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발제인(後發制人), 나중에 출발하여 제압한다.
천리마도 피곤하면 보통 말에 뒤지며, 고대의 용사인 맹분(孟賁)도 힘이 빠지면 여자에게 진다. 무릇 열등한 말과 여자는 힘이라는 면에서 천리마나 맹분을 결코 따르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럴 수 있다는 건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늦게 출발하는 조건을 잘 활용하는 덕분이다.
무릇 전투에서 적이 전열을 제대로 정비하여 날카로울 때는 싸우지 말고 단단한 벽처럼 버티고 기다렸다가 그 전열과 기가 쇠퇴한 다음 공격하면 필승이다. 이를 ‘남보다 뒤처졌을 때는 상대가 쇠퇴하기를 기다리는’ 법이라 한다.
‘후발제인’과 ‘선발제인’은 상대되는 개념으로, 정치‧군사적으로 흔히 사용되는 계략이다. 정치 모략을 계획할 때 주동성은 지극히 중요하다. 정치상의 주동성은 정확한 도의(道義)에서 나온다. 상대와 각축을 벌일 때, 적이 먼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은 나중에 나서서 적이 자기를 충분히 들어내면 적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이용하여 민심을 얻음으로써 정치‧도의상 불패의 위치에 올라서는 것이다.
아득한 상고 시대의 헌원씨(軒轅氏)는 판천(阪泉) 전투에서 이 ‘후발제인’의 전략을 사용했다. 당시 헌원씨 부족은 막 유목 경제에서 농업 경제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목 생활에 익숙해 있어 행동이 민첩하고, 먼 길을 출정할 대 소와 양을 끌고 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기에 후방에서 식량 등의 물자를 운반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이 씨족과 맞붙은 유망(揄罔-신농씨(神農氏) 부족의 제8대 왕)이 이끄는 부족은 농업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에 병마가 움직이려면 양식을 먼저 운반해야 했다. 그런데 일단 농작물을 심을 수 없는 유목 지구인황야로 진입하면서 후방으로 부터의 물자 수송이 끊어졌고 ‘적지에서 양식을 얻는다’는 ‘인량우적(因糧于敵)’의 계략도 이런 황야에서는 통할 수 없어 주도권을 잃고 만다.
지략이 뛰어난 헌원씨는 상대의 이러한 약점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기동성 있게 후퇴하는 전술을 운용했다. 그들은 하남(河南-지금의 개봉과 정주 사이)에서 싸우다 물러나고 다시 하북에서 싸우면서 판천(阪泉-지금의 하북성 청원현)까지 후퇴하여, 지형‧생활 조건 등이 자기에게 유리하고 적에게 불리한 장소를 마지막 전투지로 택했다. 헌원씨는 이런 탄탄한 기반 위에서 결전을 벌여 단숨에 승리를 낚아챘다.
기원전 625년, 초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했다. 송은 진(晉)에 구원을 요청했다. 진나라 문공(文公)은 얼마 전 초나라에 굴복한 조(曺)‧위(衛) 두 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송에 대한 초의 포위를 풀기로 했다.
초나라 성왕(成王)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대장 성자옥(成子玉)에게 빨리 송나라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자신만만하고 교만한 성자옥은 송에 대한 진격을 멈춘 후 군대를 진나라 쪽으로 돌려 진격해 들어갔다. 진 문공은 이전에 약속한 대로 세 번 싸움을 피하며 후퇴를 명령하여 성복(城濮)에까지 물러나 주둔했다. 계속 후퇴만 하자 진나라 장수와 병사들은 불만을 품으며 싸우고 싶은 의욕으로 불탔다. 진 문공 중이(重耳)는 강력한 초나라 군대를 맞아 승부를 점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대신 호언(狐偃)은 장수와 병사들에게 조급해 하지 말라며, ‘세 차례 물러나는’ 것은 우선 지난날 우리 왕이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고, 또 초나라군의 예봉을 피해 투지가 느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싸우면 승리하기가 더욱 쉽다고 설득했다. 진나라 군대는 상하 모두가 합심하여 삼엄하게 진을 치고 기다렸다. 장수와 병사들의 드높은 사기는 진 문공의 자신감을 더욱 굳혀주었다.
정자옥은 초나라 군대와 진(陳)‧채(蔡) 두 나라 군대를 셋으로 나눈 뒤 기세 등등하게 호령했다.
“자!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자. 진이 망할 때가 왔다!”
양군은 마침내 서로 대치했다. 여기서 진나라 군은 ‘약한 쪽을 먼저 치고 강한 쪽은 나중에 친다’는 ‘선약후강(先弱後强)’의 전법으로, 먼저 하군(下軍)의 부장 서신(胥臣)으로 하여금 초군의 우익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가도록 했다. 초군의 우익은 진‧채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투력이 비교적 약한 편이었다. 진군의 기‧보병이 벼락처럼 달려들자 진‧채 연합군은 혼비백산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가고 말았다.
진나라 상군(上軍)의 주장 호모(狐毛)는 거짓으로 중군(中軍)을 꾸미고 양면 깃발(당시에는 중군만이 양면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을 치켜든 채 못 이겨 도망가는 척 했다. 하군(下軍)의 주장 난지(欒枝)도 전차 위에 나뭇가지를 얹고 땅에 끌리게 하여 자욱하게 먼지를 내며 도망치는 것처럼 꾸몄다. 초나라 군은 진나라의 장수들이 정말로 못 이겨 도망가는 줄 알고는 수레를 몰아 추격하다가 매복하고 있던 중군(中軍)의 주장 선진(先軫)의 기습으로 병력이 절단 당했다. 좌군도 호모와 호언이 지휘하는 상군에게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 성자옥은 그제 서야 서둘러 병사를 수습하려 했으나 전군은 완전 궤멸되고 말았다. 성자옥은 연곡(連谷-하남성 서화현)까지 물러나 자살했다.
작전 중에 사용하는 ‘후발제인’의 모략은 전략적 각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원래 군사적인 개념이었지만, 역량과 태세라는 방면의 요소를 가짐으로써 정치 방면의 의의도 적지 않게 되었다. 전략상 ‘후발제인’의 정치적 의의는 때때로 군사적 의의보다 크다. 정치상 ‘후발제인’은 민심을 얻고 군중을 동원하고 주위의 동정과 원조를 얻기 쉽다. 동시에 군사상으로는 지구전에 유리한데, 불리한 조건에서 섣부른 결정을 피하여 시간을 벌고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을 창조할 수 있다.
이제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수구적폐세력들의 ‘선발제인(先發制人)’의 중상모략을 위의 ‘후발제인(後發制人)’의 역공逆攻)을 통해 그 실체적 진실을 하나 둘씩 색출하여 의혹의 진상을 밝혀가고 있음은 국가와 도민들을 위해서도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