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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KBS 가요무대 진주시편은 친일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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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KBS 가요무대 진주시편은 친일찬양 방송이나 다름없다.

정병기 기자 입력 2018/10/05 11:49 수정 2018.10.05 12:07
- 친일 행적이 뚜렷한 남인수, 이재호, 손목인 등 진주 출신 친일 음악가들의 작품으로 가요무대를 구성한 것에 개탄한다.

[뉴스프리존,진주=정병기 기자]오는 11일 제주민군복합관광미항(제주해군기지)에서 열리는 ‘2018 대한민국 해군국제관함식’에 참가하는 일본 해상자위대가 함선에 욱일승천기를 게양하겠다고 해 논란이 계속중인 가운데, 친일음악인들을 찬양하는 방송이 송출돼 논란이 일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이하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1일 진주에서 진행된 KBS가요무대 진주시편 방송에 대해 친일찬양 방송이나 다름없었다'는 성명을 4일 발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유에 대해 '친일 행적이 뚜렷한 남인수, 이재호, 손목인 등 진주 출신 친일 음악가들의 작품으로 가요무대를 구성한 것에 개탄한다'면서 '이번 가요무대 진주시편은 진주출신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진주시민의 자부심을 더 높여주고자 하는 의도로 추정되나, 인물과 곡 선택에서 결국은 친일파들을 찬양하는 방송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이어 민족문제 연구소는 '이번 가요무대는 제작자들의 의도와 별개로 친일파들의 곡들을 다수 선정하여 진주를 친일파의 도시로 격하시켜 버렸다'고 덧붙였다.

또 예산을 집행한 진주시에 대해서는 '1. 진주시가 친일미화방송에 지불한 예산은 얼마인가? 2. 진주시는 가요무대의 선곡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가? 3. 진주시를 친일도시로 만든 가요무대에 대한 이후 대책은 무엇인가?'고 공개 질의했다.

지난 1일 방송된 KBS가요무대 진주시편 에서 언급된 남인수, 이재호, 손목인 등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최초부터 등재된 인물들이며, 특히 남인수는 정부에서 발행한 친일파 명부에도 그 이름을 올리고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주시관계자는 시는 예산만 지원할뿐 프로그램 진행에 대해서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남인수 南仁樹│1918∼1962

남인수 南仁樹│1918∼1962 대중가요 가수

1918년 10월 18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강문수(姜文秀)로, 원래 최씨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 이름도 최창수(崔昌洙)였는데 어머니가 강씨 집안으로 개가(改嫁)하면서 강문수로 호적에 올랐다고 한다. 북한 인민배우 최삼숙의 아버지 최창도가 친형이라고도 한다. 1932년에 진주제이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에서 일하면서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도카이(東海)상업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1935년 무렵 중국 군관학교에 갈 목적으로 중국어를 학습했다는 본인의 회고가 있지만 1935년까지의 행적은 대체로 불분명하다. 1935년 말 또는 1936년 초에 시에론(Chieron)레코드사를 직접 찾아가 테스트를 받고 선발되어 1936년 2월에 방송에 출연함으로써 가수활동을 시작했다. 7월에 데뷔곡인 「눈물의 해협」이 실린 음반이 발매되었으나, 다시 오케(Okeh)레코드사로 옮겨 12월에 첫 작품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와 「범벅 서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본명 대신 남인수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1943년까지 오케레코드사 전속으로 130여 곡을 발표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1937년 「물방아 사랑」·「인생극장」, 1938년 「애수의 소야곡」·「꼬집힌 풋사랑」·「청노새 탄식」·「항구마다 괄세더라」·「기로의 황혼」, 1939년 「감격시대」·「안개 낀 상해」, 1940년 「울며 헤진 부산항」·「눈 오는 네온가」·「불어라 쌍고동」, 1941년 「무정천리」·「집 없는 천사」·「인생출발」·「포구의 인사」, 1942년 「낙화유수」·「남매」·「인생선」·「청년고향」, 1943년 「어머님 안심하소서」·「남아일생」·「서귀포 칠십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기로의 황혼」은 ‘치안 방해’라는 이유로 가두연주가 금지되는 처분을 받았다. 음반을 발표하는 동시에 오케레코드사 관련 공연단체인 조선악극단(朝鮮樂劇團)·오케싱잉팀 등에서도 주역으로 활동했고, 음반 제작이 중단된 1944년 이후로는 약초(若草)가극단·남해(南海)이동연예대·신협(新協)악극대 등에 소속되어 무대에서 공연했다.

