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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형의 기업에세이] 기업에 뿌리 깊은 허구와 모순..
오피니언

[박종형의 기업에세이] 기업에 뿌리 깊은 허구와 모순

박종형 칼럼니스트 기자 입력 2019/02/12 13:18 수정 2019.02.12 13:32

기업은 사회 조직 중에 가장 합리적인 조직이다. 그러나 기업에는 허구와 모순에 찬 우상이 적지 않아서 그 신봉자들 때문에 경영을 망치고 있다.

기업이 우상처럼 숭배하는 ‘성장의 신화’는 허구투성이 이다.

고도성장을 자랑하던 대기업들이 국내외 여기저기서 쓰러지는 사례는 흔하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의 최후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대기업이 너무나 맥없이 망하는 게 어이없고 의아하기조차 하다. 혹시 아이온(영국인 작가 릿튼의《폼페이 최후의 날》소설의 여주인공으로 요승妖僧 아베시즈와 귀족 그로카스가 사랑싸움을 벌인 절세미인)을 탐한 짝사랑 같은 것 때문은 아닌가 모르겠다. 
기업이 아이온 같은 성장에 대한 사련邪戀에 빠져 비극적 최후를 자초했다면 그 ‘성장의 꿈’은 비극의 사단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기업에 있어 최저한도의 성장은 생존의 조건이고 고도의 성장은 발전의 보장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허구에 찬 성장은 오히려 기업을 망치는 독이 될 수 있다. 

고도성장을 했다는 대기업이 시장가치에 있어 밑바닥인 것은 재무구조에 뿌리 깊은 허구성 때문이다. 자금을 그것도 높은 이자의 차입금을 어디에 얼마만큼 투입하는 것이 경제적인가를 따지지 않고, 예컨대, 시장 확대를 위한답시고 무턱대고 외상 매출에 투입해 시장에 깔아 놨다면 그건 스스로 자금난이라는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짓이다.

판매 덩치가 크고 판매경로 조직이 복잡할수록 외상매출금의 회전이 들쭉  날쭉 한데다가 꼬리에 꼬리가 물리기 마련이라서 결국엔 시장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외상 장사에 목을 맬 수밖에 없게 된다. 자금의 조달능력을 생각지 않고 무작정 시장수요를 탐내 쫓으면 결국 자금난을 불러 대기업일수록 더 허무하게 쓰러지게 만든다. 유동성을 악화시키는 외상 장사는 헛배만 부른 것과 같아서 만병의 근원이다. 손익계산상으로는 남고 속으로는 골병들게 만든다. 차입금에 의존해 낸 이익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헛장사를 계속하다 어느 날 깔아 놓은 외상만 많을 뿐 결재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이른바 ‘흑자 도산’을 면치 못하게 된다. 
성장이 겉만 화려할 뿐 속은 텅 비어 차입경영이라는 자충수를 두어 결국 빚더미에 깔려 질식사 당하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만이 살 길이라는 캠페인이 ‘자가당착적인 내부모순’ 때문에 지지부진하다는 것은 요란한 구호가 낳는 심각한 문제다.

자원의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기업이 살고 발전할 수 있다면서 경영혁신을 등한히 하는 것은 대단한 모순이다. 기업마다 오랫동안 생산성 향상 캠페인 깃발이 요란스럽게 휘날렸어도 우리네 기업들은 하나 같이 생산성에 있어 여전히 선진국 기업에 비해 한참 뒤진다. 그 원인을 일일이 다 들어 설명할 수 없지만, 예컨대, 참여경영의 주체인 ‘나’의 혁신이나 고정관념과 타성에 찌든 제반 프로세스의 혁신에 등한한 탓이다. 

우리네 기업들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관리해야 할 네 가지 생산요소인 자금, 물적 자원, 시간, 지식 그 어느 것 한 가지도 지혜롭게 관리하지 못했다. 자금의 경우,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 식으로 고리채라는 흡혈 판이 얼마나 비정하게 기업의 피를 빨아먹는가를 생각지 않고 마구 빚내다 덩치를 키우는데 겁 없이 부어 넣었고, 물적 자원의 경우, 그 한 개 한 치가 바로 피땀 흘려 번 이익의 일부임을 잊은 채 마치 공짜처럼 방만하게 낭비하기 일쑤였다. 시간의 경우, 경쟁의 축이 시간경쟁전략으로 바뀌었는데도 촌스럽게 결재하고 문서에 코가 꿰인 채 관청 식 사무 보느라 시간을 물 쓰듯이 허비하고, 지식의 경우, 지식은 무가치한 말 장식으로나 쓸 뿐 실천 도구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저 유행성 바람에 덩달아 춤을 추듯이 생산성이 낮은 자원(사람)을 생산성이 높은 자원(고도생산설비)으로 대체한답시고 무턱대고 공장 자동화다 전산망 구축이다 설비투자에다 막대한 고금리 자금을 부어 넣었다.  고도의 설비를 운영하기 위해 높은 보수를 줘야하는 전문 인력이 기실 생산성을 상당히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결국 그 긴 잠을 자며 자본수익을 축내는 빚은 자금 유동성의 피를 빨아먹고 수익성을 갉아먹어 경영 전반에 자본효율과 경영효율을 떨어뜨림으로써 종국에 기업을 금융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그러고도 생산성을 높이자는 구조조정 한 가지 조차 남보다 수십 년씩이나 늦게 그것도 얻어터져 코피를 말로 쏟고서야 겨우 깨닫고 등 떠밀려 나섰다.  그건 정부가 강요하고 도와줘서 하는 게 아니고 경영관리의 힘으로 저 잘 되라고 하는 것인데도 기업마다 벅차다 서두르지 말라며 이론이 분분한 채 뭉그적거렸다.  허구의 사슬에 묶여 길들여진 의식의 청산이란 게 그처럼 어려운 것이다.

