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북한을 추종해 내란을 선동하기는 했으나 구체적 실행 행위를 모의하지는 않았다는 사법부 최종 판단이 22일 나왔다.
지난 2013년 8월 28일 오전 6시 30분, 국가정보원이 이 전 의원의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 등을 전격 압수수색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이 전 의원에 대한 체포, 구속, 기소는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3년에 걸쳐 내사를 벌여온 국정원과 검찰은 사법처리에 자신감을 보였다. 곧 이 전 의원을 비롯해 이상호, 홍순석, 한동근, 조양원, 김홍열, 김근래 등 통진당 핵심 당원들이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통진당 내부 제보자 이모씨의 진술과 2013년 5월 10일 및 12일 'RO 회합'에서 확보한 녹음 파일 등 증거를 제시하며 유죄를 주장했고, 피고인들은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1심을 심리한 수원지법 형사합의12부(김정운 부장판사)는 일주일에 나흘씩 총 46차례 공판을 열었다. 검찰이 신청한 증인 88명과 피고인이 신청한 증인 23명이 법정에 나와 증언했다.
이 전 의원은 결심공판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 RO 총책으로 지목됐는데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격이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데 이를 증명하라니 기가 막힌다"고 반발했다.
1심은 이 전 의원의 내란음모·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12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나머지 피고인 6명에게도 징역 4∼7년의 중형을 내렸다.
2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9부(이민걸 부장판사)는 매주 월요일 집중심리를 통해 추가 증거조사를 실시했다. 사건 제보자 심문과 'RO 회합' 녹음 파일 검증 등을 거듭 진행했다.
검찰은 "피고인이 대한민국 정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장기간 사회에서 격리할 필요가 있다"고 이 전 의원에게 1심 때처럼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2심은 1심과 달리 RO의 존재를 제보자의 추측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내란음모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이 전 의원에 대해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으로 감형했다.
대법원 선고를 앞둔 지난해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법무부 청구를 받아들여 통진당 해산을 결정하고 이 전 의원 등 통진당 소속 국회의원 5명에게 의원직 상실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형사1부에서 전원합의체로 회부해 심리해왔다. 대법관의 견해가 엇갈렸다기보다 사안의 희소성이나 중대성을 고려해 이같이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은 이날 판결에서 "이석기 피고인 등은 전쟁이 발발할 것을 예상하고 회합 참석자들에게 남한 혁명을 책임지는 세력으로서 국가기간시설 파괴 등 구체적 실행 행위를 촉구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내란음모죄가 성립하려면 폭동의 대상과 목표에 대한 관한 합의, 실질적 위험성이 인정돼야 한다"며 "피고인들이 내란을 사전 모의하거나 준비행위를 했다고 인정할 자료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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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음모는 무죄, 내란선동은 유죄'라는 대법원의 22일 판결 결과는 지난해 말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면서 내놓은 판단과 주요 쟁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 RO 실체 사실상 인정한 헌재…부인한 대법 = 헌재는 지난달 12월 19일 정당해산심판에서 공식적으로는 RO의 실체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헌재는 결정문 어디에도 구체적 판단을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RO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를 근거로 정당 해산 결정을 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결정문에서도 '이석기를 비롯한 내란 관련 회합 참석자들은 경기동부연합의 주요 구성원'이라고 규정하고, 당시 회합이 통진당의 활동으로 귀속된다며 해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날 상고심 선고에서 항소심과 마찬가지로 'RO의 실체를 인정할 구체적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공소사실처럼 지휘통솔체계 등을 갖춘 조직의 실체가 존재하고 피고인들을 비롯한 회합 참석자 130여명이 이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RO의 존재를 인정하기에는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이 의원의 주도로 회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회합 참석자 130여명이 RO에 언제 가입했고,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의미다.
헌재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헌재의 심판 대상은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느냐 하는 부분이었다"며 "헌재는 내란회합과 중앙위원회 폭력사건, 부정경선 등을 종합했을 때 통진당 활동이 구체적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내란음모 위험성도 시각차 = 내란음모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대법원과 헌재는 미묘한 시각차를 보였다.
앞서 헌재는 "폭력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다는 통진당의 입장은 내란사건에서 현실로 확인됐다"며 RO 회합의 실질적·구체적 위험성을 인정했다.
헌재는 "회합 참가자들은 북한 주체사상을 추종하고 전쟁 발발시 북한에 동조해 국가기간시설의 파괴, 무기제조 및 탈취 등 폭력수단을 실행하려 했다"고 적시했다.
그러면서 "수장인 이석기의 주도 하에 전쟁 발발시 북한에 동조해 폭력수단을 실행하고자 회합을 개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회합 참석자 대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수 없다고 판단한 대법원 판결과 사실상 차이를 보인다.
대법원은 "피고인들을 비롯한 회합 참석자들이 국가기간시설 파괴 등 폭력적 방안을 실행하기 위해 추가적인 논의를 했다거나 준비를 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며 "1회적인 토론을 넘어 내란 실행 행위로 나아가겠다는 확정적인 의사 합치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과 헌재의 판단이 이처럼 차이를 보이는 것은 형사 재판에서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엄격한 증명이 있어야 하지만 헌재의 정당해산 심판에서는 민사소송법을 준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철저한 증거주의인 형사재판에서는 '불리할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기준에 따라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증거가 부족할 경우 무죄 판단을 내릴수 밖에 없지만 헌재의 경우 민사절차로 이뤄져 사실 인정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헌재 심판과 대법원 판결은 판단 대상이 다르다"며 "법원은 형사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고 헌재는 유죄냐 무죄냐 판단이 아니라 위헌적 행위냐를 판단하는 것이어서 두 판단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