남인수가 녹음한 군국가요로 현재 확인되는 것은 1942년 「강남(江南)의 나팔수(喇叭手)」(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 음반번호 오케 31085)·「그대와 나」(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 음반번호 오케 31084)·「남쪽의 달밤」(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편곡, 음반번호 오케 31122)·「낭자일기(娘子日記)」(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편곡, 음반번호 오케 31127)·「병원선(病院船)」(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편곡, 음반번호 오케 31097), 1943년 「이천오백만 감격(二千五百萬感激)」(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편곡, 음반번호 오케 31193)·「혈서지원(血書志願)」(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편곡, 음반번호 오케 31193) 등 일곱 곡이다. 「그대와 나」는 1941년에 조선군보도부(朝鮮軍報道部)에서 내선일체와 지원병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그대와 나」(君と僕, 감독 허영)의 주제가로, 영화는 최초의 조선인 지원병 전사자인 이인석(李仁錫) 상등병의 이야기에 착안해 만들어졌다. 제목이 상징하듯이 그대인 일본인과 나인 조선인 사이의 내선일체를 주제로 했다. 「이천오백만 감격」과 「혈서지원」은 ‘조선징병제 실시 축하 기념’으로 만들어져, 조선지원병 실시 기념음반에 수록되었다.

공연 쪽으로는, 1944년 9월 부민관에서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로 열린 「성난 아세아」(怒りの亞細亞)에 출연했다. 「성난 아세아」는 ‘미영격멸(美英擊滅)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연예사가 있은 이래 처음으로 연극인들의 역량을 총집결한 예능제(藝能祭)’였다.

해방 이후에는 한동안 음반 제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대공연 중심으로 활동했다. 남인수는 한 단체에 오래 전속하기보다는 특별출연 형식으로 여러 무대에 섰는데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백두(白頭)악극단, 손목인(孫牧人)악단(조선음악구락부), 악단 제일선(第一線), 은방울쇼(은방울악극단), 제7천국 등의 악극단(악단)에서 활동했다. 1947년부터 음반 제작이 재개되자 고려(高麗)레코드사·오케레코드사 등에서 1947년 「흘러온 남매」, 1948년 「가거라 삼팔선」·「몽고의 밤」 등을 발표했다. 1948년 무렵에는 직접 아세아(Asia)레코드사를 설립해 1949년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음반을 제작·발매했다.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은 1949년에 발매된 「달도 하나 해도 하나」·「여수야화」 등이다. 「여수야화」는 여순사건을 정부 입장과 다른 시각으로 묘사한 탓에 발매 직후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다. 6·25전쟁 기간에는 제주도로 피난을 가서 군예대(軍藝隊) 소속으로 위문공연을 했는데, 이미 1940년부터 지병인 폐결핵으로 무대에서 쓰러지는 일까지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활동과 요양을 반복하는 일이 잦았다. 1953년 이후 오리엔트(Orient)레코드사·유니온(Union)레코드사·유니버살(Universal)레코드사·미도파(美都波)레코드사·빅토리(Victory)레코드사·오아시스(Oasis)레코드사·센츄리(Century)레코드사·킹스타(King Star)레코드사·아세아(Asia)레코드사(남인수가 직접 설립한 아세아레코드와는 다름) 등 여러 음반회사를 통해 1953년 「향수」·「청춘무성」, 1954년 「고향의 그림자」·「고향은 내 사랑」·「이별의 부산정거장」·「기다리겠어요」, 1955년 「청춘고백」, 1956년 「나는 사람이 아니외다」·「추억의 소야곡」, 1957년 「다정도 병이런가」·「무정열차」·「산유화」·「작별」·「오 이 나라 나이팅겔 이효정님」·「어린 결심」, 1960년 「사백 환의 인생비극」·「사월의 깃발」·「무너진 사랑탑」·「울리는 경부선」, 1961년 「눈 감아 드리오리」 등을 발표했다. 1957년 10월에 대한레코드가수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에 취임하고, 1960년 7월에는 ‘4·19혁명의 노래 전국보급 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61년 12월에는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밖에 1960년에 전국공연단체연합회 회장, 1961년에 한국무대예술협의회 이사 등을 맡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7년 가수 인기투표에서 3위로 선정되는 등 사망 직전까지 가수로 활동했다. 1962년 6월 26일 사망했다.

