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이른바 ‘K·Y 수첩 파문’이 신년정국을 강타했다. 음종환 전 청와대 선임행정관(2급)이 김무성 대표(K)와 유승민 의원(Y)을 정윤회 문건 배후로 지목했다는 의혹에 여권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발언 진위를 놓고 핵심 당사자인 음 전 행정관과 이준석 전 비상대책위원이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태 역시 여권 내 잠재돼 있던 친박과 비박 간 갈등에서 비롯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치권 일각에선 ‘김 대표를 음해하려는 특정 라인 작품’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다. 수첩 파동 이면에 감춰진 속살을 들춰봤다.
지난 12월 18일 음종환 전 행정관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후배들과 청와대 인근에서 술을 마셨다. 자리엔 이동빈 청와대 제2부속실 행정관, 손수조 부산 사상구 당협위원장, 신용한 대통령직속 청년위원장이 참석했다. 자정 무렵 이 전 위원이 뒤늦게 합류하면서 술자리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이 전 위원은 “음 전 행정관이 내가 TV에 출연해 박 대통령과 청와대를 향해 쓴소리를 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고 말했다. 이 전 위원에 따르면 음 전 행정관은 정윤회 문건 유출 배후로 김 대표와 유 의원을 언급했을 뿐 아니라 여권 중진 인사를 총리 후보로 거론하며 “내가 꼭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전 위원은 음 전 행정관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1월 6일 김무성 대표에게 전했다. 당시 김 대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이 전 위원에게 “다른 곳에선 말하지 마라”고 주문했단다. 그 후 김 대표는 사석에서 지인들에게 ‘청와대 조무래기들’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대로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청와대 얼라들’이라며 일부 행정관 행태를 꼬집었던 유승민 의원 역시 상당히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 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던 ‘배후설’은 김 대표 수첩이 한 사진기자에게 포착되며 여권 전체를 뒤흔들었다. 사표를 낸 음 전 행정관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 전 위원이 여기에 반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둘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김무성 사생활은 빠짐없이 체크되고 있다.” 지난 연말 송년회에서 한 여권 관계자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는 정윤회 문건에서 거론됐던 ‘십상시’ 중 한 명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껄끄러운 것으로 알려진 김 대표에 대해 사정당국이 관련 정보들을 수집, 축적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역시 김 대표가 정윤회 문건에 개입됐을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는 “조응천 뒤에 김 대표가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다.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집권당 대표가 그래서야 되겠느냐”며 마치 김 대표 배후설을 사실인 양 말했다.
음종환 전 행정관 역시 ‘십상시’ 명단에 등장한 친박 보좌관 출신이다. 음 전 행정관은 권영세 주중대사, 이정현 의원 등 핵심 친박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정치권에선 ‘이정현 사람’으로 불린다.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 총무·정호성 제1부속·안봉근 제2부속 비서관)’ 중 정호성 비서관과 특히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 전 행정관은 웬만한 친박 의원들보다 파워가 세다는 게 정설이다. 보좌관 시절엔 전략통으로 이름을 날리며 기자들 사이에서 ‘특종 제조기’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비박계가 ‘일개 행정관이 감히’라는 표현을 쓰고 있긴 하지만 음 전 행정관에게 ‘일개’라는 단어를 붙이기 어려운 이유다.
이처럼 ‘십상시’를 포함한 핵심 친박들 사이에선 이미 김 대표가 정윤회 문건 배후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응천 전 비서관과 몇 번 만났다는 유승민 의원도 덩달아 이름이 오르내렸다. 공교롭게도 김 대표와 유 의원은 한때는 친박이었지만, 지금은 비박으로 분류되는 ‘탈박’ 인사다. 이 전 위원이 음 전 행정관 말을 작심하고 전한 것도 친박 내에서 김 대표와 유 의원과 관련된 근거 없는 소문들이 급속도로 퍼지는 것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판단에서였다고 한다. 친박 내에 형성돼 있던 반 김무성·유승민 기류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비박계 의원들뿐 아니라 정치 전문가 대다수가 음 전 행정관 발언의 진위 여부를 떠나 당대표와 차기 원내대표 후보군에 오르내리는 중진 의원 실명을 거론하며 오해가 될 만한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한 친박 핵심 의원실을 음 전 행정관 발언 진원지로 보기도 한다. 그동안 이곳에서 김 대표를 겨냥한 무수한 의혹들이 제기됐던 까닭에서다. 음 전 행정관과도 가까운 해당 의원은 친박 내에서 공공연히 ‘김무성 저격수’로 통한다고 한다. 이는 친박 특정세력이 김 대표를 흠집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윤회 문건 유출 배후라는 내용을 흘렸다는 것으로도 이해되는 대목이다.
