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역할이 중요하고 기업에 대한 애증이 큰 만큼 기업에 대한 환상과 오해도 많다. 기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하므로 터무니없는 환상과 오해는 모두에게 해롭다.

세기를 풍미했던 이념에 대한 뿌리 깊은 환상이 무참히 깨졌던 때처럼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기업이 그 방만한 경영 때문에 줄초상을 치르고 있던 외환위기 시절 우리는 심한 혼란에 빠졌었다. 그 맥락에서 이어진 기업에 대한 기대와 실망, 감싸기와 매도 등 애증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본시 기업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실망은 엇갈렸지만 현대 사회의 기업의존도가 여전히 심대함은 변함이 없다. 때문에 이미 들어선 금세기에 새 시대를 리드할 새로운 사조나 새로운 가치가 뚜렷하지 않은 차제에 갈수록 그 비중과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는 기업에 대한 환상이 경계되고 새로운 인식이 올바르게 정립될 필요가 있다.

 기업을 ‘부富의 성城’이라고 여기는 일반적인 인식 속엔 ‘환상적인 그늘’이 짙다.
 기업은 부를 창출해서 나누고 발전을 계속하는 곳이지 누구나 소수를 부자 만들어 주는 데가 아니다. 기업의 장래성이 그 사업규모에 있지 않고 기업이 추구하려는 비전의 가치나 기업 윤리성의 수준에 있는 것처럼 기업이 진짜 부자인가는 전적으로 그 대차대조표에 담긴 경제 가치에 있다.

그것은 경영성과에 따라 매년 변하기 마련이다. 부자 기업으로 장수하며 번성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몸집이 거창하고 겉이 화려할 뿐 속은 거대한 빚에 골병든 속 빈 강정 꼴인 ‘건장한 거지’ 기업도 허다하다. 부자인줄 알았던 재벌이 실은 차입경영으로 연명하는 ‘재벌災閥’이었다는 환멸을 맛보는 경우가 너무나 흔해졌다. 기업은 부자일 것이라는 통념 속에는 그런 환상적인 모순이 숨어 있는 것이다.

기업의 이상이 영속성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전이 뚜렷하지 않은 데도 기업이 ‘영원하리라’ 믿는 것은 ‘불확실한 환상’이기 쉽다.
기업이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체질을 갖추고 섭생경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치 있는 기업가정신으로부터 효율적인 경영조직, 창조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사원, 경쟁력이 높은 제품, 튼튼한 자본력과 시장기반 등에 이르기까지 기업이 다져야 할 기반과 갖춰야 할 요소란 다양하다.

따라서 그것을 유지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세기나 한 세기를 거뜬히 장수하는 기업들은 일단 좋은 기업이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매년 수많은 기업이 탄생하는가 하면 도산한다. 창업 유년기에 쓰러지거나 청년기에 이르기도 전에 요절하는 기업 또한 부지기수다. 인간 수명의 연장이 인간의 숙제인 것처럼 기업의 건강한 장수 또한 중대한 현실과제다. 기업의 영속성을 너무 믿고 무작정 개인의 일생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기업을 요절시키는 장본인인즉 다름 아닌 그 기업의 주인공인 사람들이다. 환상은 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환멸을 윤색해 숨기기 때문에 기업 밖에선 그 더럽고 부도덕하며 허위에 찬 실상을 일 수가 없다.

기업이 ‘도덕적이길’ 기대하고 주문하는 것은 다분히 환상이다.
엄연한 현실인즉 우리네 기업주는 시대를 역행할망정 혈족소유경영으로 기업을 지배하며 치부하기를 탐하는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경유착으로 정치를 부패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중에야 삼수갑산을 갈망정 우선 차지하는 게 임자라는 강자논리를 쫓아 거금을 빚내다 사세 불리기 과잉투자를 예사로 하며 경영이 부실해졌을 때 사회에서 아무리 지탄하는 여론이 비등해도 땀 흘려 일했을 뿐 죄 없는 종업원을 냉혹하게 내쫓는 데 거침이 없다. 유명한 재벌이 탈세를 자행하는 게 한두 해가 아니고 그 규모 또한 천문학적일만큼 도의심이 메말랐으며 탐욕은 바벨탑을 쌓고 있다. 천박한 장사꾼만 넘칠 뿐 존경할만한 기업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한탄은 너무나 귀가 따갑게 들어서 이제 그 심각함을 잊어버릴 지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린 사이비 기업인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막연히 기업이나 기업주한테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길 기대하는 대신에 철저히 감시하고 가능한 모든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기업이 스스로 도덕적이길 바라는 것은 다분히 타성적인 환상에 천착하는 미련일 뿐이다.

