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더불어민주당대구광역시당 역사문화특별위원회 주최 및 대구역사탐방단 주관으로 20일 영남일보 뉴미디어부장 박진관 기자(대구 지오그라피 / 저자)의 역사해설로 시민과 함께 대구역사탐방을 일제식민지시기 대구지역 자주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 다니며 10Km를 도보로 탐방했다.
다음은 “대구 지오그라피” 저자 박진관 기자가 대구역사탐방을 안내하며 자주독립운동을 회상하는 역사해설 전문이다.
◆대구삼일운동
1919년 3월8일 대구봉기는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대구출신 이갑성이 2월24일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선교사를 돕는 직책), 백남채 · 김영서 계성학교 교사, 이재인 신명여학교 교사 등 대구지역 3처 교회(현 제일·남산·서문교회) 지도자와 만나 서울에서의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대구에서도 궐기할 것을 권고하면서 촉발됐다.
이만집, 김태련 등 기독교계 지도자와 홍주일 천도교 경북교구장 등은 큰장(옛 서문시장) 장날인 8일 오후 1시에 봉기를 하기로 모의하고, 학생을 비롯해 민중동원에 나섰다. 이후 김태련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계성학교 아담스관 지하실 등지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당시 일경이 거사에 앞선 4일과 7일, 각각 홍주일 교구장외 2명과 백남채 등 주모자 수명을 체포해 구속시키면서 특별경계령을 내리는 등 감시를 강화했다.대구만세운동이 대구인구수에 비해 참여자가 비교적 적었던 이유는 일제가 경상도의 중심지였던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을 사전에 강력하게 저지했고, 유림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다.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학생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만세운동은 활기를 띠었다. 당시 계성학교에선 박태현·김삼도·심문태 등 35명이 동참했고 신명학교에선 교사였던 이재인과 임봉선, 이선애 등 50명이 참여했다.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은 대남여관 주인의 아들 대구고보(현 경북고)4년생 허범과 접촉해 신현욱·백기만·하윤실 등 대구고보 간부학생에게 거사계획을 알려줌에 따라 대구고보생 200여명이 만세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또 동산성경학당(현 영남신학대)강습생 20명도 참여했다.
3월 8일 서문 밖 그날의 함거사 하루 전,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지만 8일 오전 토요일에는 활짝 개었다. 정오가 되면서 큰장에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삼엄한 일경의 감시 속에 대구의 민족지도자를 비롯한 계성학교 학생은 한복을 입고 장꾼인 것처럼 변장하고, 거사장소로 향했다.
신명학교 학생도 오전 수업을 마치고 빨래를 하러 가는 척하며 삼삼오오 목적지로 향했다. 하지만 오후 1시에 도착하기로 했던 대구고보 학생이 오지 않아 1시간 이상 행사가 지체됐다. 2시를 넘어서자 대구고보 학생 200명이 교복을 입은 채 일경의 저지를 뚫고 뛰어왔고, 동산성경학원 학생도 나타났다.
수천여명이 운집한 시장 안은 긴장감 속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김태련 조사가 준비해 둔 달구지 위에 올라섰다. 그는 독립선언문을 읽으려다 일경의 제지로 공약3장만 낭독했다. 이어 이만집 목사가 달구지에 올라 힘차게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이에 1천여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품에서 꺼내 일제히 따라 외치며 지도부를 따라 행진했다. 일경이 완강히 제지했지만 이미 터진 봇물이었다. 선교사의 일을 돌보던 농민 안경수가 태극기를 꽂은 깃대로 기마경찰이 탄 말의 엉덩이를 찌르자 말이 달아났다. 그 사이 선두행렬이 앞을 헤치고 전진했다.
1㎞가 넘는 만세운동행렬은 큰장 강씨네 소금가게 앞(옛 동산파출소)에서부터 동산교를 지나 본정(현 경상감영길)~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로 향했다. 일경은 총칼로 저지하기를 멈추고 행렬을 지켜보며 예의주시했다. 만세소리는 대구전역을 뒤덮었다.
