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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봐 해봤어?] 오래 서먹했던 정주영과 이병철, '백자(白瓷)' 선물로 극적인 화해

정원석, 전효진 기자 입력 2015/01/19 19:38

탄생 100년 맞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일대기 '이봐, 해봤어?' 저자 박정웅 인터뷰
 ▲ 정주영 회장 탄생 100주기 기념 일대기 '이봐 해봤어 :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정주영’표지 /FKI미디어
“정주영 회장님께서 발휘한 기업가 정신이 바로 제가 주창하고 가르쳐 온 핵심입니다. 그런데 저는 기업가 정신을 가장 극적으로 실천한 정 회장님의 사례를 지금까지 잘 모르고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세계 경영학의 태두 피터 드러커는 1977년 10월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수많은 저서로 현대 경영학의 이론적인 틀을 만들었다는 찬사를 받은 피터 드러커이지만, 정 회장 앞에서는 자세를 낮춘 것이다.

정 회장은 한국경제의 뼈대를 만들었다. 현대자동차(005380) (172,500원▲ 1,500 0.88%)그룹, 현대중공업(009540) (103,500원▲ 8,500 8.95%)그룹, 현대그룹, KCC그룹, 현대백화점(069960) (120,500원▲ 500 0.42%)그룹, 현대산업개발, 현대해상화재보험, 한라그룹 등과 그에 속한 수백개의 기업이 정 회장이 창업한 현대그룹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범(汎) 현대 일가 기업들의 전체 매출은 300조원에 이른다. 한국 GDP(국내총생산)의 4분의 1 수준이다. 정 회장이 없었다면 한국경제의 고속성장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상당수 국민이 정 회장을 추모하는 이유는 그가 이룬 엄청난 부(富)의 크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당시 열악한 현실에서 남들이 엄두조차 내지 못한 일을 기획하고 성공시켰다. 경부 고속도로 건설, 자동차 독자 개발, 조선사업, 중동 진출, 올림픽 유치 등 그가 한 일은 대부분 ‘한국 최초’였다.

뿐만 아니다. 정 회장은 10년째 같은 구두를 신고 다녔다. 신입사원들과 해수욕장 모래밭에서 함께 씨름을 하고 막걸리를 마셨다. 그가 별세한 지 15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경영인 1위에 오르는 것은 뛰어난 창조정신과 동시에 서민적인 매력 때문이다.

올해 정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일대기를 담은 책 ‘이봐 해봤어?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정주영’(FKI미디어)이 출간됐다. 저자인 박정웅씨(72·메이텍 회장)를 만나 그가 본 ‘정주영’에 대해 들어봤다.

-정 회장과는 어떻게 만났나.

“정 회장이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있던 1974년부터 14년간 국제담당 상무로 보좌했다. 정 회장이 일본어는 잘했는데 영어는 못했다. 정 회장이 해외 손님들과 만날 때 통역을 하고, 연설문을 작성하는 일이 내 역할이었다. 군에서 통역장교를 마치고 전경련에 발탁됐다.”

-얼마나 가까웠나.

“정 회장은 전경련 대표로 해외 출장을 갈 때 수행원 한둘만 데리고 다녔다. 나와 단둘이 갈 때도 잦았다. 그럴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신의 사업 아이디어를 말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자동차 어렵다고 하는데, 그냥 양철통에 바퀴 달고, 엔진 달면 되는 거지. 자동차는 껍질이 중요해, 디자인이 핵심이야.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안 그런가?’ 라고 하는 식이었다.”

-책 제목 ‘이봐, 해봤어?’는 언제 말한 건가.

“현대조선 초기에 선박 인도 날짜를 석 달 앞당겨 달라는 선주의 요청에, 임원들은 인력과 장비가 부족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때 정 회장은 ‘이봐, 해봤어?’하고 호통을 쳤다.

그 결과 현대는 조선소 도크 완공과 동시에 26만톤급 대형 선박을 최단 시일, 가장 낮은 가격에 완성했다. ‘이봐, 해봤어?’ 한마디에 정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담겼다.”

-정 회장 일화는 상당 부분 알려졌는데, 책으로 다시 쓴 이유는.

“요즘 얼마나 어렵나.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못한다. 중국은 이미 한국을 따라잡다. 하지만 기업인과 관료들은 ‘어렵다, 안된다’고만 한다. 이런 때 정 회장의 ‘이봐 해봤어?’ 를 되새기면 어떨까 생각했다. 마침 올해는 그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 2000년1월14일 오후 롯데호텔에서 열린 현대그룹 주최 '2000년 주한 외국인을 위한 신년하례회'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이 참석자들과 환담하고 있다. /조선DB

정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주변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가 조선사업을 하겠다고 동분서주할 때, 해외 유학파 경제관료는 “정 회장이 성공하면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하늘로 오르겠다”고 했다. 현대건설의 중동진출도 반대가 심했다.

-중동에 진출할 때의 상황은.

“다들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경험과 기술은 외국 전문가들을 채용해서 배우면 되고, 중동은 낮엔 덥고 밤엔 추우니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고 했다.

