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대구=문해청 기자] 용학도서관(관장 김상진)은 17일 경북대학교 이재현 교수를 초청하여 1953년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 ‘심산 김창숙의 독립정신과 실천’을 주제로 대구경북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한 강좌를 개최했다.
다음은 [강의] 전문이다.
심산 김창숙
김창숙金昌淑(1879~1962)은 1879년(고종 16) 7월 10일(음)에 경상도 성주목星州牧(성주군) 대가면 사월리沙月里(사도실, 칠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아버지는 하강下岡 김호림金頀林(1842~1896)이고, 어머니는 인동장씨仁同張氏이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13대 종손宗孫이다.
김창숙의 자字는 문좌文佐이고, 호號는 직강直岡․심산心山․벽옹躄翁이다. ‘직강’이라는 호는 13세 때 마을 앞산의 직준봉直峻峰을 본받아 모든 일에 굳세고 굽히지 말라는 당부를 담아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널리 알려진 ‘심산’은 40세 때 맹자孟子 「공손추상 公孫丑上」의 ‘그렇지 않다. 나는 사십 세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否, 我四十不動心]’라는 구절에서 따서 스스로 지은 것이다. ‘벽옹’에 대해서는 그의 자서전을 직접 보자.
나의 성명은 김창숙이고 별호는 심산이라 한다. 내가 어려서 몹시 미련하더니 늙어서 더욱 어리석었다. 사람들이 “자네 이름을 우愚라 부르세”라고 하기에 나는 본명인 창숙을 두어두고 우가 좋다고 했다.
또 내가 어려서 잔병이 많더니, 늙어서 앉은뱅이가 되었다. 사람들이 “자네 호를 벽옹이라 부르세”라고 하기에 나는 그것도 좋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나를 ‘벽옹 김우’라 일컬었다. (벽옹칠십삼년회상기躄翁七十三年回想記)
잔병이 많다가 늙어서 앉은뱅이가 되었다고 겸허하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다가 앉은뱅이가 된 것이다. 그의 호에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의 집안 내력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삶과 독립운동에 대해서 알아가 보겠다.
2. 성주지역의 학풍
조선 후기 영남 지역 사족(양반)의 주류는 학문적으로는 퇴계학파(영남학파)에 속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영남남인(남인)에 속했다. 성주지역 역시 남인과 퇴계학파가 사족 사회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다만 붕당과 학파 형성의 초기단계인 16세기 후반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영남 지역 학문의 큰 연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남명南溟 조식曺植(1501~1572)이다. 퇴계와 그의 문인들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에 주로 포진하였고, 후에 남인南人을 이루었다.
남명과 그의 문인들은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에 주로 포진하였고, 후에 북인北人을 이루었다. 낙동강 중류 지역에 위치한 성주는 이들 학맥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고, 이 지역의 주요 학자들 역시 퇴계와 남명 모두에게 수학한 인물이 많았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성주 지역을 대표하는 학자로 떠오른 인물은 성주의 ‘양강兩岡’으로 불리는 동강 김우옹과 한강寒岡 정구鄭逑(1643~1620)였다. 김우옹은 19세이던 1558년(명종 13)에 진사가 되고, 이어 28세이던 1567년(명종 22)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했다.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이유로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선조를 호종하며 병조참판․이조참판․예조참판을 역임했다. 1599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정文貞이고,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했다.
정구는 이황과 조식의 제자로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1573년(선조 6)에 김우옹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하지만 158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