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25일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밝힌 것처럼 유엔 사무총장은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직업(the most impossible job)’이라는 말이 유엔 내에 널리 퍼져 있다. 강대국 간 세력다툼의 축소판처럼 여겨지는 유엔에서 사무총장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역대 총장이 대부분 국제사회에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개도국, 중소국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유엔 내에서 작용하는 국제적 역학관계가 복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엔 사무총장 역할의 한계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국제사회의 모순을 유엔 사무총장이 해결할 수는 없다. 역대 어느 총장도 모든 나라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어느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언론이 내놓는 총장에 대한 평가는 맞는 부분도, 틀린 부분도 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21일 반 총장을 ‘실패한 리더’로 규정하고 “역대 최악의 총장”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코노미스트가 “반 총장이 10년 동안 임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우수한 능력과 자질을 갖췄기 때문이 아니라 거부권을 가진 5개 상임이사국이 반대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무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은 모든 사무총장에게 해당되는 비판이다. 5개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라도 반대하는 인물은 사무총장이 될 수 없는 유엔의 구조적 모순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엔 사무총장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직접 얽히지 않은 이슈에 천착하게 된다. 그런 이슈가 아니면 운신하기 어렵고 업적을 남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반 총장도 강대국과 각을 세우는 용기를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난민구호와 평화유지 분야 등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청렴도가 높고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은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특히 반 총장은 기후변화 문제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도 “지난해 말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반기문의 성과”라고 평가했다.
베테랑 유엔 전문기자의 반 총장 비판
하지만 반 총장이 역대 총장에 비해 더 나은 평가를 받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엔 취재를 전문으로 하는 1인 매체 ‘이너시티프레스’의 매튜 리 기자(50)도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10년 넘게 유엔만을 대상으로 취재·보도활동을 해온 리 기자는 경향신문과의 e메일 인터뷰에서 반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은 일을 몇 가지 지적했다.
우선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파견된 유엔 평화유지군의 아동 성폭행 범죄를 들었다. 그는 “2014년 이후 소년들이 평화유지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례가 42건이나 확인됐는데 이 중 단 1건만 기소가 이뤄졌고, 반 총장은 평화유지군의 책임자인 에르브 라드수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리 기자는 “라드수가 반기문이 사무총장에 선출될 수 있도록 협조해준 프랑스 출신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09년 스리랑카 내전 막바지에 일어난 타밀반군 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유엔이 미온적으로 대응한 것도 지적했다. 당시 반 총장은 자신의 비서실장인 비제이 남비아를 유엔 특사로 이 지역에 파견했다. 하지만 남비아가 인도 출신으로 타밀반군에 반대하는 성향이라는 점에서 유엔이 이 문제를 중재할 의사가 있느냐는 비판을 받았다. 유엔의 인도주의 업무를 담당하는 한 관계자는 “민간인 대량살상이 벌어질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반 총장은 평화유지·구호를 맡을 스태프를 들여보내는 결정을 차일피일 미뤘고 유엔 직원들은 눈앞의 참상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이 일은 유엔 직원들의 임무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고,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전했다.
2010년 아이티 지진 참사 당시 유엔이 콜레라에 감염된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지진 현장에 질병이 창궐했다는 논란도 있다. 당시 콜레라가 퍼지면서 3년간 약 1만명이 사망하고 70만명 가까이 감염됐다. 피해자들은 역학조사 등을 근거로 2013년과 2014년 유엔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유엔은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리 기자는 “반기문은 관리 의무 소홀로 아이티에 콜레라를 퍼뜨려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서 유엔을 위선자로 비치게 했으면서도 소송 문서 뒤에 숨어서 피해자들에게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총장으로서 처신 논란
반 총장이 이번 방한에서 사실상 대권 도전 의사를 밝힘으로써 마음이 이미 한국 정치판에 가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가 알게 됐다. 국내정치적 야심을 위해 유엔 사무총장 직위를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반 총장의 태도는 전임자인 코피 아난 총장이 퇴임 후 가나의 대통령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과도 대비된다. 사무총장 퇴임 후 개별 회원국의 정부직을 맡지 못하도록 한 1946년 유엔총회 결의에 어긋난다는 말도 나온다. 리 기자는 “유엔 일부 외교관들이 반 총장의 방한을 보면서 ‘애처롭다(pathetic)’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반 총장 임기는 7개월 남았다. 이번 한국 방문으로 반 총장이 남은 기간 동안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반 총장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언론에 당부했지만, 정작 자신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처신하지 못한 셈이다.
[분석] 협치 거부하고 정쟁 유발로 내부 단속, 반기문 카드까지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상시 청문회법)에 거부권을 던지면서 정국은 '시계 제로'가 됐다.
