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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에 취한 언론 낱낱이 까발리다..
사회

특종에 취한 언론 낱낱이 까발리다

온라인뉴스 기자 입력 2016/04/23 13:52
[가만한 당신] 윌리엄(빌) 그린



1980,81년 워싱턴포스트(WP)의 1면 날조보도 스캔들 당시의 옴부즈맨 빌 그린. 그는 편집인의 주문대로 관련자들을 취재해 추하고 부끄러운 진상을 낱낱이 세상에 알렸다. WP는 그의 보고서를 통해 역설적으로 자존심을 지켰고, 세상은 언론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보았다. WP 사진.
WP 희대의 날조기사
헤로인 중독당한 8세 소년
워싱턴시 넘어 미 전역에 충격
81년 퓰리처상 수상자로 선정

재닛 쿠크(Janet Cooke, 1954~)는 언론 ‘흑역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름이다. 워싱턴포스트(WP) 1년차 기자였던 그는 1980년 9월 28일자 1면에 ‘지미의 세계 Jimmy’s World’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헤로인에 중독된 8세 소년 지미의 사연이었다. 그의 기사로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고, 쿠크는 이듬해 퓰리처상 수상자로 뽑혔다.

WP는 하지만, 그의 수상발표 사흘 뒤인 16일자에 그 기사가 날조됐다는 사실을 쿠크의 사과문과 함께 보도했다. 그리고 19일자 1면과 4개 면을 털어 스캔들의 전모를 낱낱이 공개했다. ‘연루자들: 장난이 아니었다 THE PLAYERS: It Wasn’t a Game’라는 제목의 1만 8,000자에 달하는 보고서. WP를 굴지의 언론사로 키워낸 편집인 벤저민 브래들리(1921~2014)와 편집국장 하워드 사이먼즈, 워터게이트 사건의 특종 기자로 쿠크의 데스크 중 한 명이었던 로버트(밥) 우드워드(1943~) 등 WP 스타 기자들의 거듭된 헛발질이 정황과 증언, 고백들과 함께 거기 담겨 있었다.

기자와 관련자 등 40여명을 인터뷰하고 직접 조사해서 그 보고서를 썼던, WP의 옴부즈맨 윌리엄 그린(William Green)이 3월 28일 노스캐롤라이나 주 더럼(Durham) 시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1세.

윌리엄(빌) 그린은 기자 출신 홍보 전문가였다. 1924년 11월 11일 노스캐롤라이나 애슈빌에서 태어난 그는 49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졸업한 뒤 지역신문 ‘더럼 선(Durham Sun)’ 기자가 됐고 ‘모건턴 뉴스 헤럴드’등서 에디터로 일했다. 57년 미국 해외공보처(USIA)로 직장을 옮긴 뒤 86년 은퇴할 때까지 방글라데시 등 해외 공관과 미 항공우주국(NASA), 듀크대 홍보처장 및 대외담당 부총장을 지냈고, 듀크대 총장을 지낸 테리 샌포드(Terry Sanford) 상원의원의 수석비서관으로도 일했다. 80년 9월 대학에서 안식년을 받은 그에게 WP가 옴부즈맨이 돼 달라고 청한 건 그가 언론 안팎의 생리에 밝아서였다. “독자들의 대표로서, 활동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고 하더라”고 그는 2003년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재닛 쿠크의 ‘소설’이 보도된 건 그가 WP로 출근한 지 꼭 일주일 뒤였다.

