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안데레사기자]여행가와 수필집 등 십여 권을 책을 출간한 조성원 작가가 [조선의 꽃, 열하일기]를 헤드림출판사 기획도서로 출간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조선 문학의 꽃’으로 찬사를 받아도 손색이 없음에도 일반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한문으로 표기된 원전은 물론, 번역본조차도 손에 잡게 되면 우선 그 방대함에 주눅이 든다. 물론 그중 극히 일부 기록이 나 작품들은 이미 교과서에 소개된 작품의 존재나 내용에 익숙한 몇몇은 있지만, 여전히 <열하일기>는 오갈 든 것처럼 쉬이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에 조성원 작가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에세이 영역 속으로 끌어들여, 좀 더 쉽게 흥미를 발산시키고 그의 사색을 호흡하면서 감상과 해설을 쓰듯이 엮어 [조선의 꽃, 열하일기]로 재탄생시켰다.
정조 1792년 시작된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있었다. 이는 ‘불온한 문체를 올바른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의미로, 왕명에 의해 진행된 이 반정은 일종의 ‘지적 검열’에 해당한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와중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문체반정의 바람을 일으킨 진앙’으로 평가받았다.
그리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도 ‘열렬한 탄사와 저주어린 비난을 동시에 받은’ 박지원의 글들을 모은 문집은 그가 죽은 지 한참 뒤인 19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출간됐다.
박지원은 조선 초기의 작가로, 1780년 쓴 ‘열하일기’는 후학들의 수백 권 ‘신 열하일기’로 재탄생하더라도 각자 그 풍미를 부여해줄 만큼 조선 지성의 다이아몬드요, 영원한 거작이다. 따라서 ‘열하일기’는 시대를 초월해 국민의 정서 함양에 기여할 가치를 지녔다.
‘열하일기’는 중국을 다녀온 여행기로, 동시대의 다른 저적물인 연행록(燕行錄)이나 연행기(燕行記) 등은 당시 중국 수도인 ‘연경(지금의 북경)을 다녀온 기록’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붙이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나, 이 책에는 ‘열하일기’라는 다소 이색적인 명칭이 붙어 있다.
‘열하’는 당시 중국 청나라 황제의 피서지가 있던 곳을 뜻하는 지명으로, 당시 사행단을 따라 청나라 수도인 연경을 방문했던 박지원은, 열하로 피서를 떠나있던 청 황제를 만나기 위한 일행들의 예정에도 없던 추가 일정에 동행한다. 조선에서부터 청의 수도인 연경까지, 그리고 다시 열하까지 여행하면서 그 과정과 견문한 내용을 위주로 ‘열하일기’를 저술한다.
# 문학의 보고, 독서 토론과 수필가들의 필독서
연암의 ‘열하일기’는 조선의 르네상스 찬양이면서 조선의 상징적 베스트셀러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이제라도 꼭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열하로 가는 길은 가슴 떨리는 조선 문학의 순례이다. 이 책에서는 열하를 다녀온 여정 말고도 그의 삶에 대해서도 연암집을 포함시켜 열하일기와 연관을 시켰다. 그간 열하일기와 관련된 책이 번역본 아니면 현장 추적 사진 등을 포함한 형식이다. [조선의 꽃, 열하일기]는 문학적 특성이 느껴지도록 다른 연행록과 비교해 다양성을 구비했다. 그의 일신수필에서 비롯해 수필이란 말이나온 점을 상기해 수필적 문체를 시종 사용해 읽기 쉽게 그려냈다.
‘열하일기’에는 당대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야 할 수많은 작품이 수록돼 있어 그야말로 문학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열하일기’는 여행가이면서, 여행기가 아니다. 그것은 여행이라는 점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고, 그 안에서 삶과 사윤, 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다니고 종래는 마음속 큰 장막을 거둬 시대를 거슬러 갓 맑게 한다.
중국과의 관계가 긴밀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 시대, 대규모 사행단을 꾸려 공식적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사행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당시 ‘문화 선진국’인 중국 여행 기회를 얻는 일은 당대의 많은 지식인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박지원은 사행단의 공식적인 일원이 아니면서도 사행단과 함께 중국을 방문했다. 어쩌면 이러한 특별한 위치가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열하일기’를 탄생시키게 한 원동력이 됐는지도 모른다.
#열하일기의 여행길을 따라 여행한 저자의 열행 기록들
-모르고 있었던 박지원의 여행 일화들
이 책에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함께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수록돼 있다. 원본에 충실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연암 박지원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돼 열하일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열하를 여행하는 길에서도 그의 특이한 에피소드들이 줄을 잇는다. 재치 있는 입담을 가진 박지원의 이야기를 저자가 낱낱이 더해 기록했다.
고봉준령을 넘는 산길, 작가는 그러한 그의 특색 있는 글을 낱낱이 파헤치는 심정으로서의 안내를 선택했다. 특히 그의 ‘사이론’과 감정의 창출력은 아주 특색이 있다. 이를 경계한 그의 곡예는 마치 안성 바우덕이 축제의 남사당패 줄타기를 보는 듯 놀이공원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아슬아슬하다. 그러면서 남다른 후련함이 있다.
백성과 군주, 권문세가와 백성 그 사이게 그가 존재한다고 그는 늘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열하를 집필할 무렵 그의 나이 마흔넷으로 한창 중년에 접어든 나이다. “길은 저 강과 언덕 사이에 있다” ‘사이’는 경계를 또한 말한다. 이것과 저것, 중화와 조선, 옛날과 지금, 삶을 분절하는 수많은 이분법을 격파하면서 제3의 새로운 길을 창안하는 길, 그것이 곧 연암이 말하는 ‘사이’이고 도가 아니었을까. 이를 알자면 자연 그가 누구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연암은 술꾼이었다?
가는 곳마다 술에 관한 일화가 끊이지 않았던 연암 박지원. 술꾼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연암은 술집 간판 뿐 아니라 표정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연히 그의 글은 조선 술꾼의 취향으로 읽어야 제 맛이다.
천의무봉 재질의 글발에 말술을 마다하지 않는 술발 덕분에 그의 글은 더욱 빛이 났다. 그이 글 샘은 주경야취(酒耕夜醉)로부터 발원한다. 술을 마시면 펄펄 날았다. 취할수록 맑아지는 글샘. 신라시대에 후래삼배(後來三杯) 주령구(酒令具)가 후세에 이르러 이렇게 번창할 줄 누가 알았던가. 날로 진화하는 술꾼의 역사, 술꾼들은 그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오늘도 변함없이 술로 푼다. 갖은 고초 속에서도 술꾼의 전통은 날로 유려하기만 하다.
그의 아들 박중채는 과정록(過程錄)에서 ‘선친이 글은 유실된 것이 많다. 주금책 3편의 경우 동년배나 장로(長老)들 중에 그 구어(句語)를 외어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세상에 널리 퍼져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가 그 권을 비워 두어 훗날 써서 메꾸기를 기다리노니, 혹시 동호자가 본다면 수고를 아끼지 말고 등사하여 들려주기를 바란다. 이는 당세의 대아 군자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라고 적었다.
‘주금책’이란, 바로 술을 금하는 방법이라는 책이다. 술이라면 징글징글 하다면서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이 조선 술꾼의 전통이다.
안데레사 newsfreezone@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