▲ 박종형 칼럼니스트

기업이 어떤 이유에서든 빈사상태에 빠져 제 살을 깎아내고서라도 살아남으려 발버둥치고 있는 데다 파업이라는 돌이나 던지는 노사 간 ‘동상이몽 속에 유지되는 기업 평화’란 허구요 모순이다.

지금은 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언했을 때 무기로 사용한 ‘불가피한 생산성 저하법칙’이 프레드릭 테일러가 고안해 낸 ‘작업관리를 통한 생산성 향상’을 효시로 보급된 ‘생산성 향상’이라는 신무기에 의해 여지없이 무용지물이 된 시대며, 프롤레타리아트 노동자들이 미래의 강력한 자본가로 등장하고 중산층으로 변신하고 있는 계층의 대이동과 변화의 시대다. 
그건 마르크스도 예견하지 못한 도도한 변화의 물결이라서 구태의연한 저항을 일삼는 노동조합은 그 존재 의의가 변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고 있다. 자본가는 더 이상 대립하는 상대가 아니라 협동하지 않으면 함께 망할 수밖에 없는 파트너인 것이다. 노동자의 단결로 노동자 권익을 챙기고 사용자의 노동권 침해를 막는 시대는 지나가고 노동생산성을 높여야만 권익을 누릴 수 있고 사용자한테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좋은 노사관계의 유지는 더 이상 정치논리나 정치성 운동방식에 기댈 수 없게 되었다. 회사에 돌을 던지고 공장 문을 닫아거는 식의 ‘자해 형 노동쟁의’는 이젠 촌스러울 뿐이다. 노동쟁의도 합리적이고 경제적이어야 한다.

내수시장의 패장이 세계시장에서 승전하겠다며 세계화에 나서는 것은 모순이다.

기업 목표의 양대 기둥은 밖에서 벌이는 성장의 추구(공격경영)와 안에서 하는 성과의 관리(수성경영)인데, 안에서 죽을 쒀 위태로운 처지에 밖으로 그것도 산 설고 물 설은 원정에 나서 전리품을 챙기겠다는 것은 허세다.
내수시장 싸움에서 이길 승산(경쟁력)이 없는 터에 국제 시장에서 저보다 훨씬 강한 상대와 경쟁하겠다는 것은 만용일 뿐이다. 내수시장이 밑바닥이니 국제시장에서 활로를 찾자는 것은 무리한 억지다. 시대착오적 제노호우비어(외국인 기피증)에 천착하는 의식으로 어떻게 외국 투자를 유치하고 외국인 바이어의 마음을 사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사업을 할 수 있으며, 고추장을 싸들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고집으로 어떻게 양식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상담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밖에서는 영어의 공용화 주장이 민족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느니 어쩌느니 쓸모없는 논쟁을 갑론을박하고 있어도 기업엔 당장 필요한 영어조차 구사할 수 있는 인력이 태부족이다.

남은 벌써 수십 녀 전부터 영문 명함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우리 기업은 아직도 외국인에게 발음하기나 기억하기 어려운 한글의 영문 표기 명함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고 있다.
선진국 기업들은 21세기 마인드다 학습이론이다 온갖 첨단 경영이론과 기법으로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키고 있는데, 우리네 기업들은 여전히 정경유착에다 족벌소유경영을 일삼고 원가관리 한 가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먹구구식 경영에 매달리고 있다. 그렇게 기업에 경직된 사고방식과 낡아빠진 관행과 무가치한 행동양식이 여전하고서는 세계화를 하겠다는 것은 허구다.

기업마다 ‘경리의 허구’가 만들어 낸 허상이 ‘이단적 경영’의 신앙이 되고 있는 것은 해롭기 짝이 없는 모순이다.