기업이 거대할수록 여간해서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한 ‘대마불사大馬不死’통념이 시대착오적인 오해라는 사실은 요즈음 부쩍 자주 눈에 띤다.
부끄럽게도 그런 잘못된 통념이 통했던 것은 순전히 무식한 정치논리 때문이었다.
아마도 시장경제를 배우고 시장원리를 신봉하면서도 그 놈의 ‘사회 안정’을 위해서니 ‘대가 성 없는 정치자금’이니 하며 두둔하고 시늉뿐인 매질만 할뿐, 끼고돌며 온갖 교묘한 명분을 내세워 뒷배를 봐 주는 정치권력 때문에, 도태되어 마땅한 대기업들이 무슨 그룹이네 행세하며 속으로 부실화 병폐를 지겹게도 20세기 말까지나 키워 왔던 것이다.
거대 기업일수록 불경기라는 독감에 걸리기 쉬우며 방만한 경영이라는 에이즈 병균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다. 소기업이나 진실한 기업은 경영난을 호미로 막을 수 있어도 대기업이나 차입경영을 일삼는 기업은 가래로도 그것을 극복하기 어렵다.
 

기업 덩치가 커야 쓰러지지 않는다는 억지는 더 이상 통하기 어렵다. 대마 기업이 부도로 쓰러지면 그건 소기업과 달리 여러 곳에 엄청난 재앙으로 덮친다.

기업한테 ‘투명성’을 기대하는 것은 다분히 일방적인 환상이다.
의심하면서도 기업의 투명성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모순인지 모른다. 예컨대, 지금은 중세 아즈텍 문명이 만든 부강한 나라 멕시코가 스페인 정복자에 대한 어이없는 환상 때문에 망했던 교훈을 기업에 교훈 삼아야 할 때인지 모른다. 간교한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 왕을 기만하기 위해 황금을 약탈하려는 야욕을 숨긴 채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깃발을 대오 선두에 앞세웠다. 그 속임수 깃발 때문에 천주교 신앙이 깊은 멕시코 왕은 어리석게도 침략자가 평화의 사절이라는 환상을 품게 되었고, 능히 막을 수 있는 소수 원정대에게 정복당하는 고래가 새우한테 먹히는 기막힌 망국지변을 자초하게 되었다.

기업이 회계를 투명하게 하고서는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하 기 어려우며 제대로 이익을 내기 어렵다는 게 상식이 될 정도로 기업의 투명성은 왜곡되고 유린된 지 오래다. 매출을 늘려서 기업 평가를 유리하게 조작하고 허위로 비용을 불려서 비자금을 빼내고 이익을 줄여 세금을 포탈하는 부정하고 변칙적인 분식회계를 하는 것은 예사다. 기업의 대외 신인도를 입증하는 경영성적표를 조작하고 거짓되게 꾸며 선의의 투자 주주와 종업원과 국가를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의 투명성에 관한 한 따지고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기업과 도덕적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업주 가운데 정직하고 정의로운 이들이 많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 또한 너무나 많다.

그런 이들이 경영을 독단하여 지배하는 기업에 투명성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환상일지 모른다. 그런 유의 기업인들 가운데 더욱 부도덕한 이들은 자신의 부정한 치부를 숨기기 위해 깨끗해야 할 공직자와 원래 정직했던 인재들을 훔친 돈으로 구어 삶고 사탕발림해서 부패시키는 짓을 예사로 자행한다. 

그러므로 비정부단체들이 기업 투명성을 감시하고 투명하지 못한 경영을 하는 기업을 소비자한테 공개하고 고발하는 등의 감시활동은 중요하다.

우리네 기업 가운데 ‘위대한 기업’을 꿈꾸는 비전을 변함없이 지향하고 있는 기업이 과연 몇이나 되며, ‘존경받는 기업가’가 되려는 이상을 항심으로 품고 실천에 진력하는 기업인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러한 기대가 헛되다.’는 실망감 때문에 맥이 빠져 이 글쓰기를 여러 차례 포기하려 했었다. 그래도 다시 책상 앞으로 다가 앉는 것은 의인 단 열 사람만으로도 소돔 성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다는 역사의 교훈을 떠올려서이며, 보잘것없는 미충微忠이나마 기업 장래에 보탬이 되려는 나의 슬픈 집념 때문이다.

기업에 대한 환상을 버린다 하여 비록 실낱같을지라도 거기에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애정마저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기는 이런 사념思念 또한 내가 이 나이 되도록 버리지 못하는 환상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