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대구지역 계간문예지 [사람의 문학] 대표 (정대호 시인, ‘이육사애국시인 대구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1994년 봄 창간호 계간문예지 제1권 제1호 [사람의 문학] 발간 25주년을 맞아 27일 수성아트피아 알토홀에서 25주년 기념세미나를 개최했다.
1994년 봄 창간호 계간문예지 제1권 제1호 [사람의 문학]은 “1990년대 한국문학과 현실인식”을 주제로 <비평> 1990년대 현실 변화와 문학비평의 방향 – 이주형 <시>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 정대호 <희곡> 긴장의 시대와 연극, 그리고 그 지형도 – 김재석
<시> 이태수 시인, 김윤현 시인, 김종인 시인, 배창환 시인, 이중기 시인, 김상현 시인, 변준석 시인, 육봉수 시인, 노태맹 시인, 윤석홍 시인, 문해청 시인, 김현옥 시인
<소설> 교수열전(1) - 민현기, <소설> 감나무야 – 박치대 / 김수영의 김춘수에 대한 의심 – 박원식 / 사적 체험의 가벼움과 실험성 부재 – 신재기 / 재현 된 과거 삶의 가치 – 김일영 / 문화마당. 청년 학생의 글. / 문단소식 등을 1994년 봄호에 실었다.
1994년 봄 창간호 계간문예지 제1권 제1호 [사람의 문학]을 창간을 준비했던 지역문단의 문인은 과거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정권시기 1984년 이후 ‘분단시대동인’으로 활동했던 시인, 참 언론 사수와 탄압에 맞섰던 해직기자, 참교육 사수에 앞장섰던 전교조 선생님, 민주노조운동에 참여했던 노동자 등이 민족작가회의를 만들었다.
이 당시 대구지역시민사회운동과 변혁적 전선운동에 참여한 동지로서 실천적 리얼리즘을 신념으로 실천했던 현장작가도 많았다. 그러나 [사람의 문학]이 25주년 되는 지금은 문우로 동지로서 사별한 분도 더러 있다.
지난 날 자신의 안일에 의연한 이타심으로 경북일보 노동조합에 연류 되어 탄압을 받았던 민족작가회의대구지회 사무국장 김용락 시인은 [사람의 문학] 주간을 맡았고 (도서출판 사람)을 통해 헌신적 인간사랑, 삶의 문학운동, 지역문화 분권운동, 민족예술총연합(약칭 민예총)활동에 열정과 정열을 불태웠다.
또한 1994년 봄 창간호 [사람의 문학]에 필자(기자)의 시(詩)가 실린 것과 과거 노조위원장출마 등으로 그 해 4월 해고되었고 상신브레이크노동조합 간부로 총파업 중 필자(기자)가 7월 긴급구속 되었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한 영화필름 같다.
이때 민족작가회의대구지회 사무국장 김용락 시인은 지역 선후배 문인에게 민주노조운동으로 구속 된 노동자(필자)에게 응원하고 지지할 것을 호소하여 대구교도소에 영치금을 전달하는 정의로운 의리와 노동의 가치를 지켰던 기억이 난다.
1994년 봄 창간호 제1권 제1호 [사람의 문학]을 통한 과거의 기억은 맑은 영혼이 신비로운 생명을 잉태한 산모의 삶처럼 비록 고통과 고난의 시련처럼 단순하지 않고 구구절절 다사다난한 사연이 많다.
대구지역 계간문예지 [사람의 문학] 창간 25주년 기념 세미나 <식순> 첫 순서로 기념시를 낭송한 김윤현 시인을 소개한다. 참교육운동에 참여한 김윤현 시인은 1984년 <분단시대>로 작품 활동했다. 시집은 <발에 차이는 돌도 경전이다> <들꽃을 엿듣다> <지동설>외 다수가 있다.
다음은 김윤현 시인의 [사람의 문학] 창간 25주년 기념시 [그대여, 맨몸으로 오라] 시낭송 전문이다.
[그대여, 맨몸으로 오라] // 김윤현 // 남녘의 그대여, 맨몸으로 오라 / 북녘의 그대여, 발가숭이로 오라 / 가진 것 다 허물고 발가숭이 맨몸으로 오라 / 그리하여 우리 다시 만나자 //
내 것, 네 것 다 보따리처럼 내려놓고 / 만나서 그려보자, 우리 영원히 살 곳 한반도에서 / 자식들이 서로 얼싸안고 축구라도 한판하며 함께 땀 흘릴 / 손주들이 고사리 손 서로 잡고 소풍이라도 갈 / 그림을 그려보자 / 어른들은 평양에서 점심을 랭면으로 먹고 / 서울에서는 저녁으로 설렁탕 건네며 //
목청껏 아리랑을 불러 볼 그림을 그려보자 / 그렇지, 숨겨놓은 쇠붙이부터 내려놓고 / 권력도 지위도 명예도 헌옷처럼 풀어 헤치고 / 맨몸으로 만나자 / 만날 때 그릴 / 그림의 색깔을 미리 정하지 말고 / 밑그림도 미리 그려 오지 말자 / 지난날의 어두웠던 그림자를 제쳐두고 / 우리 따듯한 손을 잡고 백지에 같이 그려보자 //
우리의 평화를 / 우리의 희망을 / 우리의 미래를 / 퍼즐처럼 맞추면서 그림을 그려보자 / 누천 년 유유히 흘렀던 대동강처럼 맑고 / 단군 이래로 부단히 흐르고 있는 한강처럼 영원할 / 학처럼 단정하고 무명저고리처럼 때 묻지 않을 / 우리, 우리의 꿈을 그려보자 //
휴전에서 종전으로 이어질 / 종전에서 평화로 빛날 그림을 / 멀지 않아 낡아질 화폭에다 그리지 말고 / 우리 남북, 우리 북남 하나의 반도 크나 큰 반도 한반도가 다시 세계 평화의 시발이 될 평화의 꽃그림을 우리의 가슴 가슴마다에 그려보자 / 그리하여 다시는 사그라들지 않을 평화, 그 먼동을 틔우자 //
우리 힘차게 틔워보자 / 그리고 나서 남녘의 그대여, 북녘의 그대여 / 다시 맨몸으로 만나자 / 만나서 따스한 봄날을 마음껏 누려 보자, 그대 우리 //
다음은 정대호 시인의 인사말 [창간 25주년을 돌아보며] 전문이다.
