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이대웅 기자]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25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원한 안식에 당대를 풍미한 ‘영원한 스타’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향년 81살에 폐암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이날 숨을 거뒀다. 고인은 투병 중에도 왕성한 대외 활동을 펼쳤다.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기도 했다.
고 신성일은 1960~197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배우다. 고인의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나 고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사용했으며, 이후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수려한 외모와 지적이고 반항적인 이미지는 그를 당대 최고 청춘스타로 만들었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경북도청 공무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영화 507편의 주연을 맞았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여배우만 119명에 달한다.
어린 시절 그는 빼어난 외모에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둘 만큼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는 대구 수창초등학교, 영덕중을 거쳐 명문 경북고에 합격했다.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고인은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깨지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2학년 때 꿈을 접고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목표로 둔 서울대 상대에 원서를 넣었으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환경 때문에 떨어졌다. 방황하던 신성일은 청계천에서 두세 달 호떡 장사를 했고, 재수를 하던 중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다.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그는 1960년 신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다. 이 드라마에서 고인은 반항아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독보적인 스타로 거듭났다. 고인이 연기한 작품 편수는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떠날 때는 말없이'(1964) '초우'(1966) '별들의 고향'(1974) '겨울 여자'(1977) 등 숱한 히트작을 내놓았다. 고 신성일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1963년 한 해에만 21편에 출연했고, 1964년에는 32편, 1965년 34편, 1966년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는 1967년이다. 당시 그는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했다.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 많은 상을 거머쥐었다.
고인은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만난 배우 엄앵란과 1964년 결혼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000여명이 몰려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영화계의 성공을 계기로 고인은 정계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유족으로 부인 엄앵란 씨와 아들 강석현(51)씨, 딸 강경아(53)·수화(48)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최근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면서, 전날 한때에는 가족이 빈소를 예약했다며 그가 별세했다는 오보가 나오기도 했다. 고인은 오보를 정정한 지 몇 시간 뒤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