쿠크는 오하이오주 지역 신문 ‘톨레도 블레이드(Toledo Blade)’를 거쳐 1980년 1월 WP 기자가 됐다. 쿠크는 뉴욕 명문 바사르(Vassar)대학을 우등 졸업하고, 톨레도대학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6차례 지역 언론상을 수상했다고 이력서에 적었다. 채용 인터뷰에서도 자신감과 적극성 등 면에서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더욱이 그는 워싱턴 지역문제, 즉 흑인 슬럼가 취재에 즉각 투입할 수 있는 흑인 여성이었다. WP는 쿠크의 이력서와 전 직장에서의 평판 등을 확인하지 않은 첫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첫 부서는 인근 주 소식을 주로 전하는 지역 주간팀(District Weekly)이었고, 그는 유능했다고 한다. 그의 한 기사에 대한 위클리팀 에디터(부장) 비비언 애플린 브라운리의 평- 미끈하게(masterfully) 쓰여진 걸작(fine piece)이었다-도 그린은 보고서에 인용했다. 그 해 8월 비비언은 피부궤양을 유발하는 신종 헤로인이 시중에 나돈다는 제보를 받고 쿠크에게 취재를 맡겼다. 쿠크는 약 보름간 사회복지사와 재활치료사, 거리의 마약 중독자 등을 100명 넘게 인터뷰했고, 2시간여 분량의 녹음 파일과 145쪽에 달하는 취재노트를 제출했다. 그는 부지런한 기자이기도 했다.

그의 기사는 메트로팀(사회부)으로 넘겨졌지만 마약 관련 기사를 질리게 봐 온 시티 담당 에디터 밀턴 콜먼(Milton Coleman)으로선 새로울 게 없었다. 신종 마약 내용도 없었다. 하지만 콜먼은 쿠크와 대화 도중 놀라운 말을 듣게 된다. 헤로인에 중독된 8살짜리 꼬마가 있다는 것. 그는 아이를 집중 취재하라고 지시했다. 훗날 밀턴은 “당연히 아이가 마약중독치료기관(RAP Inc)에 있으리라 여겼다. 국장에게 보고한 뒤 RAP을 통해 아이와 부모 인터뷰가 가능한지 알아보게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3주 뒤 쿠크는 다른 아이를 찾았다고, 놀이터에 뿌린 명함을 보고 한 아이 어머니가 연락해왔다고 보고했다. 그렇게 ‘지미’가 만들어졌다.

사후 수집된 쿠크에 대한 주변의 평판이나 증언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 보기 힘들지만, 그린은 보고서 곳곳에 그런 내용도 수록했다. 쿠크가 명품 옷을 즐겨 입었고 옷값 대느라 아파트 월세를 못 낸 적이 있다는 이야기, 위클리팀 탈출에 몸달아 있었다는 이야기, 과거는 없고 현재조차 미래를 위한 디딤돌로만 의미를 두더라는 이야기…. “그녀는 오직 미래만 봤어요. 거쳐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죠.”한때 룸메이트였던 위클리팀 동료의 증언이었다.

재닛 쿠크의 1980년 9월 기사 'Jimmy's World' .

지미의 세계’는 충격적이었다. 마약 소매상과 함께 사는 마약 중독자 엄마. 약에 취한 남자가 칭얼대는 5살짜리 꼬마에게 헤로인을 주사했고, 그 뒤로 줄곧 매일 주사를 맞아왔다는 아이. 마약상이 되는 게 유일한 꿈인 그 아이가 사는, 워싱턴 남동부 마약 소굴 ‘지미의 세계’.
진실의 암막된 수정헌법 1조
시당국ㆍ경찰 소년 신병 요구
WP는 기자와 취재원 보호만
기사에 대한 검증은 뒷전

당시 마약은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쿠크도 기사에 썼듯 78년 7명이던 워싱턴시 헤로인 사망자는 80년 그 무렵 43명에 달했다. 하지만 ‘지미의 세계’는 짐작도 못하던 참경이었다. 그의 기사는 국내외 300여 개 특약사로 전파됐고, 신문사로는 전화와 편지가 빗발쳤다. 대통령 선거운동을 벌이던 로널드 레이건의 부인 낸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편지에서 “그와 같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알게 돼 끔찍하고 슬프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낸시 레이건은 남편 임기 내내 마약퇴치캠페인 ‘Just Say No’를 벌였다. 워싱턴 시 당국과 경찰에도 당연히 비상이 걸렸다. 관내 학교와 시설 탐문 수사에 경찰 인력과 정보망을 총동원했다. 제보자에게 1만 달러 포상금도 내걸었다. 시민들의 분노에 궁지에 몰린 당시 흑인 시장 메리언 베리(Marion Barry, 1936~2014)는 며칠 뒤 지미의 신병을 확보해 재활시설에서 치료 중이라고 허위 발표를 하기도 했다. 시와 경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WP는 ‘수정헌법1조’를 방패 삼아 쿠크를 보호했고 지미의 본명과 주소 등 ‘취재원’ 공개를 거부했다.