[참고문헌]󰡔東亞日報󰡕 1936.2.14, 1946.2.24, 1957.10.3, 1961.12.20 ; 󰡔朝鮮日報󰡕 1940.6.14, 1960.7.9 ; 󰡔每日新報󰡕 1944.1.26, 12.14, 1945.1.5 ; 󰡔京鄕新聞󰡕 1949.9.3 ; 󰡔韓國日報󰡕 1979.9.21 ; 󰡔新時代󰡕 第4卷 第11號(1944.11) ; 󰡔三千里󰡕 第2卷 第10號(1957.10) ; 󰡔明朗󰡕 第3卷 第3號(1958.3), 第5卷(通卷 54號, 1960.6) ; 󰡔野談과 實話󰡕 第2卷 第4號(1961.4) ; 󰡔韓國演藝大鑑󰡕(1962.12) ; 박찬호(안동림 옮김), 󰡔한국가요사󰡕(1992.2) ; 최창호,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사󰡕(1997.8) ; 김점도 편저, 󰡔유성기음반총람자료집󰡕(2000.8) ; 이준희, 「일제시대 음반검열 연구」, 󰡔韓國文化󰡕 39(2007.6)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조사한 것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자료(제공=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이재호 李在鎬│1919∼1960

이재호 李在鎬│1919∼1960 대중음악 작곡가

1919년 10월 14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삼동(李三同)이며, 이재호 외에 무적인(霧笛人)과 남촌인(南村人)이라는 예명을 썼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1935년에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고등음악학원 예과에 입학했다. 이후 2년 동안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으나 경제적 문제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38년 초에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사로 찾아가 테스트를 받고 준(準)전속작곡가로 채용되었으며, 가을부터 작품이 음반으로 발매되기 시작했다. 그보다 약간 앞선 1938년 7월에 태평(太平)레코드사에서 먼저 음반이 발매된 것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1938년 가을에 태평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겼고, 콜럼비아레코드사와 맺은 계약이 만료되지 않아 1939년부터는 무적인이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1938년 「떠도는 인생」·「망향」·「북국특급」·「항구에서 항구로」, 1939년 「북국 오천키로」·「막간 아가씨」·「필둥 말둥」·「마도로스 수기」·「북방여로」·「주릿대치마」, 1940년 「빛나는 수평선」·「남강의 추억」·「어머님 사랑」·「나그네 설움」·「잘 있거라 항구야」·「한 잔에 한 잔 사랑」·「화물선 사랑」·「불효자는 웁니다」·「번지 없는 주막」·「산 팔자 물 팔자」·「오동동극단」·「갈매기 쌍쌍」·「세세년년」, 1941년 「황하다방(黃河茶房)」·「만포선 길손」·「복지만리」·「대지의 항구」·「망향초 사랑」·「허허바다」·「석유등 길손」·「북지행 삼등실」·「간도선」·「고향 만리 사랑 만리」, 1942년 「사랑」·「꽃마차」, 1943년 「서주(徐州) 소식」·「부녀계도」·「무명초 항구」 등이다. 현재 확인되는 해방 이전 작품은 130여 곡 정도이며, 그 가운데 「눈물의 백년화」(1940년)는 발매금지 처분을 당해 「세세년년」으로 제목을 바꾸고 가사도 손질해야 했다.

