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극단 물결의 헨릭 입센 원작 송현옥 연출의 <인형의 집>을 관람했다.
헨릭 입센 (Henrik Ibsen 1828 - 1906)은 노르웨이 최초의 극작가로 1828년 노르웨이 스키엔에서 태어났다. 입센은 15세때 약국의 도제를 노릇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났지만 1852년 그는 24세의 나이로 베르겐에 있는 극장의 제작자 된다. 1857년 그는 크리스티아니아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예술 극장의 예술 감독이 된다. 극장이 도산하자 그는 1864년 노르웨이를 떠나 그 후27년 동안 로마, 드레스덴, 뮌헨등지에서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한다. 1891년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와 작업을 하다가 1900년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1906년 사망하게 된다.
입센은 1850년경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초기 작품은 자신의 나라 전설에 기초하고 있으며 낭만주의 연극과 연결된다. 그러나 1877년 입센은 <사회의 기둥>을 시작으로 문제극으로 방향을 돌리고 그 이후<인형의 집 Et Dukkehjem》(1879), <유령 Gengangere>(1881), <민중의 적 En Folkefiende>(1882)등의 작품으로 이어나간다. <들오리 Vildanden>(1884)를 시작으로 사회문제에 관한 희곡에서 벗어나 <로스메르 저택 Rosmersholm>(1886), <바다에서 온 부인 Fruen fra Havet>(1888), <헤다 가블레르 Hedda Gabler>(1890)등의 작품 등에서는 개인적인 관계들에 관심을 가진다. 한 작품마다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세상 사람들을 열광시킨다. 해외에서 체재한 후 귀국한 그는, <건축사 솔네스 Bygmester Solnes>(1892) <작은 아이욜프 Lille Eyolf> <보르크만 John Gabriel Borkman> 《우리들 죽은 사람이 눈뜰 때》(1898)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인형의 집>은 입센이 1879년에 쓴 희곡이다.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 경제활동을 전부 남성이 담당하고, 가정 내에만 머무는 여성의 역할은 줄어든다. 이런 배경 속에서 주인공 노라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귀여운 딸로, 결혼 후에는 남편(토르발 헬메르)의 사랑스러운 아내로 살고자 노력한다.
노라는 그것만이 여자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종달새’ ‘귀여운 다람쥐’ ‘놀기 좋아하는 방울새’라고 불리며,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로만 살아간다. 이런 노라의 모습은 당시 유럽 여성의 삶을 그대로 반영한다. 결혼 전에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는 오로지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지키는 것만 생각하며 예쁜 인형처럼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노라가 <인형의 집>을 박차고 나오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과거 노라는 병에 걸린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가족을 돌보느라 남편 몰래 아버지 서명을 위조해 남편회사의 변호사 크로그 스타트에게 돈을 빌린 적이 있다. 노라는 가족을 위해서 한 일이기에 이런 사실을 숨기고 있고, 당연히 남편이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라 믿지만, 회사문제로 남편이 크로그 스타트를 해고하니, 크로그스타트은 노라를 찾아와 그녀를 도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자신을 해고시키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면 과거 서명을 위조한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위협까지 한다.
난처한 상황에 처한 노라에게 린데부인이 찾아와 노라를 돕는다. 과거 크로그 스타트가 자신을 사랑했지만 등을 돌린 적이 있는 린데 부인은 크로그 스타트에게 다가가 몸과 마음을 밀착시키면서 노라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그러나 남편 헬메르는 노라의 옛 일을 알아내고, 8년이나 함께 한 부인을 몰아 부친다.
헬메르: 지난 8년 동안 나의 기쁨이자 자랑이었던 사람이 위선자에 거짓말쟁이라니! 그보다 더 끔찍한 건 범죄자란 사실이야! 당신이 내 행복을 몽땅 망쳐 놓았어. 내 미래도 다 파괴해 버렸고.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해. 경박한 여자 때문에 내가 이렇게 형편없이 허물어지고, 이렇게 비참하게 파멸하다니!
노라: 토르발, 난 지금껏 이곳에서 8년이란 세월을 낯선 남자와 함께 살았고, 그 남자와 함께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아, 난 그런 생각을 하면 참을 수 없어요! 난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어요.
헬메르에게 진정 중요했던 것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노라는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을 쏟아 부었지만, 정작 자신은 아버지나 남편에게 한 사람의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을 나간다.
“행복하지 않았어요. 한 번도 행복한 적 없어요.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요, 단지 즐거웠을 뿐이에요. 당신은 늘 내게 친절했지요. 하지만 우리 집은 놀이를 하는 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이곳에서 난 당신의 인형 같은 아내였지요. 아빠 집에서 인형 같은 아이였듯이.”
희곡 <인형의 집>이 1879년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을 때, 이런 노라의 행동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후 사람들은 누구의 아내가 아닌 독립적인 인격체로 살아가고자 했던 노라의 선택을 점차 인정하고 지지하기 시작한다. ‘노라’는 여성의 권익 보호와 페미니즘(feminism)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 여성 해방 운동이 일어난다. 남녀가 불평등한 사회 인습에 대항하여 여성의 지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사상을 뜻하는 ‘노라이즘(Noraism)’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하게 된다.
무대는 도입에 팔걸이의자 하나만 무대 중앙에 조명을 받고 있다. 장면이 바뀌면 현관문과 문틀을 출연자들이 들여오고, 장면변화에 따라 위치를 이동시킨다. 긴 안락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의자 역시 출연자들이 들여와 이동시키며 조명변화로도 장면변화에 대처한다. 노라의 의상 역시 홍색과 담청색의 의상을 갈아입히고, 내복차림으로 연기를 하도록 연출된다.
출연자들의 연기도 무용극, 무언극, 또는 곡예를 하는 듯싶은 설정과 축약된 대사로 시종일관 연극을 이끌어 간다. 대단원에서 노라가 인형의 집 문턱에 서서 나갈 듯 나갈 듯하면서도, 차마 나가지 못하고 고뇌에 찬 모습을 보이는 상태에서 연극은 끝이 난다.
오주원이 노라로 출연해 독특한 성격창출과 탁월한 연기로 공연 내내 관객의 시선을 일신에 집중시킨다. 헬메르로 성욱과 김승은, 크로그 스타트로 장교환, 랑크 의사로 이건무가 출연해 곡예를 하는 듯싶은 동작과 열연으로 갈채를 받는다.
안무 이영찬, 예술감독 백로라, 무대감독 나현민, 조연출 성진영 차민엽, 기획 박인용, 무대디자인 한지원, 조명디자인 이승호, 음향디자인 윤국희 등 제작진과 기술진의 열정과 기량이 조화를 이루어, 극단 물결으 헨릭 입센 작, 송현옥 연출의 <인형의 집>을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좋을 창의력이 돋보이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 지향 연극으로 탄생시켰다./뉴스프리존=박정기 문화공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