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미국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달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미정상회담을 위해 사전에 논의하는 차원이었는데요. 김영철 부위원장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가지고 가 트럼프 대통령에 전달했습니다.
18년전, 조명록 당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군 총정치국장(인민군 차수) 역시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해 빌 클린턴 미 전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당시에도 김정일 위원장-클린턴 대통령 간 북미정상회담을 도모했습니다. 조명록 부위원장은 방북 초청이 담긴 친서를 전달했습니다.
2000년과 2018년의 만남은 어떻게 같았고, 달랐을까요? 공항 도착에서부터 떠날 때까지, 미국 정부와 북한의 태도를 비교·대조해서 보여드립니다.
■공항에서부터 ‘특급 의전’, 배웅까지
지난 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김영철 북한 부위원장이 탄 차량에 손을 흔들고 있다. UPI연합뉴스
조명록 부위원장은 2000년 10월9일 오후(현지시간) 워싱턴 근교 댈러스 국제공항에 도착해 국무부 직원의 기내 영접을 받았으며, 특별 셔틀버스를 이용해 공항 귀빈실로 이동했습니다. 조 부위원장의 영접은 찰스 카트먼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와 멜리 멜프렌치 국무부 의전 담당 대사 등이 담당했습니다. 공항 관계자들은 “이러한 대우는 거의 국가 원수급에게나 제공하는 드문 경우”라고 전했습니다.
조 부위원장 일행은 귀빈 주차장에서 다시 승용차 7대에 나눠 타고 경찰차 4대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숙소인 메이플라워 호텔로 향했습니다.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던 웬디 셔먼 대북정책조정관이 도착한 조 부위원장에게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한편 김영철 부위원장은 지난달 30일 뉴욕에 도착할 때 정식 입국 절차를 거치지 않는 ‘특급 대우’를 받았습니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탄 항공기가 도착하자, 검은 세단과 경찰 차량이 계류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경찰 차량이 검은 차량을 에스코트하며 계류장을 빠져나왔습니다. 의전에 특별히 신경을 쓴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1일 오후 김영철 부위원장이 대화를 마치고 백악관을 떠날 때,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집무동 밖으로 나와 배웅을 했습니다. 해외 언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김 부위원장과 미소와 악수를 주고받았으며 호감의 표시로 김 부위원장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측 대표단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과 함께 기념촬영까지 했다고 합니다.
■면담 시간 40분→90분
2000년 10월10일 조명록 부위원장은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과 약 45분 가량 회담을 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국가원수가 아닌 인사가 미 대통령을 1시간 가까이 만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보도했는데요. 이 자리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배석해 미국이 조 부위원장을 사실상 국가원수급으로 대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다음날인 11일 오후 올브라이트 장관이 주최한 만찬에서는 미군 군악대가 ‘아리랑’, ‘반갑습니다’ 등을 연주했습니다.
한편 지난 1일 김영철 부위원장은 이날 오후 1시10분쯤부터 약 90분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8년전의 45분에 비해 두 배 가량 늘어난 회담 시간입니다. NBC뉴스 등 미 언론은 “김 부위원장에게는 우방국 최고위급 외교관에게 주어지는 의전이 펼쳐졌다. 백악관이 거의 모든 면에서 전례 없는 수준으로 김 부위원장을 환영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군복 입고 온 조명록, 양복 입고 온 김영철
조명록 부위원장은 클린턴 대통령과 면담할 때 인민군 군복과 군모를 차려입었습니다. 조 부위원장은 회담 날 아침 백악관에서 5분 거리인 국무부에 들러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만난 뒤 1층 대기실에서 양복을 군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 부위원장은 클린턴 대통령과의 약속 시간에 10여분 지각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날 셔먼 대북정책조정관은 “북한과 미국의 관계개선 노력이 민간뿐 아니라 군부에 의해서도 공유하고 있다는 메시지”라고 설명했지만 부족했습니다. 북미관계의 상징이 될 클린턴 대통령과의 사진 때문에 군복을 입었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었습니다.
18년 뒤 김영철 부위원장은 조명록 부위원장과 달리 정장을 입었습니다. 짙은 감색 양복에 넥타이까지 했습니다. 미 대통령을 만나기 전 굳이 군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를 두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집권 후 군이 아닌 당 중심으로 방향이 전환됐다는 점이 드러난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북측 ‘심기 경호’까지
2000년 조명록 부위원장이 미국에 머물 당시 미 당국은 ‘철통 보안’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외부 노출을 꺼리는 북측을 배려한 처사인데요. 당시 조 부위원장이 워싱턴DC에서 묵었던 르네상스 메이플라워 호텔은 일반 손님의 출입은 제한하지 않았지만 언론의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경호에 신경썼습니다. 북한 측 외교관들 뿐만 아니라 사전 조정을 위해 미리 호텔에 머물고 있던 미 국무부 관리들의 이름도 호텔 숙박자 명단에 남기지 않는 등 까다롭게 관리했습니다.
2018년 만남엔 ‘심기 경호’가 더해졌습니다. 미국은 북측이 거부감을 보이는 인사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회동에서 제외했습니다. 볼턴 보좌관은 ‘선 핵폐기 후 보상’을 주장해, 북한이 담화를 통해 그를 비난한 바 있습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신규 제재를 하지 않겠다고 한 점도 우호적 분위기 조성을 위한 노력으로 읽힙니다.
■‘김정일 친서’와 ‘김정은 친서’에 미 지도자 반응은?
조명록 부위원장과 김영철 부위원장은 각각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클린턴 전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에 전달했습니다.
2000년 당시 셔먼 대북정책조정관은 “클린턴 대통령과 조 부위원장이 처음에는 요점을 정리한 참고자료를 보고 얘기하다가 나중에는 참고자료를 보지 않고 진짜 토론을 벌였다”면서 “훌륭한 출발”이라고 두 사람의 면담을 평가했습니다. 또 셔먼 조정관은 클린턴 대통령이 조 부위원장을 “매우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얘기했다고 전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부위원장이 갖고 온 친서를 열어보기도 전에 ‘특별한 전달’이라며 “아직 읽진 않았지만, 매우 좋고 흥미롭다”고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회담 이후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할 것이라고 확인하는 동시에 종전 선언 문제가 논의될 수도 있다고 밝히며 6·12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2000년에는 북미 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긴 했지만, 미 대선이 닥치며 임기 말이었던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방문 초청에 응하지 못했습니다. 그해 11월 미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가 승리해 클린턴 대통령은 방북 계획을 취소했습니다. 이번 북미정상회담은 18년전부터 시도돼 온 숙원인 셈입니다. 그 결과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습니다.[=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