이재호가 작곡한 군국가요로 현재 확인되는 것은 1942년 「결전태평양(決戰太平洋)」(반야월 작사, 태성호·태평합창단 노래, 음반번호 태평 KC5024)·「일억 총진군(一億總進軍)」(반야월 작사, 진방남·태평합창단 노래, 음반번호 태평 KC5024)·「조국(祖國)의 아들」(처녀림 작사, 진방남·백난아 노래, 음반번호 태평 KC5027), 1943년 「달 있는 모항(母港)」(처녀림 작사, 이인권 노래, 음반번호 태평 KC5069)·「전선(戰線)의 달」(박향민 작사, 이인권 노래, 음반번호 태평 KC5061)·「천리전장(千里戰場)」(처녀림 작사, 이인권 노래, 음반번호 태평 KC5054) 등 여섯 곡이다. 그 가운데 「조국의 아들」은 ‘지원병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해방 후인 1946년에는 태평악극단을 조직해 공연활동을 했고, 1948년 무렵 대구에서 설립된 오리엔트(Orient)레코드사 전속작곡가로 「귀국선」 등을 음반으로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 모교인 진주중학교에서 음악교사를 맡기도 했으나, 1950년 6·25전쟁 직전에 그만두었다. 전쟁 중이던 1952년에는 ‘이재호와 그 악단’을 조직해 공연활동을 했고, 1953년 이후 영남지역에 설립된 도미도(Domido)레코드사·서라벌레코드사·미도파(美都波)레코드사 등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1956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오아시스(Oasis)레코드사 전속작곡가로 활동했으며,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해방 이후에 발표한 주요 작품으로는 1949년 「귀국선」, 1953년 「물방아 도는 내력」·「향수」, 1954년 「비 내리는 삼랑진」·「홍콩 아가씨」, 1955년 「경상도 아가씨」·「아네모네 탄식」, 1957년 「단장의 미아리고개」·「다정도 병이런가」·「무정열차」·「산유화」·「작별」·「울어라 기타줄」·「산장의 여인」·「사나이 눈물」, 1958년 「고향에 찾아와도」 등이 있다. 이미 1940년대부터 지병으로 폐결핵을 앓아 여러 차례 요양을 하고 한쪽 폐를 잘라내기도 했으나, 1960년 7월 3일 사망했다. 1996년에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東亞日報󰡕 1946.3.14 ; 󰡔民主衆報󰡕 1949.7.29 ; 󰡔嶺南日報󰡕 1952.8.21 ; 󰡔希望󰡕 第6卷 第12號(1956.12) ; 김점도 편, 󰡔이재호 작곡집󰡕 (1996.10) ; 김점도 편저, 󰡔유성기음반총람자료집󰡕(2000.8) ; 󰡔한국가요예술작가연예인 연보󰡕(2004.3) ; 이영미·이준희, 󰡔사의 찬미(외)-근대 대중가요󰡕(2006.9)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조사한 것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자료(제공=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손목인 孫牧人│1913∼1999

손목인 孫牧人│1913∼1999 대중음악 작곡가

1913년 4월 23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손득렬(孫得烈)이다. 손목인 외에 양상포(楊想浦)라는 예명으로 작곡하기도 했고, 이따금 가수로 활동할 때는 손안드레·임원(林園)이라는 예명을 썼다. 1950년대 일본에서 활동할 때에는 구가야마 아키라(久我山明)·스에요시 켄지(末吉賢次)·쓰카사 준키치(司潤吉) 등의 예명을 사용했다. 경성 재동(齋洞)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공업전수학교에 진학했다가 중동(中東)학교로 편입했다. 공업전수학교에 재학하던 1929년 이미 음악회에서 풍금을 연주했고, 중동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2년에 도쿄(東京) 데이코쿠(帝國)음악학교에 입학해 피아노를 전공했다. 1933년 여름방학 때 귀국했다가 오케(Okeh)레코드사를 운영하고 있던 이철(李哲)을 소개받아 대중가요 작곡을 시작했고, 1934년 1월에 첫 작품인 「아침 전주곡」·「스케팅 시대」가 발매되었다. 이후 도쿄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해 학업을 계속했다고 하며, 귀국한 후에는 오케레코드사 전속작곡가로 활동했다. 1937년 6월 콜럼비아(Columbia)레코드사로 잠시 전속을 옮겼다가 오케레코드사로 복귀했고, 1942년에 다시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옮겨 1943년까지 작품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1934년 「이원애곡」·「타향(타향살이)」·「휘파람」, 1935년 「사막의 한」·「목포의 눈물」·「꿈길 천리」, 1936년 「밀월의 대동강」·「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1937년 「짝사랑」·「아시나요」·「해조곡」·「백만 원이 생긴다면」, 1938년 「청노새 탄식」·「바다의 교향시」·「토라진 눈물」, 1939년 「수박행상」, 1940년 「북경의 달밤」, 1942년 「소주 뱃사공」·「뗏목 이천리」, 1943년 「변방야화」 등이 있다. 현재 확인되는 해방 이전 작품은 약 220곡 정도이며, 그 가운데 1938년 「하누님 맙쇼」, 1939년 「편지와 전화」·「겁쟁이 촌처녀」 등은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금지 처분을 받았다. 오케레코드사 전속 당시 조선악극단(朝鮮樂劇團)과 오케싱잉팀 같은 공연단체에서 무대음악가로도 활동했다. 1940년 3월에는 단원 40여 명의 신향(新響)악극단을 직접 조직해 활동했고, 그 외에 유성(流星)연예대 등에서도 음악을 담당했다.