27일 임시국무회의는 전격적으로 열렸다. 총리실 출입기자들도 이날 오전에 임시 국무회의 예정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별다른 공지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언론이 31일, 혹은 7일에 거부권이 행사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그러나 보란듯이 틀렸다. 이날 오전 총리실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결국 20대 국회 개원일(30일)을 사흘 앞두고 19대 국회에 이 법안을 폐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거부권 행사 날짜를 급히 앞당겼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는 이미 19대 국회 폐기로 귀결될 것이라는 법적 검토를 통해 나름의 논리를 세워놓았을 터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위헌 소지'까지 언급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권한을 강화하는 국회법 개정안만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이 됐다. 국회의 권한 강화, 특히 야당의 권한 강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총선 패배로 레임덕 국면으로 접어든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국회를 묶어 두려 하고 있는 셈이다.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정치권 안팎에서는 박 대통령의 의도에 대한 분석과 함께, '친박계 주연'의 몇몇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기름 뱀장어'를 건 박근혜의 '도박'은 성공할까?
먼저 거부권 행사의 성격은 박 대통령의 '정쟁 유발'로 볼 수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주도한데다, 일부 새누리당 의원이 동조해서 처리한 법안인데, 굳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의도적으로 정국을 뒤흔든 형국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해 6월 국회의 정부 시행령 견제 방안을 담은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던 상황과 비교해보면 초라한 정략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박 대통령은 원내대표까지 강제로 밀어낼 수 있는 힘을 쥐고 있었다. 반면, 지금은 단순한 법리 싸움에, 숫자 싸움으로 난관을 타개하려 하고 있다. 정면 돌파가 아니라 소심한 도발이다. 물론 정면돌파를 감행할 힘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격세지감이다.
거부권 행사의 충격파는 여러 현상을 낳게 될 전망이다. 친박계와 비박계는 좋으나 싫으나 힘을 합할 수밖에 없게 됐다.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친박)과 함께, 야당에 밀리면 안된다는 위기감(비박)을 결합시켜 하나의 목표(거부권 재의결 저지)를 향해 채찍질하는 형국이다. 양 계파는 각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야당의 재의결 추진을 무조건 거부해야만 한다. 그게 대통령과 자신들이 사는 길이다. 적과의 전투를 앞두고 정쟁을 유발해 여당 내부를 단속하는 방식의 전형이다.
야당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박 대통령의 의중을 분석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대통령의 정쟁 유발에 말려들기보다는,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규탄' 액션을 한번 하고 넘어가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라고 했다. 드라마틱한 액션을 취하지 않고 '실력 과시' 수준에서 공세를 마감할 것이라는 얘기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한 책임을 대통령 스스로 지도록 한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만약 19대 국회에서 이 법안이 폐기되더라도, 20대 국회에서 야당이 재추진할 가능성은 현재로서 적다. 역풍이 우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의당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국민의당 일각에서 제기됐던 새누리당과 연정론은 명분을 완전히 잃게 됐다.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국민의당의 야성(野性)을 이끌어 낸 셈인데, 이는 결국 국민의당의 '캐스팅보트 역할' 축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당의 입지를 약화시킨 것 뿐만 아니라, 새누리당의 캐스팅보트 이용권 마저 폐기시킨 것이다.
결국 여야 구분은 더 확실해졌다. 친박과 비박, 제3의 보수 세력, 제3 교섭단체 등, 어지럽게 펼쳐진 정치 구도역시 단순화됐다. 정계 개편 가능성에도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박 대통령과 친박계는 국정 운영 차원에서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회가 극한 대립으로 가면, 집권 여당의 경제 정책 구상 등이 벽에 부딛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도대체 국정을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이냐"는 탄식들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협치가 아니라 정쟁을 택했다. 민생을 내던지고, 권력 유지에 발 벗고 나선 셈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강력한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권 주자 부상과 현 정국은 묘하게 맞물린다.
실제 반 총장의 성향이 어떻든 간에 그의 이미지는 중도 확장형이다. 국민의당의 이미지와 겹친다. 그가 보수 정당의 대선 후보가 된다면, 야권에 만만치 않은 타격을 줄 수도 있다. 지금 상황만 따져봐도 최소한 인물난을 겪고 있는 새누리당의 새로운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큰 틀에서 정무 기획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같은 시나리오가 급속도로 힘이 빠지고 있는 박 대통령의 레임덕(권력 누수)을 막을 수 있느냐 여부다. 반 총장의 지지율은 향후 추이를 봐야 하겠지만, 본격적인 검증 국면에 들어서면 어떤 상황도 장담할 수 없다. 만약 거품이 빠지게 되면 박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반 총장은 아직 새누리당행을 결정하지도 않았다. 그의 별명은 '기름 뱀장어'다. 이번 거부권 행사가 박 대통령에게 반기문을 건 일종의 '도박'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