이윽고 대구경찰서 부근에서 일촉즉발의 대치가 있었다. 경찰서 옥상에는 기관총이 시위대를 겨누었다. 하지만 발포하지 않았다. 섣불리 발포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발전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세행렬은 대구경찰서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꺾어 경정(현 종로)으로 진로를 바꿨다.
지게꾼·농민·양복사·잡화상·구둣방·약방주인·머슴·기생까지 합세해 시위대가 크게 불어났다. 이만집 목사와 그의 아들 이성해(계성학교), 김태련 조사와 아들 김용해 등 부자가 동참한 경우도 있었다.
당황한 일제는 더 이상 만세운동이 확대되면 걷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헌병대와 대구주둔 80연대 병력을 동원해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만세행렬은 종로를 거쳐 지금의 약전골목~중앙치안센터~대구백화점 쪽으로 향했다.
맑았던 날씨가 흐려지고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일제는 달성군청 앞에서 총칼과 곤봉으로 평화적인 시위대를 구타하며 무차별 진압을 했다. 군중은 흩어지면서 산발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전날 비가 내려 길이 질척해진 까닭에 피와 흙이 범벅이 됐으며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 김태련의 아들 김용해는 아버지가 맞는 것을 보고 저항하다 심하게 구타를 당해 실신했다.
3월 10일 남문 밖 함성만세운동은 10일에도 계속됐다. 일경에 검거되지 않았던 계성학교 교사 김영서와 학생 김삼도·박태현·박성용·박재헌, 전당포업자 김재병, 농민 이덕주 등은 대구 남문 밖 덕산정시장(현 남산교회 부근)에서 오후 4시에 봉기했다.
3처 교회 신도를 비롯한 200여명의 기독교인과 학생이 만세를 부르며 대한독립을 외치다 무자비하게 해산된 뒤 65명이 붙들려갔다.
재판결과8일과 10일 만세운동가담자 총225명이 검거되고, 계성학교 학생 35명과 대구고보 학생 7명을 비롯해 76명이 실형을 언도받았다. 만세운동의 주모자인 이만집과 김태련은 각각 징역3년과 징역 2년6월형에 처해졌고, 김영서·백남채·최상원·김무생 등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또 권희윤·박제원·최경학 등이 1년6월, 이재인·임봉선·신현욱·허범·박태현 등이 1년, 심문태·박성용·허성도·김삼도 등이 10월, 백기만 등이 징역 6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만세운동 이후3·8대구만세운동의 여파는 대단했다. 경북전역에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0일 계성·신명여학교, 대구고보가 휴교령에 처해졌지만 다행히 몸을 숨겨 피한 계성학교 김수길·이영식·허성도·이덕생 등 재학생과 졸업생은 비밀결사조직인 혜성단(惠星團)을 조직해 격문을 배포하는 한편 시장철시(撤市)운동, 친일주구배의 반민족행각 규탄, 독립운동군자금 마련국내외만세운동 연계에 나섰다.
대구고보는 만세운동을 전후해 많은 학생이 퇴학을 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맹휴학운동으로 저항했다. 대구고보는 1922년~1936년 입학생 중 50%만이 졸업을 하는 비정상적인 상태가 지속됐다.
한편 독립만세운동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경북지역 유림 김창숙·장석영·송준필·송규선 등은 경남지역 유림을 규합해 1919년 개회 중인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일명 ‘파리장서사건’을 주동했다. 파리장서 서명자는 총 139명으로 이 중 60여명이 경북출신이다. 대구에선 월배 지역 단양우씨 문중 등이 동참해 옥고를 치렀다.
동화사 지방학림(學林)만세운동불교계에선 만해 한용운, 백용성 스님 등 2명이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됐다. 불교계 지도자였던 두 스님의 3·1만세운동 참여는 불교계 종립학교였던 중앙학림(현 동국대) 학생들에게 이어진다.
만해는 중앙학림의 강사였다. 중앙학림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독립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했다.