김무성계의 한 재선 의원은 사석에서 “박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윤회 문건 유출을 ‘어부지리를 노린 이간질’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김 대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수 있다. (김 대표가 배후라는) 잘못된 정보가 박 대통령에게까지 올라간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이준석 전 위원으로부터 음 전 행정관의 말을 전해들은 김 대표와 유 의원은 각자의 루트를 통해 확인 작업 내지는 항의에 나섰다. 김 대표는 조윤선 정무수석을 통해 음 전 행정관 발언에 대한 강한 불만을 쏟아낸 것으로 전해진다. 유 의원은 음 전 행정관과 친한 안봉근 2부속 비서관에게 발언 배경에 대해 문의했다고 한다. 둘 다 발언 당사자인 음 전 행정관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직접 연락을 하진 않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 대표가 김기춘 실장에게 문제제기를 하려 했다는 소문도 나왔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통상 집권당 대표가 이 정도 사안에 연루됐다면 적어도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김 대표는 그러지 못했다. 이는 김 대표와 청와대 간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준다”고 설명했다.
음 전 행정관은 안봉근 비서관 등으로부터 자신의 발언이 김 대표에게로까지 흘러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김 대표와 유 의원에게 개인적인 해명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와대 차원에서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 전 위원에겐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비박계가 화를 삭이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음 전 행정관 발언이 오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봐주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불만들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청와대가 음 전 행정관 발언을 그다지 문제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인데, 이 또한 비박계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이는 김 대표가 수첩을 고의로 노출시킨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즉, 청와대를 향해 항의 또는 경고 표시로 수첩을 펼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배후라는) 음해를 당하는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의도적으로 사진 찍히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누명도 씌워서 기가 막힌다”라며 억울해했다.
그러나 반론도 적지 않다.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트위터에 “감방에서 당국의 검열을 피해 비밀 편지를 몰래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비둘기 날린다고 한다. 그런데 집권여당 대표가 국회에서 수첩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언론을 통해 만천하에 비둘기를 날렸다. 국민은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라고 썼다. 김 대표가 수첩 메모를 일부러 카메라에 노출시켰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것이다. 친박 의원들 상당수가 그렇다.
그동안 여러 국회의원들이 휴대폰 또는 컴퓨터를 통해 개인적인 볼일을 보다 곤욕을 치렀던 적이 있다. 한 의원은 컴퓨터로 비키니를 입은 여성 사진을 보다 망신을 산 바 있다. 어떤 의원은 취업 청탁과 같은 부적절한 문자 메시지를 보다 들통이 나기도 했다. 국회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김 대표가 이를 모를 리 없다. 더군다나 김 대표 자리는 방청석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본회의장 맨 뒷줄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김 대표가 뒤에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 카메라 렌즈를 의식하지 않을 가능성은 낮다는 얘기다.
수첩 파동은 일단 겉으로는 수습 국면에 접어든 듯한 모습이다. 청와대는 음 전 행정관을 서둘러 면직 처리하며 조기 진화에 나섰다. 청와대로서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김무성 대표와 언제든 만날 것”이라고 했던 박 대통령 발언 직후에 이러한 일이 불거져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김 대표 측 역시 직접 대응은 자제하고 있다. 김 대표 주변에서는 “당대표가 행정관과 싸우는 듯한 그림은 보기 좋지 않다”는 공감대가 모아졌다고 한다. 유승민 의원 측 역시 차기 원내대표 선거를 앞두고 청와대와 대립 전선을 형성하는데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친박과 비박이 사실상 루비콘을 건넜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비박계는 이번 음 전 행정관 발언을 핵심 친박 인사들의 감춰져 있는 속내로 받아들이고 있다. 되짚어보면 지난 연말 음 전 행정관 발언 다음 날인 12월 19일 박 대통령이 친박 중진 의원들만 불러 만찬을 열고, 12월 30일 친박 의원들이 김 대표를 향해 집중포화를 쏟아낸 것과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반응이다. 김무성계의 또 다른 한 의원은 기자들에게 “현 정권 친박 실세들이 내부 권력 투쟁을 하다 저지른 일을 눈엣가시인 김 대표와 유 의원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던 게 이번 수첩 파동의 본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친박계 역시 김 대표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는 마찬가지다. 행정관이 술자리에서 한 발언을 전해 듣고 김 대표가 침소봉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친박계의 한 중진급 의원은 “청와대 행정관 발언으로 생긴 것이니 김 대표에게 사과해야하는 건 맞다. 그래서 재빨리 음 전 행정관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느냐”면서도 “수첩 메모를 고의로 유출했다는 의심을 지우기 힘들다. 집권당 대표라는 분이 당 내 싸움을 유발시킬 수도 있는 행동을 한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