창간 25주년을 돌아보며 세월이 참 빠르다. 1993년 가을이었다. 『분단시대』동인이었던 정만진 선생의 제의에 의해 대구․경북의 분단시대 동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 지역의 순수문예지를 하나 하자고 하여『사람의문학』을 함께 시작한 것이 어느새 25년이 넘었다.
그때 서른다섯의 청년은 어느새 환갑을 지난 나이가 되었다. 그때 창간사를 쓴 것이 어제 같은데 사람의 나이로 치면 혈기 왕성한 청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문예지의 나이로 치면 신선함을 잃어버린 늙은 잡지가 되었다.
첫 시작을 할 때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그러나 그때 대구에서 나오는 시 전문지인『시와 반시』는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다. 대구․경북은 오랫동안 김춘수, 신동집 시인의 영향으로 순수문학의 본거지로 굳어 있었다. 거기에 『시와 반시』의 창간은 그러한 경향을 더욱 강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 잡지의 창간사를 보면 그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표현기법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잡지의 내용도 그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이것은 이 지역의 문학판을 더욱 왜곡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25년의 세월을 견뎌오면서 여러 번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마다 『시와 반시』의 존재는 『사람의 문학』이 계속 나와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를 의식하면서 한 호식 내었다. 그러다가 보니 어느덧 지금의 세월에 이른 것이다.
우리 잡지는 대구․경북에 뿌리를 둔 지역문예지다. 처음 창간할 때에는 우리 지역의 필자들만으로 잡지를 꾸리려고 했다. 당시 우리 지역에 있는 대학들에 재직하고 있는 인문학의 교수들과 대학원을 나온 인재들, 그리고 문인들의 수를 고려하면 충분히 필자들을 꾸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책을 내면서 원고를 구하는데 한계를 느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대학교수들이 순수학술지가 아닌 잡지에 쓴 글들은 연구실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연구실적 채우기를 중시하는 교수들이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필진을 가동하는데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몇 년 만에 필진의 지역제한을 하지 않기로 했다. 1998년 아이엠에프를 맞으면서 자금 수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잡지의 출간동력을 다시 추스르기 위해 과감한 구조개편을 단행했다. 박병규에게 잡지의 편집을 부탁하고 출판사 운영을 맡겼다. 창간호부터 발행인으로 되어있던 제 아내 윤희옥 대신 제가 발행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4년 말 제가 일신학원에서 구조조정 대상이 되어서 실직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2005년부터 5년간 김용락 시인이 발행인을 했다. 우리 잡지는 처음부터 우리나라의 문학판을 선도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잡지를 통해 세속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돈벌이의 목적으로 상업성을 추구한 것도 아니다. 우리들은 이 지역의 문학하는 사람들이 살아왔던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들을 하는 것들을 여러 가지 장르의 형태로 글을 써서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이 잡지를 만들었다.
어릴 적 우리 할머니는 할머니가 거처하시는 안방에 겨울밤이면 동네 안노인들을 불러 모아 밤늦게까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다. 할머니의 많은 손자들 가운데 시골에는 내 혼자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할머니의 요위에서 할머니의 품에 안겨 함께 잠을 잤다.
나는 그 안방에서 밤늦도록 그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겨울밤이면 동네 안노인들이 서산에 해가 지기 전에 저녁밥을 해 먹고 우리 집 안방으로 모여들었다. 동네에 딸네 집에 놀러온 안사돈들이 있으면 할머니는 당신의 손녀를 시켜서 긴 겨울밤에 무료하니 놀러오라고 불렀다.
초롱이나 호야를 들고 할머니들이 모여들었다. 해질 무렵부터 밤늦도록 우리 집 안방은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다. 첫 시집살이의 어려움부터 아들, 딸들을 키울 때의 이야기, 그 중에 간혹 먼저 간 가식들로 인한 아품, 시부모들의 사랑을 받은 이야기 등, 이것도 무료하면 목소리 좋은 할머니들 내방가사 읽기,
감동적인 내용의 사돈지 읽기, 한글 제문 읽기, 고전소설 읽기 등, 그러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제미 있는 곳에 가서는 감동도 하고 맞장구도 치고 때로는 비난의 욕을 하기도 한다.
나이가 든 노인들이라 과거의 아픔도 슬픔도 괴로움도 기쁨도 감정이 걸러진 잔잔한 이야기로 이제는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담담히 나누는 것이었다. 그 안방이 바로 요즘으로 보면 문화의 향수 공간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여기서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다녀보지 않고도 이웃동네에 일어났던 일들을 아시었고 나아가 누구 집 자식들이 몇이고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를 다 알았다. 밤이 깊으면 백모님이 간식을 준비해 주셨다.
우리 『사람의 문학』은 바로 이 지역에서 어릴 적 할머니의 그 안방과 같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잡지는 종합문예지이다. 시와 소설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의 모든 글을 수용한다. 그 내용이 수필적이든 사실의 기록이든 지난 기록의 발견이든 굳이 배척하지 않는다. 이 지역에서 이런 글들을 좀 실어면 좋겠다고&n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