손목인이 작곡한 군국가요로 확인되는 것은 1937년 「총후(銃後)의 기원(祈願)」(이하윤 작사, 오쿠야마 테이키치 편곡, 박세환·정찬주·콜럼비아합창단 노래, 음반번호 콜럼비아 40793), 1943년 「보내는 위문대(慰問袋)」(함경진 작사, 핫토리 료이치 편곡, 이해연 노래, 음반번호 콜럼비아 40911)·「봄날의 화신(花信)」(이가실 작사, 핫토리 료이치 편곡, 옥잠화 노래, 음반번호 콜럼비아 40912)·「참사랑」(이가실 작사, 만조메 타다시 편곡, 옥잠화 노래, 음반번호 콜럼비아 40909) 등 네 곡으로, 모두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으로 있을 때 발표되었다.

공연부문 활동을 보면, 1943년 1월 부민관에서 제일악극대(第一樂劇隊)가 공연한 「아세아교향악(亞細亞交響樂)」, 향토악극 「고향」, 방첩(防諜)악극 「간첩은 아직 살아 있다」(間諜未だ死せず) 등을 총지휘했다. 1944년 2월에는 매일신보사가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의 후원으로 조직한 ‘매신산업전사위문격려대(每新産業戰士慰問激勵隊)’ 대원이 되어 경인(京仁) 일대 각 군수공장에서 공연했다. 이어서 2월 25일부터 27일까지는 경상남도 진해 등지를 방문해 아코디언 등을 연주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조선음악가협회에 위원으로 참여했고, 1946년에는 해방 이전 조선음악구락부(朝鮮音樂俱樂部 = C.M.C.)악단을 재조직해 이끌었다. 1950년까지 백두(白頭)악극단·수도(首都)악극단·국도(國都)악극단 등에도 참여해 음악을 담당했다.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경음악단이 조직되자 지휘를 맡았고, 그 무렵 방송가요로 「아내의 노래」를 발표해 인기를 모았다. 6·25전쟁 후에는 아리랑악극단·무궁화악극단·현대가극단·백조(白鳥)가극단 등의 공연에 참여하다 1952년 3월에서 7월 사이에 일본으로 밀항했다. 밀항 시기가 1951년 6월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1952년 3월까지는 공연 광고에서 이름이 확인된다. 밀항하기 전에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슈샨보이」는 이후 1954년에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일본에서도 지인(知人)의 주선으로 빅타(Victor)레코드사·데이치쿠(帝蓄)레코드사 등 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대중가요를 작곡해 1952년 「야타로 방랑가」(弥太郞旅唄)·「하와이의 밤」(ハワイの夜), 1953년 「아! 삼팔선」(あゝ三十八度線), 1955년 「가스바의 여인」(カスバの女)·「목포의 눈물」(木浦の淚) 등을 발표했다. 1957년에 불법체류가 적발되어 7월에 귀국했고, 이후 유니버살(Universal)레코드사·아세아(Asia)레코드사·신세기(新世紀)레코드사 등에서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1958년 「눈 내리는 밤」, 1964년 「모녀기타」, 1966년 「아빠의 청춘」 등을 발표했다. 1958년 「눈 내리는 밤」을 시작으로 영화음악도 작곡해 1958년 「지옥화」, 1959년 「타향살이」, 1962년 「여자의 일생」, 1964년 「모녀기타」 등 20여 편의 영화에 제작진으로 참여했다. 1960년 1월 한국영화음악작곡가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64년에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설립을 주도해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1967년에 베트남으로 가서 1968년까지 한국군 위문공연을 했고, 이후 1983년까지 주로 미국과 일본에 거주하며 음악활동을 했다. 1983년에 귀국한 이후 1987년에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일본여행 중이던 1999년 1월 9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참고문헌]󰡔東亞日報󰡕 1922.7.22, 1946.2.24, 1952.8.2, 1957.8.2, 1960.1.29 ;