3·1운동은 중앙학림 학생들에 의해 해인사, 범어사 등 전국사찰로 확산됐다.이들 가운데 중앙학림 학생으로 달성군 공산면 진인동 출신인 윤학조가 3월23일 대구로 내려와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 동화사 지방학림(현 동화사 승가대학) 학생이었던 후배 권청학·김문옥 등을 만나 불교계의 만세운동참여 소식을 알리고, 만세운동을 할 것을 권고했다.
이들은 처음 공산면 백안동 백안장터에서 궐기할 것을 계획했으나, 장터가 좁고, 사람도 적으니 대구에서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월28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권청학·김문옥·이기윤·허선일·김종만·김윤섭·이보식·박창호·이성근 등이 동화사 심검당(尋劒堂)에 모여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고, 이틀 후 대구 덕산정시장(남문 밖 시장) 장날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거사 하루 전 동화사 포교당이었던 보현사 김상희의 집에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30일 오후 2시쯤 덕산정시장 안에서는 큰 장대에 달린 태극기가 나부끼고,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생들을 선두로 장꾼과 민중 수천명이 시장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일본 군경이 총칼로 이들을 즉각 해산시키고 주동자 10명을 잡아갔다.
이날 시위로 윤학조, 권청학, 김문옥 등 10명이 검거돼 모두 10개월의 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3·30대구만세운동과 관련해 고봉선사(1890~1961)가 주도한 혐의로 마산교도소에서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고봉선사는 대구출신으로 혜봉선사의 제자이며 숭산스님의 스승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봉선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과 연루됐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동화사 주지는 김남파(金南坡)로, 1917년 조선총독부에 비슬산 대견사를 없애자고청원하는 등 친일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동화사 만세운동 평가동화사는 3·30만세운동으로 10명의 애국지사가 구속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음에도 구체적인 연구가 미흡한 편이다. 실례로 만세운동과 관련해 국가기록원에 나와 있는 10명의 일본어판결문도 제대로 번역되지 않고 있다.
또한 동화사 성보박물관에도 만세운동관련 기록과 유품이 전무하다. 동화사 심검당은 당시 현 법화당 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 오른쪽에 있다. 하지만 심검당 입구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간판만 있을 뿐 만세운동 관련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정만진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 자문위원은 “부산 범어사는 범어사 학림의거를 선양하고 있는데 비해 임진왜란 당시 영남승군(嶺南僧軍)의 사령부였던 동화사가 학림소속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알리는데 소홀한 측면이 있다”면서 “동화사가 의병과 경북지역 불교계 독립운동의 본산이었음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성문 동화사 주지스님은 “광복 후 비구·대처간 분규로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소실돼 안타깝다”면서 “차제에 지방학림 학생들의 학적부를 찾는 등 독립운동사료를 수집해 동화사가 만세운동에 기여했음을 밝히고 고양하겠다”고 밝혔다.
◆대구교남YMCA
대구YMCA 80년사'에 따르면 1919년 2월 15일 대구는 3.1만세운동 정보를 최초로 접했다.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단에서 특파된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가 교남기독청년회 창립지도자 백남채를 만나 대구에서도 3월 1일 봉기할 것을 전달하면서다. 계성학교 교사였던 백남채는 이와 별도로 동생 백남규와 서병우 등으로부터 국제정세를 들었다.
이들이 3.1운동을 직접 제안받은 것은 2월 24일이다.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이며 기독교측 대구경북지역 독립선언서 배포책임자 이갑성이 대구에서 이만집, 김태련, 백남채 등을 만나 대구궐기를 권유했다. 독립성취에 회의를 가졌고 일본의 무력행사에 따른 민중 희생을 걱정했던 이만집은 처음엔 회의적이었다.
이갑성은 국내외 여론, 동향 등을 설명하며 이만집을 설득했고 2월 26일 세브란스 의전 학생 김대진을 보내 재차 권유했다. 그후 3월 1일 경성과 평양, 원산, 선천 등에서 만세운동이 개시됐고 3월 4일 세브란스 의전 학생 이용상과 최재화를 통해 독립선언서가 도착하면서 거사 준비가 본격화됐다.
