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7월 7일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파죽지세로 장개석군대를 중경까지 밀어 내는데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유격대의 끈질긴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은 240만의 정규군과 300만의 예비군, 7500대의 항공기, 230척의 주력함을 보유한 군사대국이다.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병력 150만 명, 항공기1.157대, 수송선 1000만 톤으로 전반적인 군비는 미국이 일본에 비하여 만족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중일전쟁으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중국 북동부는 물론, 태국, 버어마, 필리핀, 슈마트라, 뉴기니, 웨이크 섬을 점령하려고 하였으며 이는 미국과 일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인을 일본인 보다도 더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으로 만들어 징병, 징용 등 조선인을 총알받이로 내몰기 위해 1939년 조선총독부는 개정민사령 <창씨개명>을 발표하여 1940년 2월 11일 까지 조선인 개명을 요구했다. 조선인은 일본인에게 삶의 기반인 농토는 물론이고 우리말과 글<일본어가 국어>, 성과 이름까지 일본에게 빼앗긴 신세로 인간 노예로 살게 된 것이다.
한국의 친일파들 중에는 무조건적으로 일본의 시책을 수용하여 따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창씨개명에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친일파도 있다. 김갑순 조선신문 사장은 “당국에서 창시 개명을 강제하지 않고 또 강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듯하다”고 말했다. 종로경찰서 정부 김형진은 자녀들 교육상 창씨개명이 필요하다면 창씨개명을 할지 모르겠다.”말했다. 대구 지방법원판사 조만진은 창시개명은 신중하게 조치할 사항이라며 신중론을 폈다. 윤치호는 일본이 이루어야할 대제국은 많은 민족들이 구성 되어야 될 것이다. 그들에게 완전히 일본인이 되라 강요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정책이라고 했지만 실은 성과 이름조차 빼앗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조차 없는 자신들의 가련한 신세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제시대에 창씨개명에 반대했다고 해서 그들이 반일감정에서 일본의 창씨개명에 반대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민족의 반역자 친일파에 면죄부를 주고 있고 오랜 기일이 걸리고 국민들의 헌금으로 마련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친일파가 누락되는 일이 발생된 것 같다.
외세에 의하여 분단된 이 나라에서 분단고통을 이루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 땅에서는 친일친미 외세가 판을 치며 민족자주가 씨가 마르고 사대매국은 득세하여 가치의 혼돈과 악순환이 계속되어 이 땅을 지옥화하는 건 아니였는지 지금부터라도 올곧은 역사를 펴야 되지만 역사왜곡으로 곳곳에 친일파의 우상이 서고 길은 험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