그 파장은 물론 쿠크가 예상한 바였다. 있지도 않은 ‘지미’를 경찰이 찾아낼 리 없고, 만일 다른 아이를 찾는다면 그로선 금상첨화였다. 쿠크는 아이의 양부가 칼까지 들이대며 철저히 신분을 감춰줄 것을 요구했다고 수 차례 편집국에 보고했고, WP 편집진은 보도 전 변호사 자문을 받아 기사에서 남자의 출신지를 ‘애틀란타’에서 ‘남부’로 바꾸고 ‘공영주택’이란 단어도 삭제했다. 편집국장 사이먼스도 “아이의 본명과 주소를 나도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다. 편집인도, 편집국장도, 메트로 데스크도, 시티 담당 데스크도 지미를, 쿠크를 의심하지 않았다. 특종에 취한 그들 눈에 기사는 완벽했다. 2,256 단어의 최종 기사로 다듬어지기 전 쿠크의 초고는 A4용지 13.5매에 달했고, 거기에는 취재원들의 표정 변화와 집 가구, 조명 밝기까지 비디오로 촬영한 듯 정밀했다. 밀턴은 특별취재팀을 구성, 후속 보도와 제2의 지미를 찾는 일을 맡겼다. 발행인의 격려 편지까지 받은 쿠크는 당연히 메트로팀 기자였고 팀의 주역이었다.

훗날 밝혀진 바, 의혹은 보도 직후부터 제기됐다. 쿠크가 워싱턴 남동부 마약 슬럼가 ‘컨던 테라스 Condon Terrace’의 지리조차 잘 모르더라, 아무리 약에 취했다고 낯선 기자 앞에서 8살 꼬마에게 헤로인을 주사할 사람이 있겠느냐, 상금까지 걸린 일에 마약 중독자들이 제보를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덩달아 제기된 쿠크의 인격과 자질에 대한 미심쩍은 이야기들. 특종의 공로자인 담당 데스크들은 그 의혹들을 ‘직업적 질투’의 발로라 여겨 밀쳐두기 바빴다. 쿠크가 워낙 당당하기도 했거니와, 그들에겐 기자들을 신뢰하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권력기관의 온갖 음해와 협박을 견뎌 세기의 특종을 지켜낸 72년 ‘워터게이트’의 교훈이 있었다. 분위기를 띄우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저명한 한 가정의학자(William Hamlin)는 “워싱턴뿐 아니라 미 전역의 대도시에는 ‘지미’가 널려 있고, 나도 그들을 치료한 적이 있다”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자 여론은 경찰과 시당국의 무능뿐 아니라 WP의 무책임함도 성토했다. 사이먼스가 콜먼과 쿠크에게 아이를 찾아보라고 지시한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쿠크는 아이 가족이 이사를 가버렸더라고, 집이 비어 있더라고 보고했다. 사이먼스는 그 보고를 신뢰했다. 브래들리와 사이먼스는 그 무렵까지도 쿠크(의 기사)에 대한 의혹을 단 한 건도 보고받지 못했다고 훗날 말했다.