3월 3일 최재화가 대구시위 주도를 거듭 간청하자 거사를 결심한 이만집은 동지부터 규합했다. 교남기청 총무 김태련,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를 불러 만세운동 참여를 설명했다. 계성·신명학교 교사, 기독청년회장 경력과 활동으로 맺은 인맥을 활용해 많은 동지를 모았다.이만집은 서문 밖 장날인 3월 8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남성정, 남산정, 신정교회 교인, 계성과 신명학교 학생 등이 참석키로 했다.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과 동산성경학원 수강생도 합류하기로 했다.김태련은 3월 7일 밤 자택에서 이만집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와 현수막도 준비했다.
낌새를 차린 일제 경찰의 경계는 삼엄했다. 3월 4일과 7일에는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과 백남채 등이 체포됐다. 하지만 3월 8일 시위는 차질 없이 진행됐다.기독교계 지도자와 학생들은 장꾼 행세로 모여들었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한복을 입고 잠입했고 이선애가 이끈 신명여학교도 참여했다.이만집과 김태련은 달구지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계획이었다. 김태련이 숨겨온 선언문이 경찰에 압수당하자 다급해진 이만집이 '만세'를 불렀다. 기독교인, 학생, 일반인 등을 합쳐 만세운동 참여인원이 1000여명에 달했다.
만세 대열은 서문 밖 시장에서 동산교, 구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종로, 남성정 파출소(현 약전골목),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까지 행진했다. 일제는 군경을 동원해 시위대 해산에 나섰고 이날만 157명을 체포했다. 대구만세운동은 9일과 10일에도 계속됐다. 12일부터는 경북 의성을 시작으로 경북 전역으로 확산됐다.
서문시장 장터서 '대한독립만세' = 옛 교남YMCA회관은 대구 약령시에 있다. 약령시는 1658년(조선 효종) 전국 한약재 수집을 위해 개설한 한약재 유통전문시장으로 715m 거리에 한약방들이 밀집된 곳이다. 당초 대구성 북문 근처에 1년에 두 번 개설되다 1908년 일본 상인들 요청을 받은 경북관찰사 박중양이 대구성벽을 철거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연락 거점이 되어 탄압을 받다가 결국 1941년 폐쇄됐다가 광복 후 다시 열렸다. 약령시 자체가 독립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는 셈이다.약령시 중간에 위치한 옛 교남YMCA(대구시 중구 남성로 24)는 경상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서울의 3.1만세운동 직후 지방인 대구에서 3.8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했던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평가 받고 있다.교남YMCA는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의 회합 공간이었으며 물산장려운동, 농촌운동, 신간회 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공간으로 사용돼 대구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크다.
옛 교남YMCA의 주요 임원과 회원 17명이 건국훈장 애국장 등 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독립유공자훈장을 받은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약전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인 옛 교남YMCA 건물은 미국 북장로교 대구선교지회(선교사 블레어)가 1914년 청년전도를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1층과 2층 사이는 돌림띠로 장식하고 창 상부는 아치, 하부는 받침대 장식에 사각창문을 설치하는 등 동서양 양식이 결합된 1910~20년대 근대건축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그러나 1938년에 '조선약업 주식회사'에 매각된 뒤 주인과 용도가 여러 번 바뀌었다.
1955년 '한국흥업은행'에 경매 됐고 1968년에 외과의원으로, 1973년엔 정형외과 입원실로 사용되기도 했다.2008년에는 '현대백화점 대구점'이 들어서면서 철거 위기에 몰렸다. 인수한 건물주가 도시형 생활주택을 짓기 위해 2015년 건축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이 부지에는 옛 교남YMCA 회관(119㎡)외에 한옥(178.5㎡, 1961년 준공) 1채와 2층 철근 콘크리트구조인 이해영 정형외과의원(364.5㎡·1966년 준공) 등 각각 다른 3가지 건축구조와 양식의 건물이 있었다. 철거 위기를 넘긴 것은 민관이 함께 나서면서다.