󰡔朝鮮日報󰡕 1940.6.14, 1945.12.2, 12.26, 1950.4.6, 4.26 ; 󰡔每日申報·每日新報󰡕 1937.6.16, 1941.3.23, 1943.1.16, 1944.2.12, 2.25, 2.27, 1945.6.21 ; 󰡔京城日報󰡕 1943.1.15 ; 󰡔藝術通信󰡕 1945.10.26 ; 󰡔國際新報󰡕 1951.5.6, 8.19, 9.6, 1952.3.29 ; 󰡔韓國演藝大鑑󰡕(1962.12) ; 손목인, 󰡔못다 부른 인생찬가-손목인의 타향살이󰡕(1992.4) ; 김점도 편저, 󰡔유성기음반총람자료집󰡕(2000.8) ; 이준희, 「일제시대 음반검열 연구」, 󰡔韓國文化󰡕 39(2007.6)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조사한 것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자료(제공=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성명서 전문)

성 명 서

2018년 10월 1일 KBS가요무대 진주시편 방송을 개탄(慨歎)한다.

KBS에서 10월 1일 방송 된 가요무대 진주시편은 친일찬양 방송이나 다름없었다. 친일 행적이 뚜렷한 남인수, 이재호, 손목인 등 진주 출신 음악가들의 작품으로 가요무대를 구성한 것에 대해 개탄(慨歎)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사회자가 불세출의 명가수로 소개하며 선생님으로 표현한 남인수는 일제강점기 조선 청년들의 강제 징병에 적극 협조하는 『강남의 나팔수』, 『혈서지원』 등 10여곡의 군국가요를 불러 망국의 조선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보내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또한 백범 김구선생께서 해방과 더불어 반드시 처단해야 할 친일파 200여 명 가운데 한명이기도 한 거물 친일파이다.

작곡가 손목인은 『총후의 기원』, 『보내는 위문대』 등을 작곡하여 일제 찬양과 그들의 전쟁터에 위문품을 보내는데 적극 협조한 작곡가이다.

작곡가 이재호 역시 『결전의 태평양,』 『일억 총진군』, 『조국의 아들』 등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무수한 조선 청년들을 사지로 보내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또한 방송 마지막에 출연 가수가 제창으로 부른 『대지의 항구』는 1941는 발표 될 당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찬양한 곡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있어 금지곡으로까지 지정해야 마땅한 곡이었다.

이번 가요무대 진주시편은 진주출신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진주시민의 자부심을 더 높여주고자 하는 의도로 추정되나, 인물과 곡 선택에서 결국은 친일파들을 찬양하는 방송이 되어버렸다. 이번 가요무대는 제작자들의 의도와 별개로 친일파들의 곡들을 다수 선정하여 진주를 친일파의 도시로 격하시켜 버렸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진주시에 아래의 사항을 공개질의 한다.

1. 진주시가 친일미화방송에 지불한 예산은 얼마인가?

2. 진주시는 가요무대의 선곡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가?

3. 진주시를 친일도시로 만든 가요무대에 대한 이후 대책은 무엇인가?

2018년 10월 4일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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