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이용수 할머니 두 번째 기자회견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잘 못했다하는 건 검찰이 할 일이다고 생각해.
정신대대책협의회는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야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하고 위안부하고는 많이 달라.
우리나이로 하면 16살, 만으로 하면 14살. 왜? 그때 성을 갈지 않으면 계급을 안줬어.
그렇기 때문에 성을 갈아서 야수하라? 갈았어.
그때 일본학교 3, 4학년까지 다녔고 가타카나를 알았어.
1992년도 6월25일, 윤미향 간사가 29일에 모임에 오라해서 갔어. 어느 교회였어. 그날 일본 선생님이 정년퇴직 후 돈을 1000엔 줬다며 100만원씩 나눠줬어. 그게 무슨 돈인지도 몰랐어.
그때부터 모금하는 걸 봤어. 왜 모금하는지 몰랐어 농구선수 농구하는데 기다렸어. 농구선수가 돈을 모금하더라고. 그 돈을 받아 오더라고. 왜 그런 줄 몰랐어. 좀 부끄러웠어. 농구 끝나고 돈 받는 거 봤어.
늦어 배고픈데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니까 “돈 없습니다” 그래도 그런가보다 생각했어. 어디가고 교회가도 돈 주고 그런가보다며 쭉 30년을 해가지고 왔어 무슨 권리로 위안부 피해자를 만두 고명(속)으로 사용했나. 자다 일어나서 펑펑 울었어. “내일 기자회견에 이것을 반드시 밝혀야 되겠다” 사죄배상 막았잖아.
부모 귀한 딸을 밤에 신주 가미가제 끌고 가서 전기고문 칼로 몸에 그려 죽여 놨어. 군인 앉아있어 안 들어갔는데 머리 질질 끌고 가서 방안에 자물쇠가 달렸고 돌덩이보다 더한 군홧발로 허리를 차서 배가 죽도록 아팠어. 살려 달라했어.
이걸로 책을 냈어. 책을 놓고 6500원에 파는 걸 봤어. 그래도 그걸 몰랐어. 그걸 책으로 내는 줄 모르고 당연한가보다 하고, 미국으로 다니면서 청원도 하고 정신대협의회박물관을 형무소에 짓는다고 박경림씨와 큰조카하고 가서 15만원 받고 협의회에서 증언했어.
박물관대표란 소리하지마라 창피하다했어. 대표 소리는 안 해도 대표 대우는 해줘야하지 않나 이래놓고 국회의원 비례대표(윤미향 전. 대표) 나갔어 무엇을 용서 구해 이름도 성도 없는 용서 자기마음대로 하든지 말든지 하는 거지 용서를 뭣 때문에 바래.
그리고 수요 집회(데모) 방식을 바꾼다는 거지 끝내는 건 아니야. 최초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시작했고 학생한테 교육적인 걸 만들기 위해 이걸 바꾼다했어. 어느 날 윤미향이 왔어 무릎 꿇고 용서해 달라해.
뭘 용서해 뭐라도 가져와야 용서를 하지 뭘 용서 그건 검찰에서 할 거고 기자회견 할 테니 그때 오라고 했어. 윤미향이 한 번 안아 달라하더라 이게 마지막이다 생각에 안아주며 30년 같이 있던 사람 마지막이다 생각했어. 기자들 명백하게 기사 좀 내줘 그걸(안아준걸) 갖고 “용서했다” 기사를 내지마.
대구에 유명한 최봉태 변호사가 있어. 지금 윤미향을 믿고 있어. 어느날 할머니 윤미향 욕하지 마세요. 나비기금이라든지 김복동 할머니 이름으로 모금했다고 할머니 개인 돈이 아니라고 했다고 말하며 이날 기자회견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