대구 중구는 건물의 역사성과 건축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재단법인 대구YMCA 유지재단과 합심해 해당 건물을 모두 매입(2011년 12월 16일), 새로운 공간으로 보존키로 했다. 대구YMCA는 자체 예산 2억원과 시민모금 3억원 등 5억원을 모아 2013년초 옛 교남YMCA회관을 인수했다.
중구는 27억7000만원으로 한옥과 이해영 정형외과의원 건물을 매입했다.현재는 대구YMCA가 옛 교남YMCA건물을 대구3.1운동 기념관과 YMCA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철거 위기 독립운동 거점, 민·관이 보전 = 건물 외부에는 대구 3.1만세운동기념관 현판과 대구 옛 교남YMCA회관 안내표지판, 신간회 대구지회 비서, 경북서원 간판 등이 걸려 있다.
1층에는 3.1운동의거 대구조직연락도와 대구시위도, 경북도와 경남도의 3.1운동 궐기도, 김용해 비석내용, 독립선언문,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고등경찰요서 등이 전시돼 있다. 1914년 건축 당시 모습으로 복원된 2층에는 교남YMCA출신 독립운동 유공자인 17명과 3명의 선교사 흉상과 활동경력이 소개돼 있다.
옛 교남YMCA회관은 선교사들이 영어와 일어강습을 하는 강의실과 독서실, 성경공부방 등으로 운영됐다. 이곳에는 이만집, 김태련, 최종철, 박영조, 이희봉, 백남채, 최경학, 정광순, 김만성 등과 같은 기독교회의 젊은 청년들이 몰려들었다.이들 청년들은 1915년 교남기독청년회를 조직했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 이어 터진 3.8대구만세운동의 주역이 됐다.
당시 대구에서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대부분의 인물이 대구 기독교계 지도자이면서 교남기독교청년회 청년들을 교육한 사람들이다. 옛 교남YMCA의 창립발기인은 12명이었다. 외국인선교사 3명을 제외한 9명 가운데 이만집을 비롯 김태련, 김영서, 백남채, 정광순, 권희윤, 이재인 등 7명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들은 최소 6개월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이들 중 이만집과 김태련은 만세운동 준비부터 시위까지 전면에 참여했다. 김영민 대구YMCA 사무총장은 "옛 교남YMCA 발기인들의 만세운동 주도는 민족의 운명과 함께하는 선교공동체, 지역사회 주민의 애환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을 함께 나눈 기독교사회운동체로서 뿌리내린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3.1운동 결과 혜성단과 자제단
100년 전 3월8일 대구에서 시작된 3·1운동은 5월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까지 108회, 2만1천여 명이 참가했다. 대구경북에선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70명이 부상했으며 700여 명이 체포됐다.
이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이규환(15세)을 포함한 학생 피검자는 222명이었다. 대구경북의 3·1운동은 학생이 앞장섰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계성학교와 대구고보 학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3·1운동 후 광복이 될 때까지 계성학교 출신 서훈자는 32명, 대구고보 출신 서훈자는 5명이다. 대구고보는 3·8만세시위 당시 전교생 239명 가운데 200명이 참가했다. 신암선열공원에 묻혀있는 백기만을 포함, 48명이 체포됐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나 서훈받지 못했다.
대신 일제당국은 대구고보생 피검자 48명 중 20명에게 퇴학, 정학, 근신의 처분을 내렸다. 대구고보 학생은 동맹휴학으로 맞서 1919년 5월20일에야 정상수업이 가능했다. 이후 대구고보는 1920~30년대 중반까지 계속해 지하·반일조직을 만들어 10차례 가까이 동맹휴학으로 저항했다.
‘혜성단(慧星團)사건’은 일명 ‘최재화사건’으로 불린다. 일제는 ‘관공리사직협박 및 폐점위협사건’으로 지칭하고 있다. 혜성단은 3·8대구만세운동 후 대구부 상점 주인에겐 폐점하지 않으면 불을 지르겠다는 격문을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탄압한 대구경찰서장, 박중양, 백응훈 등 친일관리와 자제단 간부에겐 암살하겠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송했다.