서구 기업이 24개월 걸려서 한 일을 18개월 만에 해냈다. 중동 진출 첫해 국내에 송금된 금액이 1억3000만 달러였다. 당시 국내 외환보유고가 3000만 달러였던 시절이었다. 현대가 중동에서 보낸 돈으로 한국은 당시 외환부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동차 독자개발 사업은 미국이 반대했다. 주한 미국 대사가 정 회장을 찾아와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 미국 자동차 업계가 정부를 동원한 것이다.

-미국은 왜 반대했나.

“1970년대만 해도 자동차는 미국의 핵심 산업이었다. 미국 자동차 업계는 한국에 자동차 조립기지를 설립해 아시아 시장에 진출할 계획을 추진했다. 그런데 한국이 조립생산 대신 독자모델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하자 반대한 것이다.”

-미국 대사는 정 회장을 만나 무슨 말을 했나.

“자동차 사업을 독자적으로 하려면 최소 50만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35만대에 불과하다. 현대가 자동차를 만들면 수출을 해야 하는 데, 누가 사겠는가. 중동 건설로 번 돈을 자동차에 투자했다 잃어버릴 수 있다. 이렇게 말했다.”

-정 회장의 반응은.

“한국경제와 현대를 걱정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마음속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경부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앞으로 도로를 더 많이 건설할 것이다. 도로는 경제의 혈관이다. 혈관에 피가 도는 것처럼 도로에 차가 다녀야 물류가 늘고 인적 교류가 이뤄지고 경제가 발전한다.

중동에서 번 돈 다 잃고 내 대(代)에 못해도 후대가 자동차 산업에 성공하는 데 필요한 디딤돌을 놓는다면 망하고 실패해도 여한이 없다. 정 회장이 이렇게 말하자 미국 대사도 말문이 막히는지 돌아갔다.”

책의 저자인 박정웅씨는 당시 통역을 하다 숨이 막혔다고 회상했다. 정 회장의 말이 단순하면서도 논리가 치밀하고 기업가 정신과 애국심까지 담겨 있어,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는 그때의 장면이 떠오르는지, 잠시 시선을 들어 천정을 보다가 인터뷰를 이어갔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할 때도 반대가 있었나.

“서울에 올림픽을 유치하자는데 서울시가 전혀 안 나섰다. 올림픽 전시관을 개관하는 데 당시 서울시장이 불참했다. 개최지가 일본 나고야로 정해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정 회장이 나선다고 하니, 국내에선 ‘망신만 당하고 올 것’이라고 비웃었다.”

-‘나고야’ 대세를 어떻게 뒤집었나.

“올림픽 유치에 가장 큰 걸림돌은 남북 분단 상황이었다. 1972년 서독 올림픽 때 테러가 발생한 후 개최지 선정에서 안전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 서울은 불과 몇십 킬로미터 거리에 북한이 있으니, 해외에서 보면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 회장은 이를 역이용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엔 동구권이 불참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 회장은 이런 동서(東西) 이념대립 상황을 파고들었다. 분단국인 한국의 서울에서 동서가 다시 화합하는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리면 북한도 테러를 저지르진 못할 것이라고 호소했는데, 이게 통했다.”

 
▲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고희기념회장에서 만나 담소하고 있다./조선일보DB

한국 재계를 오랫동안 이끌었던 정 회장은 특히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 현대와 삼성이 재계 순위를 다투는 과정에서 두 창업주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정 회장은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을 어떻게 생각했나.

“한번은 사석에서 이 회장 이야기가 나오자 정 회장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자기는 부잣집 아들로 자라 유학도 가 보고, 국보급 골동품으로 가득한 서재에서 고려자기를 쓰다듬으며 정원에 노는 공작새를 감상하는 고상한 양반이고, 나는 막노동자 출신이라 무식한 사람이라 이거지.’”

-두 사람의 앙금은 끝까지 안 풀렸나

“1985년 11월 20일, 전경련에서 마련한 정 회장의 고희(古稀)연에서 극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당시 와병 중이던 이병철 회장이 부축을 받으며 사전 예고 없이 고희연 장소에 나타났다. 그리고 정 회장에게 선물 상자를 전달했다.

정 회장이 그 자리에서 열어보니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오는 크고 우아한 백자였다. 그 순간 두 사람의 해묵은 감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참석했던 회장님들이 기립박수 했다.”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1년 11월21일 아침 서울 종로구 계동 본사옆 공원에서 회사 임직원, 마을주민등 2백여명과 함께 간편한 옷차림으로 체조를 하고 있다. /조선DB

30~40대에 정주영 회장을 보좌했던 저자 박씨는 이제 70대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수십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저녁에 본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줬다.

박씨는 ‘이봐 해봤어?’ 책을 내고, ‘정주영 전도사’로 나섰다. 그는 처음 정 회장을 통역할 때에는 곧 유학을 갈 계획이었으나, 정 회장의 인간적인 매력에 반해 곁을 떠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정주영은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실패할지라도 밀알이 되겠다는 애국자였다”며 “정주영 정신을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남은 생을 바치려 한다”고 말했다.
 
▲ 정주영 회장 일대기 '이봐, 해봤어 : 세기의 도전자, 위기의 승부사 정주영’저자 박정웅. /전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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