미군의 역할과 규모가 축소되고, 결국 철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하지 않았다지만 유엔사와 연합사 해체는 주한미군 철수나 다름없는 효과를 볼 수 있다.
평화협정 체결로 유엔사가 해체되면 비무장지대(DMZ)도 남북한 간의 관리로 전환된다. 그럴 경우 분쟁 발생 때 상황이 악화될 소지가 있고, 협정을 위반해도 중재할 제3자가 없어 상황관리가 곤란해진다. 평화를 보장한다는 평화협정이 되레 한반도 평화 보장의 결정적인 장치를 제거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한반도 적화통일 포기와 핵무기 폐기가 없는 상태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오히려 북한의 남침 야욕을 키울 가능성이 있다. 선행조치 없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마법처럼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가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오늘 정상회담에서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왔던 종전선언 대신 상징적인 평화선언으로 대체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평화는 평화협정이 아니라 이를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과 힘에 의하여 보장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