차입경영으로 올린 이익은 아무런 신통력도 없는 우상과 같은 것이다. 이익이 자금비용이나 미래비용인 사업유지비를 충당할만하지 못하면 진짜 이익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리가 부정하게 ‘작품’으로 만들어 낸 손익계산서상 이익이란 함부로 먹기에 ‘위험한 과실’이다. 그건 가공한 계수로 만들어 낸 가짜 이익이기 때문이다. 재고이익도 진짜 이익이 아니다. 언제 허상으로 둔갑할지 모르는 파랑새다.  물가상승과 함께 구입원가는 오르는데도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지 않으면 재고이익은 곧바로 재고손실로 둔갑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가상각이 제대로 계상되지 않았거나 제품의 생명주기에 대비한 신제품 연구개발비가 반영되지 않은 매출이익이란 불안한 이익이다. 그러한 투자비용이 한꺼번에 몰려 제조원가를 높이게 되면 매출이익이 풍지 박산 날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외로 빠져나갈 금융비용이 반영되지 않은 영업이익이란 설익은 과실과 같다.  그 이익이 자본수익 금리만도 못하면 헛장사를 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허구적인 경리 놀음으로 만들어 내는 손익계산단계의 제 이익이란
진짜 같으나 가짜이고 손에 잡힐 것 같으나 잡을 수 없는 환상이다. 경영 성적표인 재무제표 속에 숨어 눈을 즐겁게 할 뿐 허상에 불과한 파랑새가 많을수록 그 기업의 우상숭배는 빠르게 멸망을 부르게 될 것이다. 허구에 찬 경리야말로 파멸로 이끄는 정사情事와 같은 것이다.

기업에서 현재가 충실하지 못한데 ‘내일을 위해서’라는 희망을 꿈꾸는 것은 모순된 허구이기 십상이다.

기업에 있어 현재는 과거라는 씨앗에서 싹튼 것이며 미래는 현재에 들인 정성과 노력의 결실이다. 내일은 오늘과 달리 ‘기회’일 수도 ‘위기’일 수도 있다. 오늘 군살을 빼고 체력을 단련하지 않고서 내일 무사하기를 바라거나 성장의 마라톤을 선두로 완주하려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망상이다.
기업의 적은 과거며 그보다 더 큰 적은 ‘과거의 영광’이다. 어제로부터 탈피하지 않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기회를 잡겠다고 희망하는 것은 애벌레가 탈바꿈도 하지 않고 날개를 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문기술자와 설계사들이 연구소에 틀어박혀 연구개발비를 푼푼하게 써대며 신제품을 개발해 일거에 시장을 석권할 판매에 나서겠다는 신 마케팅은 허구다.

시장 경쟁력과 무관한 기술혁신은 실용가치보다 학리學理에 치우친 학문처럼 무가치하다. 무가치한 연구개발은 자위행위나 마찬가지여서 뒤끝이 허무할 뿐이다. 기술이던 신제품개발이던 경쟁적 판매 가치를 실어주려면 밀어내기식인 ‘product-out 방식’이 아니라 판매부서가 동참해 시장 수요성향이나 소비자 구미에 맞는 제품을 개발해 파는 ‘market-in 방식’이어야 한다.
많이 파는 것만이 장땡일 뿐 판매대금 수금이나 시장관리에는 소홀하면서도 영업실적 한 번을 제대로 파악해 분석, 평가하지 않은 채 자금 사정이야 어떻게 춤을 추던 상관하지 않는 ‘반 쪽 도사들’을 내세워 신 마케팅을 하겠다면 오산이다.
신 마케팅 부대는 가격이라는 탄약의 성능을 어떻게 기민하고 탄력적으로 활용할 것인 가서부터 경제적인 물류관리 기능까지 감당할 수 있는 전천후 기동타격대여야 하고 신 마케팅전략의 핵심은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시장수요나 소비자 욕구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데 두어야 한다. 판매조직의 혁신과 세일즈맨십의 변화가 없는 신 마케팅은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기업이 정부의 정책을 과신해 의존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순이다.

매일 실전을 통해 시행착오를 거듭해도 놓치고 뒤늦게 깨닫기 예사며 실천이 어렵고 더딘데 책상에 앉아 숫자놀음으로 정책을 입안하는 관리를 무작정 믿고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기업에선 오늘의 실적은 곧바로 내일을 대비하는 척도와 가이드라인이 되어도 시원찮은 판인데 정부가 정책 수립에 기초로 삼는 통계라는 것은 한 해가 지난 한참 후에나 잡혀 그 타이밍의 실효성이 낮다.
또한 그 신뢰도 역시 낮다. 기업이 신속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큰코다칠 수 있는 ‘새로운 변화에 의한 새로운 현실 the new realities by the new change’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관리들한테 기업 현실에 맞는 정책이나 행정이나 지원을 기대하고 의지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무지의 소치인지 무관심한 탓인지 모르나, 외환위기의 적시 조기경보에 실패함으로써 무수한 죄 없는 기업들이 날벼락을 맞고 신음했을 때도 임무를 소홀히 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나리란 단 한 명도 없었든 정부 행정을 기업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영을 혁신하겠다면 허구와 모순으로 도장한 우상들을 깨트려 부셔야 한다. 그리고 오로지 기업의 생존을 존중하고 기업의 영속적인 발전만을 신앙해야 한다. 그런 우상들을 그대로 신앙하게 방치하거나 늦추면 늦출수록 허구는 더욱 진실처럼 보이고 통할 것이고 그 추종자들은 헛된 믿음을 쫓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달려갈 것이다. 
경영은 드라마틱하다지만 허구게임을 하는 드라마가 아닌 ‘진실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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