격문에는 “서양인 신문기자가 대구에 와서 시내를 순시하므로 조선인은 독립 자유를 바라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철시, 폐점하라! 또 상인은 일본 상인과 금전, 물품거래를 하지 말라! 신문지에 전해지고 있는 총독부의 유고나 기타 경찰관의 말은 거짓이므로 믿지 말라! 폐점하지 않는 자에게는 강제 수단을 쓸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4월1~2일 경정(현 종로) 일대 상점들은 폐점을 하고 2일에는 큰장 점포 80여 곳이 문을 열지 않았다. 4월8일 대구경찰서장에게 보낸 격문에는 “너는 왜 3월8일 독립만세를 부른 무고한 동포를 검거하였는가! 너희들 같은 자는 암살당할 때가 있을 것이니 각오하라!”고 썼다.
혜성단은 계성학교 학생들과 독립지사 최재화가 깊숙하게 관련된 비밀결사체다. 1919년 3월16~18일 대구만세시위에 참가했던 계성학교 학생 김수길이 같은 학교 이영식, 허성도, 이기명, 이종헌 등과 항일투쟁 방안을 논의하다 선산 해평 출신 전 경신학교 교사 최재화 집사를 지도위원으로 모셨다.
최재화는 이갑성과 함께 서울에서 3·8대구만세운동의 배후 연락책으로 활동했으며 4월3일 해평에서의 만세운동과 만주 신흥무관학교 생도모집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상주경찰서에 체포됐으나 일경 두 명을 때려눕히고 탈출해 이듬해 중국 상해로 망명, 의열단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중국에서 기독교에 투신했다.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돼 중국에서 한인교회를 세웠다. 31년 대구제일교회에 부임해 현재의 대구 중구 남성로 제일교회를 건축, 목회활동을 이어갔다. 또 계명대의 전신인 계명기독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에 그의 추모비가 있으며 성서 계명대에 그의 호를 딴 ‘백은관’이 설립됐다. 현재 4남 최성구 전 안과원장(89)이 대구 달서구에서 살고 있다. 구정모 대백회장의 부인 최정숙 아이에스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가 손녀다.
이영식(현 대구대 설립자)은 3월12일 고향인 선산군 인동면 진평동에서 인동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독립운동으로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됐다. 그는 서문교회 목사, 간도 제일교회 목사 등을 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다 광복 후 교육과 복지사업에 투신했다. 혜성단 창단은 1919년 4월17일이다.
김수길과 최재화는 이날 대구 남산동에서 이명건, 이덕생, 이수건, 이영옥을 추가로 가담시켜 만주 등 해외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이를 위해 인쇄계(최재화·김수길), 배달계(허성도·이덕생·이종식·이종헌·이기명), 출납계(이수건), 만주 출장계(이영옥), 연락계(이명건)를 두는 등 조직과 기능을 확대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섰다.
이튿날 근고동포(謹告同胞), 경아동포(警我同胞),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 제목의 선전물과 인쇄물을 시내에 붙여 대구부민에게 독립운동참여를 독려하고, 민족자산가에 우편물을 발송해 독립운동자금지원을 호소했다. 4월22일·4월27일·5월7일에도 선전물을 뿌렸다.
경고관공리동포에는 “조선인 관공리가 일제의 편에 서서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것은 동족의 원수가 되는 것이니 속히 각성하여 사직하고,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백은 최재화목사’ 전기에 따르면 선전물은 최재화가 기초했다고 나온다.
이명건은 이여성(李如星)이란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당대 최고의 화가 이쾌대의 형으로 그 역시 대구화단(畵團)의 개척자였다. 그는 동아일보 조사부장 때 손기정과 관련한 일장기 말소사건에 개입돼 해직된다. 광복 후 건국동맹 활동을 하다 47년 월북했다.
대구 수성동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8살 때 서울로 가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중앙학교 동기생 김원봉과 김두전을 만나 의형제를 맺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의했다.