퓰리처상은 쿠크의 계산에 없던 단 한가지였다. 81년 4월 13일, 그의 이름이 포함된 수상자 명단과 이력이 보도자료로 배포됐다. 전 직장 ‘톨레도 블레이드’가 보도자료의 오류- 톨레도대 학부만 나왔다. 바사르대를 졸업한 적 없다. 그가 받은 상은 단 한 개다 등-를 가장 앞서 지적했다. 비로소 WP 편집국에 비상이 걸렸다. 각 대학 학적 부서에 확인해 허위 이력이 드러나기까지 쿠크는 자기가 옳다고 우겼다. 스페인어 등 4개 언어에 능통하다는 것도, 프랑스 소르본느에서 1년간 공부했다는 것도 거짓이었다. 기사를 의심하게 된 편집인 브래들리는 담당 데스크도 못 믿어 타 부서 데스크까지 쿠크와 함께 나가 정말 지미가 그 집에 산 적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헛일이었다. 그제서야 우드워드 등이 쿠크의 취재노트를 뜯어본 바, 어디에도 ‘8살 헤로인 중독 소년’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쿠크는 하지만 “너무 잔인하다”고, “(그래도) 내겐 내 기사가 남아있다”고 버텼다. 그린은 보고서에서 “14일 밤 쿠크는 지미가 실재한다는 말을 15~20차례 가량 반복했다”고 적었다. 쿠크는 모두 지쳐 회의실을 나간 뒤 혼자 남은 메트로 부에디터(deputy editor) 데이비드 매러니스(David Maraniss)에게 비로소 실토했다.

72년 워터게이트 특종 주역들. 오른쪽부터 편집인 벤 브래들리, 편집국장 하워드 사이먼스,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WP 회장 캐서린 그레이엄. 그들은 80년 스캔들의 조연이기도 했다. 당시 발행인은 캐서린의 아들 도널드 그레이엄.
언론 교과서 된 내부 보고서
WP 옴부즈맨 윌리엄 그린
신뢰 입증 못하면 보도 금지 등
15개항 진단과 제언 남겨

2010년 10월 아프리칸 아메리칸 전문 온라인 매체 ‘The Root’는 쿠크 후유증이 30년이 지나도록 가시지 않았다는 내용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흑인 기자에게 더 집요하게 ‘cooke-ing(기사 내용 조작을 지칭하는, 쿠크의 이름에서 따온 조어)’여부를 따져 묻는 사례와 증언이 소개됐다.(2003년 5월, 뉴욕타임스의 흑인 기자 제이슨 블레어의 1면 톱 기사 표절 스캔들도 있었다.) 같은 질문을 받더라도 백인 기자들은 덜 느꼈을 수치심을 그들은 느껴야 했고, 특히 WP의 흑인 기자들은 쿠크의 이름을 듣는 것조차 스트레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WP 경제 담당 프리랜스 기자 마이클 플레처는 “기자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거짓도 과장도 안 된다. 물론 세상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더 놀라울수록 더 잘 팔리기(for business)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맥락을 통해, 삶을 조형하는 복잡한 힘들을 드러내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WP 정치ㆍ종교 담당 해밀 해리스(Hamil R. Harris)는 “저널리즘은 고된 일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시대에도 저널리즘엔 지름길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WP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흑인 기자였다.

재닛 쿠크는 82년 필 도나휴 쇼와 96년 남성 잡지 GQ 인터뷰를 통해 두 차례 공개 사과했다. 82년 그는 WP에서 받은 압박감이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된 주요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영화사 ‘트라이 스타(Tri Star)’는 그의 이야기 판권을 160만 달러에 사들였지만 영화로 제작하지는 않았다.

빌 그린의 보고서와 재닛 쿠크의 기사는 저널리즘스쿨의 교재처럼 지금도 읽힌다. 특히 보고서 끄트머리의 15개항 진단과 제언은 WP를 떠나, 모든 언론사와 언론인이 자계의 금언으로 삼을 만하다. 1항 “WP 시스템의 실패는 시스템 결함 탓이 아니라 시스템을 작동시키지 않은 사람 탓이었다.” 2항 “기자 신뢰가 책임 회피의 명분이 될 수 없다.” 13항 “기자가 에디터에게 취재원을 밝혀 기사의 신뢰성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그 기사는 보도돼서는 안 된다. 그 때문에 새로운 소식을 전달하지 못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so it be)” 등이다. 8항에서 그린은 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언론에겐 독이라고, “WP는 그 경쟁에 불참할 것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권했다. WP는 그 뒤로도 퓰리처상 심사에 후보를 냈다.
[한국일보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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