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도덕과 의식, 동일성에 반대하고 비도덕, 의식 이전의 충동이나 무의식, 비동일성을 중시한다. 우선, 책을 좀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 도덕이란 결정적 한 번으로 채택된 관습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장치일 뿐이다(p. 22). 우리는 이런 도덕에 맞서 쉼 없는 성찰, 반성에서 나오는 근원적 요구들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충동’에 따라 살아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우리는 충동을 억압하고 의식이 만들어낸 온갖 억압 장치에 따라 자신을 억압하고 산다. 교육과정을 통해 인간은 이렇게 문명화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증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우리는 교육받고 문명인이 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동일한 ‘하나의 주체’(인격체)로 구성한다. 하지만 이렇게 구성된 자기 동일성은 실재일까. 니체에 의하면 그것은 만들어진 동일성일 뿐이다. 니체는 모든 동일성을 부정한다. 니체는 광기에 사로잡히면서 스스로 니체 자신이길 그만두었다(p. 297). 동일성의 부재, 이것이 니체를 광기로 이끌었을까.
‘만들어진 동일성’ 그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충동’이다. 충동은 인간의 삶을 위해 개인화되었으므로 오로지 탈개인화되기만을 갈망한다(p. 51). 한 인간은, 인격은 ‘결정적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다시 표현되는 영원회귀의 체험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체험은 악순환이고 목적과 방향도 없다(p. 54). 니체는 이러한 영원회귀의 체험을 긍정한다.
니체는 주체도 객체도 의지도 목적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p. 66). 우리의 토대에는 카오스와 충동, 무의식만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니체에게 이러한 우리의 조건은 부정적인 게 아니다. 의식과 이성의 감옥에서 벗어나 우리는 카오스와 충동에서 무한히 새롭게 생성될 수 있다. 그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충동이라는 힘의 의지(p. 74)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것은 ‘주체’라는 일체성이 아니라 ‘충동의 투쟁’이라고 말한다(p. 78).
‘나’라는 동일성은 영원회귀가 계시할 때 파괴된다(p. 89). 영원회귀는 하나의 동일성, 정체성을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기, 망각하고 무한히 창조하기를 시도하는(p. 100)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너 자신이기를 그치고 다양한 개인들 모두가 되어야 한다(p. 102). 위버멘쉬는 이러한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의 의미이자 목적에 다른 아니다(p. 103). 영원회귀는 충동이고 창조이며 영속적 동일성의 말소(p. 104)이다. 영원회귀의 힘은 끊임없는 변화하며 균형을 파괴한다. 그래서 니체에게는 개인도 없고 종도 없으며 동일성도 없다(p. 130).
그래서 니체의 영원회귀의 세계에는 교환가능한 것도 없고 우연만 있으며 황홀한 비밀스런 체험이다(p. 131). 초인이 아니고서야 동일성의 초극, ‘모두가 되는’ 경험을 아무나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비밀로 남아 있는 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일상에 영원회귀를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불가능성 앞에서 니체가 광기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영원회귀라는 현기증 앞에서 말이다.
우리의 시각에서 영원회귀는 악순환이고 부조리하다. 그것은 카오스이고 비동일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균형의 파괴이며 초과하는 힘이고 이는 우리를 개인 이상의 존재로 끌어올린다(p. 157). 이 힘은 모든 것을 교환의 원리로 대체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맞설 수 있게 할지 모른다. 이것은 하나의 위험이다. 그리고 영원회귀는, 창조는 위험상태를 유발해야 한다(p. 172).
이 위험은 현실원칙의 중지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위험이다. 현실원칙을 중지하는 유희에 자신을 거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충동의 강도들의 조건들을 자신의 고유한 형상들 안에 복원한다(p. 177). 예술의 충동은 하나의 ‘환영’을 창조한다. 그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실존에 목적을 주는 어떤 존재, 모든 의지의 자유이다(p. 192). 이때의 ‘환영’은 재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을 넘어서고 ‘초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성 질서의 통념이나 지배적 규범 체계와 관습들을 전복시키는 미지의 가능성이며 시인 김수영은 바로 이곳에서만 시의 존재가 있다고 보기도 했다.
(예술적)환영 그리고 충동, 영원회귀는 평균 이상이길 원하고 영원한 낯섦(p. 220)이길 원한다. 광기에 빠져서 니체는 이 환영 속에 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같은 세인들에게 니체의 이러한 사상은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니체가 본 진실, 현실의 균열, 틈, 부조리, 현실의 상처를 애써 회피하고 눈감는 것은 안일한 태도일지 모른다. 그것들은 증상으로 우리에게 언제든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이성이나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에, 충동에, 정서에 호소해야할 지 모른다. 이성의 감옥에서 탈출해서 놀이와 우연의 세계, 영원회귀의 세계, 자유의 세계로 도피해야할 지 모른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어야 할지도 모른다. 결정적 한번으로 삶이 결정되어 꼼짝도 못하는 삶이 아니라 유동하는 삶을 갈망하게 될 지 모른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성과 정신이 아니라 느낌으로 정서로 어떤 것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어떤 예술이나 예술가에게 빠져 허우적 거릴수도 있다.
이런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어떤식으로든 ‘책임’져야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랑하고 예술을 만나고 하는 일은 적당히 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광기에 빠져서 해야 하는 것일까. 니체는 영리하지 못하게 정말 광기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되는 것일까. 라캉은 자신의 박사논문 <개인의 형성에서 가족 콤플렉스>에서 법의 판결이, 그러니까, 상징계의 법과 금지가 개인의 정신병적 정체성 혼돈을 정지시키는지를 증명했다.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위에 의존하는 주체를 만드는 일, 그것은 법의 역할이었다. 법이라는 동일성을 해체하고(법이든 주체이든 해체하고) 기존의 관습과 상식을 깨려고 했던 니체에게는 ‘법’과 ‘아버지’가 힘을 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니체에게, 우리에게 항상 되돌아오는 문제는 상징계의 법이고 아버지다. 여기에 대응하고 저항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광기와 정상 사이, 정상과 정상 ‘사이’를 방황하고 유동하는 것, 그 ‘사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니체와 라캉 사이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닐까. 다른 건 모르겠고 한동안 그 ‘사이’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며 즐길 수는 있을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끝나지 않아도 좋다. 좋은 놀잇감이다. 이 책, 쉬운 책은 아니지만 새해를 맞이하여 일독을 권한다.[= 시대와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