셋의 멘토는 약산의 고모부인 밀양출신 독립지사 황상규다. 황상규는 셋에게 ‘별과 같이, 산과 같이, 물과 같이 오직 민족을 위해 지조를 지켜라’는 의미로 각각 여성(如星), 약산(若山), 약수(若水)란 호를 지어줬다.
이명건은 1917년 부친 소유 땅을 팔아 4만5천원으로 중국 길림성 신장에서 농장을 마련해 독립운동거점으로 삼으려다 도적의 습격을 받아 수중의 돈을 거의 다 뺏기는 바람에 실패하고 낙향해 있던 중 김수길 일행과 합류했다. 그는 최재화의 경신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3·8만세시위에 참가한 이덕생은 계성학교 졸업 후 혜성단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뒤 장성희와 결혼하고 중국 상하이로 가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남산교회 이문주 목사의 아들이다. 이덕생은 이후 임시정부 우파 민족당 한국독립당 기관지인 ‘진광’의 주필을 했다.
그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을 역임하다 39세에 사망했다.혜성단의 활동이 일제가 만든 자제단과 충돌하자 일제는 혜성단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결국 5월14일 대구 경정의 여인숙에서 김수길을 체포한 이후 11명의 단원이 줄줄이 잡혔다.
1919년 7월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김수길은 징역 2년6월, 이종식은 징역 2년, 이명건 외 8명의 동지는 각각 1년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10월9일 고등법원격인 대구복심법원에서 형량이 늘어나 김수길은 징역 4년, 이명건, 이영옥, 이종식은 징역 3년에 처해졌다. 중국으로 탈출한 최재화는 궐석재판에서 도합 8년형을 선고받았다.
3·1운동 방해공작 단체 자제단(自制團)은 혜성단과 대척점에 선 단체였다. 3·1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퍼진 가운데 탄압과 폭력에도 숙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제가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었다.‘스스로 억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각 지역의 민간유지자를 참여시켜 관제 성격을 띠고 있어 자제회라고도 불렀다.
지역에 따라 자위단(경기도), 자성회(전북), 자위회(청도)라는 명칭을 썼다. 부끄럽게도 대구는 1919년 4월6일 전국에서 처음 대구부청에서 관민 72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제단이 결성됐다. 이어 청주(4월15일), 평북 정주(4월18일), 안동·성주·경주·칠곡·김천·선산(4월26일), 평양·전주(4월26일이전), 울산(5월6일), 황해도 재령(5월9일), 춘천(5월18일), 군산(5월21일) 등으로 퍼졌다.
하지만 6월 이후부터 활동이 중지돼 자취를 감췄다.당시 대구경북지역에서 발기인으로 참여한 유지는 67명으로 대구를 대표할 만한 지주나 자산가였다. 지금의 상공회의소 상공위원급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부윤이 이들을 직접 선정했으며, 모임은 대구부청에서 했다.
자제단은 아래 구장을 두고 자제단원의 관리원을 맡게 했다. 구장은 몇 사람의 찬성원을 임명해 해당 구의 주민 전체를 자제단 단원으로 가입토록 강요하는 역할을 맡았다.내용은 소요를 진압하고 불령선인을 잡는데 협조해 달라는 것과 시위참여를 자제시키라는 일종의 강제규약이었다.
특히 그해 4월 기존의 보안법보다 5배나 강화된 조선총독부 ‘제령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을 시행해 이들을 옥죄었다.우현서루를 설립해 대구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던 소남 이일우도 이때 일제의 강요로 자제단에 가입됐다.
그는 자제단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 제령 7호를 위반해 주요 사찰 대상이던 조카 이상정의 행방에 관해 일경으로부터 심문을 받기도 했다. 1919년 4월 대구부청에서 조사한 대구지역 총 호수는 4천28가구였는데, 이 중 3천787가구가 가맹부에 가입했다. 10가구 중 9가구가 가입한 셈이다.
지역 내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제단에 포섭되고 겉으로는 협조한 것처럼 보였으나 부민들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